소설리스트

92화 (93/192)

“만약 패배해서 빼앗기면 빼앗기는 거지. 그거까진 네 알 바가 아니야. 겨우 그런 가능성 때문에 나한테 이 지랄 한 거면, 어처구니가 없네.”

[……음. 뭐 그렇지.]

소녀가 떨떠름히 말했다. 그녀가 빙글 몸을 돌려 의자에 몸을 얹었다.

[그건 그렇군. 확실히 내가 오랜 시간 시달려서 그런지 감정적이 된 거 같네. 냉정하게 보면 네 말도 틀린 게 없어. 사과하도록 할게. 미안.]

“마음대로 해라. 너는 거래만 지켜 주면 돼.”

[그거야 걱정하지 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사죄의 의미로 더 빠방하게 만들어 주지.]

“그러면 고맙고. 아, 근데 그럼 아그니는 어떻게 되는 거야?”

[변하는 건 없어. 그녀는 여전히 네 소환수고, 넌 여전히 그녀의 소환자지. 단지 그녀의 상태가 좀 변했을 뿐.]

“호오.”

그거 좋은 말이었다. 아그니는 상당히 강해져 있었다. 지배자들과의 전투에 도움이 될 만큼. 그런 그녀를 여전히 불러낼 수 있다면 많은 전력이 될 거였다.

[그럼 작별이야. 통로는 열어 놨으니 오려면 언제든지 와도 좋아.]

소녀가 손을 저었다. 빛이 뭉치며 창연을 휘감았다. 강한 광채가 눈을 가리며, 드드드거리며 사방이 울렸다. 그 순간 중얼거림이 들렸다.

[아…… 잠깐. 이거 미안한 짓을 한 거 같은데.]

깨달은 듯, 난처한 목소리. 창연이 그 뜻을 물으려는 순간 광채가 사라졌다. 창연이 눈을 떴다.

“왔네.”

그가 이동했던 장소 그대로였다. 창연이 휴대폰을 열었다. 시간은 별로 바뀐 게 없었다. 기껏해야 이틀 차이. 창연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다행히 시간은 별로 안 바뀐 거 같군…….”

창연이 말꼬리를 흐리고 가만히 휴대폰을 노려봤다. 무언가 이상했다. 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왜 연도 뒷자리 숫자가 이상하지?”

그가 지구에 있었을 때는 2028년. 그런데 지금 그의 휴대폰은 2030년을 가리키고 있었다. 창연이 얼굴을 구겼다.

“소환. 아그니.”

마법진이 허공에 그려지며 아그니가 튀어나왔다. 그녀가 애매한 얼굴로 창연을 바라봤다.

[어. 음. 주인.]

“말해 봐, 아그니.”

창연이 아그니에게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이거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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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창연이 의자에 앉은 채 팔짱을 꼈다. 그거 팔걸이를 툭툭 건드렸다.

“이야기를 들어 볼까.”

[……정령계와 현실과 시간이 다르다. 그건 알고 있었을 거다.]

“ 물론 알고 있었지.”

창연이 이마를 짓눌렀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골치가 아파 왔다.

“내 말은, 왜 네놈의 주인이 아무 말도 없이 내버려 뒀냐 이거야.”

[……안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 들었다. 잊어버렸다 하시더군.]

“잊어? 치매라도 왔냐?”

창연이 빈정거렸다. 아그니가 변명이라도 하듯 입을 열었다.

[너나 그분이나 인간의 인지를 벗어난 시간을 살아왔으니까. 그래서 그런 시간의 변화를 그리 크게 신경 쓰지 않으신 거다. 게다가 그분은 널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썩을.”

창연이 얼굴을 구겼다. 이 년.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마구 변화가 일어나는 세상이라면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돌아버리겠네, 정말.”

그렇다고 마냥 소녀의 탓만 할 순 없었다. 각 세계마다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지금까지 던전들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렇기에 뇌리 속에서 지워 버리고 있었고, 그 대가는 컸다.

딸각.

문이 열렸다. 창연이 고개를 돌렸다. 두 남자가 투덜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으, 추워라.”

“날씨가 미쳐 돌아가네요. 이제 11월인데. 세상도 미쳐 돌아가고. 아주 난장판이야, 난장판.”

“빨리 문 닫아라. 히터 틀…….”

중년 남자가 고개를 돌리고 멈칫했다. 그가 창연과 아그니를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창연 님?”

“안녕하세요, 배강수 씨. 기억보다 좀 더 늙으셨네.”

“세상에! 창연 님!”

그가 황급히 달려오려 했다. 하지만 아그니를 보고 찔끔 몸을 뺐다. 창연이 손을 저었다.

“돌아가 있어.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야겠어.”

[……미안하다, 창연.]

“네가 미안할 건 없고.”

아그니가 미안한 얼굴로 사라졌다. 창연이 의자를 당겼다. 이신형이 멍하니 다가왔다.

“……진짜 창연 님 맞아요?”

“귀신 아닙니다.”

“지금까지 어디 가셨던 겁니까? 아주 난리가 났었는데.”

“음. 좀 다른 곳에 가 있어서요. 던전 같은 곳.”

굳이 시시콜콜 말할 필요는 없었다. 창연이 책상을 두들기며 인상을 찡그렸다.

“일단 설명을 들어 보죠. 제가 없던 동안, 어떻게 변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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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많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많이 안 변하기도 했고요.”

배강수가 차를 마시며 말했다. 창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하나하나 말씀해 주시죠. 제가 사라지고 파장이 어땠습니까?”

“……난리가 났죠, 아주.”

배강수가 한숨을 쉬었다. 당시 그도 상당히 고생했었다. 그가 만든 길드의 아래에 있다고 사방에서 연락이 왔었다.

“한국의 유이한, 현재 활동 가능으로 치자면 유일한 이탈자가 뿅 하니 사라졌습니다. 정부에선 수색대를 파견했고, 근처 던전을 싸그리 뒤졌습니다. 하지만 창연 님은 발견되지 않았고요. 나라가 휘청……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흔들렸습니다. 창연 님을 기준으로 진행하던 계획들이 있었는데 그게 전부 무너진 거니까요.”

“세계적으로 보자면요?”

“그것도 흔들렸고요. 잘 모르셨겠지만…… 창연 님은 일종의 안전장치로 생각되고 계셨습니다. 플로리다 주를 무너트린 던전. 그곳을 깨낸 이탈자. 여러모로 규격 외이니까요. 앞으로 어떤 던전이 나타나도 창연 님만 계시면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되었는데 사라졌으니 뭐. 그리 크진 않지만, 폭동이 일어났다 하더군요.”

“흐음.”

창연이 팔짱을 꼈다.

“그게 끝입니까? 생각보다 별건 없네요.”

“별거 맞았는데…….”

배강수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말로 들으면 저렇지, 당시에는 정말 혼돈 그 자체였다. 온종일 울리는 벨소리에 전원을 끄고 생활하고 다녔어야 했다. 주가가 요동쳐서 자살하는 사람의 소문도 간간이 들려올 정도였다. 하지만 창연은 그런 거에 관심 없었다.

“일단 저희 가족은 무사한 거죠?”

“아, 네. 일단은 멀쩡하신 상태십니다. 다만 집은 던전에 집어삼켜져서 이사를 하셨습니다.”

“일단 멀쩡하단 소리네요.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죠.”

창연이 미간을 좁혔다.

“던전은 어떤 식으로 되었습니까.”

“……이제 1종, 그리고 2종은 거의 없습니다. 3종과 4종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헌터들도 강해져서 3종 정도는 이제 깨 나가고 있지만…… 문제는 4종입니다. 아직도 그건 이탈자들을 제하면 나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배강수가 침을 삼켰다.

“5종 던전. 플로리다 주, 인천 공항 때와 같은 이질적인 것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호오.”

창연이 미소를 지었다. 슬슬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뭐 하는 곳입니까?”

“글쎄요……. 두 달 전 즈음 나타났는데, 아직 아무도 가지 못해서요. 위치가 절벽 쪽이고, 마땅한 이탈자도 없어서.”

“이자벨라는요?”

“아, 그 부분도 있었지. 참. 그, 창연 씨가 사라질 즈음 사이비 종교로 사건이 터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날뛰었고.”

“네, 그랬죠.”

“반년 전에, 다시 한번 일어났습니다. 저번보다 훨씬 강했죠. 아주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때 이자벨라 씨가 그들을 처리하고 그 수뇌부를 치러 간 후, 실종되었습니다.”

“……실종이요?”

창연이 인상을 찡그렸다. 실종이라니. 배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찾으려 했지만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숭배 집단은 점점 세를 불려 가서 지금은 나라에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헌터들을 흡수하고, 자본을 얻어 강대해졌습니다. 한국에는 없지만 미국에는 공공연히 돌아다니고 있다더군요.”

“그까짓 놈들이.”

창연이 얼굴을 구겼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괴물들에 협력하는 놈들 주제에, 세상에 활기차게 돌아다닌다니.

“일단 대략적인 건 이렇게 같군요. 그럼 정부 측에 연락할까요? 아마 창연 씨 엄청나게 찾고 있을 텐데.”

“아뇨. 그럴 필요는 없고요. 일단 가족 위치를 불러 주시죠. 만나러 가게.”

“아, 네. 알겠습니다.”

창연이 설명을 들은 위치로 공간 이동했다. 이 층의 자택이 보였다. 창연이 중얼거리며 초인종을 눌렀다.

“이전보다 더 크네.”

[누구세요…….]

마이크에서 울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연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엄마?”

[…….]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후 콰광 소리가 들리더니 중년 여자가 헐레벌떡 문을 열었다.

“창, 창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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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정정하시네.”

가족들을 만나고 왔다. 아버지도 어머니고 약간 수척해지셨지만 그리 큰 이상은 없었다. 여동생이야 뭐, 이전이랑 다른 게 없고. 좀 늙긴 했지만.

듣자 하니 정부에서 이것저것 편의를 봐 준 거 같았다. 그가 사라진 동안에도 불편함 없이 생활했었다고 말했다. 이것저것 도와줬다고. 이사할 집도 정부에서 구해 주었다 했다.

창연으로서는 좋았다. 가장 걱정되었던 게 가족이 무슨 불이익을 받을까였으니. 하긴. 2년의 실종. 길긴 하지만 사망 처리할 정도의 시간은 아니었다. 그것도 창연 같은 능력을 가진 자라면 더더욱.

“그러면.”

아직도 할 건 많았다. 괴물의 알의 확인, 던전의 처리, 가복, 파사나카스 등등.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할 것이 생겼다.

창연이 눈동자를 들었다. 아주 예전에, 초기에 얻었던 아이템. 원하는 것의 위치를 알 수 있는 것. 창연이 눈을 감고 생각했다.

‘이자벨라의 위치.’

시야가 반전했다. 일그러진 왜곡이 보이며 시야가 흐트러졌다. 지직거리는 잡음이 퍼졌다.

“복구.”

창연의 말과 함께 잡음이 사그라졌다.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며 이자벨라의 모습이 보였다. 거칠게 일그러진 얼굴로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상대는 괴물이었다.

“……괴물?”

창연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현실 같은데, 괴물이라니. 무언가 이상했다. 창연이 손을 뻗었다.

“공간. 궤적. 도약.”

창연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튕겨 나갔다. 창연이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차단? 이런 것도 할 수 있어?”

공간 이동이 막혔다. 마치 아예 다른 세상처럼 저편으로 통하는 길이 형성되지 않았다. 창연이 입가를 비틀었다.

“역시 이 새끼들이네.”

괴물들과 협력하는 인간들. 창연이 공간을 부여잡고 잡아당겼다. 허공이 구겨지며 검은 공간이 모습을 보였다. 창연이 그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세상이 바뀌었다.

사막이었다. 그늘 하나 없이 모래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사막이라. 위장 때문인가.”

그의 앞에 거대한 건축물이 있었다. 위장을 위한 건지 갈색으로 물들어 멀리서 보면 알아채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최첨단의 형태.

“2년이란 세월 동안 제법 세를 불렸나 보구나.”

의미가 없지만. 창연이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입구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음속을 뛰어넘는 무형의 기운. 창연이 손을 들었다.

쩌엉!

굉음과 함께 모래 더미가 사방으로 퍼졌다. 거대한 사구를 만들어 내며 불균형을 이루었다. 창연이 손에 잡은 걸 살펴봤다.

검게 일렁이는 동그래한 원. 창연이 힘을 주었다. 파직 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공간의 균열.’

그걸 응축해 쏜 거였다. 어지간한 3종 던전의 보스도 견디지 못할 공격.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기술. 그걸 이들은 가지고 있었다. 창연이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방비 하난 철저하군.”

창연이 문을 매만졌다. 얼핏 느껴지는 기운을 보아하니 보통 금속이 아니었다. 이능을 차단하고 자체적인 강도도 상당한 것. 창연이 손에 힘을 주었다.

쩌엉!

문이 우그러지며 박살 난다. 저 멀리 튕겨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창연이 발걸음을 옮긴다.

[경고. 경고. 침입자가 감지되었습니다. 대응 프로토콜이 진행됩니다. 내부자는 신속히 대피해 주시길 바랍니다.]

키잉.

통로로 향하는 문이 닫혔다. 불이 꺼지며 적외선이 사방을 밝혔다. 기계음이 계속하여 울림을 냈다.

[경고합니다. 당장 돌아가십시오. 이곳은 외부인의 침입이 금지된 곳입니다. 경고합니다. 당장 돌아가십시오. 외부인을 막기 위해 위협 행동을 가할 수 있습니다.]

“시끄러.”

창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주먹을 휘둘렀다. 스피커가 박살 나며 잡음이 퍼졌다. 창연이 통로로 향하는 문에 손을 올리고, 내밀었다. 쩌억 하며 구겨져 틈새가 보였다. 그 안에 있는 사람의 형상도.

“넌 뭐야?”

[안녕하신가, 이탈자.]

지직거리며 몸이 흔들리는 걸 보아하니 홀로그램이었다. 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노년의 남자. 의사복을 입고 있는 그가 수염을 매만지며 창연을 바라봤다.

[흐음. 분명 이 년 동안 안 보이기에 죽은 줄로 알았는데,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다니.]

“아직 뒤질 처지는 아니라. 그러면, 너흰 그놈들이지?”

창연이 웃었다.

“그 잡것들의 추종자들.”

[잡것들이라니. 하긴, 그 위대한 분들과 맞상대하는 네놈에겐, 그럴 수도 있겠구나.]

의외로 노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창연. 우리가 굳이 대립할 이유가 있나? 너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았는데 말이야. 아, 혹시 이 안에 갇힌 이탈자들과 헌터들 때문이라면 풀어 주도록 하지. 이미 뽑아 먹을 건 다 뽑아 먹었거든.]

“닥쳐.”

창연이 성큼 다가가 수신기를 짓밟았다. 환영이 픽 하고 사라졌다. 창연이 주먹을 휘둘러 문을 부숴 버렸다.

그가 이놈들을 조지려는 이유는 이자벨라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 인간 주제에 괴물들과 협력하는 놈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그런 생각, 다시는 하지 못하게 뿌리까지 뽑아 버릴 거였다.

창연이 기나긴 통로를 지났다. 닥치는 대로 눈에 보이는 걸 부수고 전진하자 광장이 나타났다. 그 안으로 걸어가려는 순간이었다.

파직.

“어라.”

창연의 움직임이 막혔다. 광장으로 들어가려 하자 파지직거리는 전류가 생겨나 그를 가로막았다.

“이까짓 게.”

창연이 코웃음 치며 몸을 구겨 넣었다. 하지만 전류가 더 강해지더니, 창연을 튕겨 냈다. 창연이 자세를 잡고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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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자가 첫 번째 트랩에 걸려들었습니다.”

“역시.”

노인이 웃었다. 지금 CCTV로 창연의 행동을 보고 있었다. 전류에 가로막혀 전진을 못하고 있었다.

“자네가 강하다는 건 아네. 하지만 말이야. 우리라고 가만히만 있는 건 아니라서.”

노인이 와인을 마시며 중얼거렸다. 창연은 강하다. 그건 부정할 수도, 이유도 없는 사실이었다. 모든 이탈자를 치더라도, 지배자를 포함하더라도 최상위라 할 수 있을 정도. 그런 놈에게 힘으로 상대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그들은 수많은 이탈자, 그리고 헌터들을 포박한 상태였다. 이탈자 중 최상위권인 이자벨라마저. 그녀를 붙잡으려면, 일반적인 방식으론 불가능했다.

“지금 자네가 보고 있는 건 특제라서 말이야. 아마 힘들 걸세.”

단순한 전류가 아니었다. 던전의 힘과 과학이 결합한 이질적인 무언가였다.

저 전류가 가진 특성은 이탈자들의 천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순 무력이 아닌, 이탈자들의 힘과 같은 이질적인 무언가로 공격하면 오히려 그걸 흡수해서 더 강해지는 전류였다.

지금까지 수많은 이탈자들을 포획한 힘. 그건 창연도 예외가 아닐 거였다. 노인이 흐뭇하게 웃었다.

“흐흐. 이탈자, 창연의 포박이라니. 내 평가가 한층 더 올라가겠군. 잘하면 주인님에게 축복을 받을 수도 있겠어.”

“저기, 본부장님.”

“음? 왜 그러는가?”

“……통과했는데요?”

“……뭐라고?”

노인이 황급히 CCTV를 바라봤다. 창연이 전류의 방을 통과한 채 몸에 붙은 것들을 털어 내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이 해괴하게 일그러졌다.

“뭐야? 어떻게? 지금까지 아무도 못 했는데?”

“모르겠습니다. 어찌어찌 만지니까 뚫어 버렸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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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기도 해라.”

전류가 아직도 그의 몸에 달라붙고 있었다. 대충 붙잡아 떼어 냈다. 지직거리는 게 허공으로 흩날려 사라졌다.

‘오랜만이네.’

이탈자들의 힘을 흡수해서 강해지는, 처음 보는 방식이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현대에서 처음 봤을 뿐. 이런 건 예전에 본 적이 있었다. 바로 그가 갇힌 던전에서.

그것들이 눈앞에 나타나다니. 무언가 색다로웠다. 마치 이전의 던전에 다시 들어간 기분이었다.

“무언가 그립네.”

창연이 중얼거렸다. 마치 던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창연이 광장을 지나 다음 통로로 들어갔다. 이번엔 허공에서 강대한 중력이 그를 짓눌렀다. 창연이 몸을 낮췄다.

“이것도 마찬가지군.”

중력의 대지. 그가 몇 년 살았던 곳, 그곳과 똑같았다. 그럼 파훼법은 알았다. 힘을 주면 그만큼 똑같은 힘이 부가된다. 그렇다면, 반발하지 않으면 되었다.

“동화.”

몸이 출렁이며 중력의 기류가 바뀐다. 억압되는 양이 천천히 줄어든다. 창연이 어깨를 폈다.

“쉽네.”

창연이 중력의 길을 벗어났다. 그리고 다음 통로가 보였다. 그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거센 파장이 창연의 몸을 두들겼다. 창연이 웃었다.

그러는 동안 시설의 관리인들은 미칠 지경이었다. 노인이 거칠게 두들기며 소리쳤다.

“뭐야! 왜 이리 쉽게 뚫려! 이런 말은 없었잖아!”

지금까지 그 누구도 통과하지 못한 길이었다. 일단 저기 사로잡히면 꼼짝없이 붙잡혀야만 했었다. 그런데 지금, 창연은 시원하게 통과하고 있었다. CCTV를 보던 남자가 혀를 내둘렀다.

“와. 안 멈추는데요? 중력의 방은 그렇다 쳐도 카파나의 레프라나 레바토르스마저? 뭐지 진짜. 이러다 얼마 안 있으면 도달하겠어요.”

“지금 느긋하게 말할 처지야? 잘못하면 너나 나나 둘 다 모가지야.”

“에이. 전 아니죠. 전 기술자라고요. 아직 쓸 만하죠. 본부장님은 아니지만.”

“이 새끼가.”

노인이 이를 갈았지만 틀린 말은 없었다. 그가 손톱을 깨물며 초조하게 화면을 바라봤다. 지금 창연이 통과하는 방은 비틀린 공간 왜곡의 방. 페이나라크. 지정된 루트에 따라가지 않으면 일그러진 틈으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런 곳을 마치 제집처럼 태연하게 걸어갔다. 그것도 지정된 루트만 따라. 노인이 기가 차 내뱉었다.

“뭐야, 대체…….”

“흠. 이거 확실히 이상하긴 한데. 저건 경험이나 사전 정보가 없으면 불가능한 움직임인데…….”

창연이 던전에서 이미 경험해 봤다는 걸 모르는 그들로선 당연한 의심이었다. 노인이 눈가를 좁혔다.

“설마 그년이 알려 줬나?”

이 모든 것은 단 한 명의 인간이 만들어 낸 거였다. 어느 정도 보조가 있었지만 기본적인 골자는 그랬다. 그 말에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이쪽에서 모든 정보를 차단하고 있는데. 지금 바깥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줄도 모를걸요? 불가능하죠.”

“그럼 저 움직임이 말이 되냐고!”

“말이 되고 자시고, 이미 보고 있는데, 뭘.”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노인이 신음을 흘렸다. 창연이 슬슬 마지막까지 도달한 상태였다. 노인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최대한 막으려 해 보고, 마지막까지 오면 그 장치를 켜.”

“네? 그거요?”

남자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 눈엔 불신이 담겨 있다.

“그 여자가 어지간하면 건드리지 말라고 그랬는데. 불안정하다고. 잘못하면 이 시설 자체가 날아갈 수도 있다고.”

“닥치고 해. 죽기 싫으면.”

노인이 거칠게 내뱉었다. 그로선 어쩔 수 없었다. 설령 여기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그는 분명 망할 거였다. 귀중한 지부가 날아가고, 붙잡은 이탈자와 헌터들은 전부 풀려나가고, 그에 따라 기밀도 대중에 흘러나갈 게 분명했다.

어찌 목숨을 유지했다 하더라도, 조직에서 입지가 줄어들거나, 아니면 암살당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니, 설령 여기서 막는다 하더라도 이 정도 털린 것만 해도 상당한 타격이 올 거였다.

‘하지만.’

창연만 붙잡으면, 모든 게 해결됐다. 윗선에서 특별히 조심하라는 말이 오갈 정도의 이탈자. 어쩌면 공로를 인정받아 이런 사막이 아닌, 좀 더 큰 곳의 본부장이 될 수도 있었다.

“본부장의 명령이다. 시설이 날아가든 말든, 시행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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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누가 만든 걸까.”

창연이 통로를 걸으며 중얼거렸다. 통과하면서 이질적인 것들을 많이 봤다.

그 전부가, 그의 던전에 있던 것들. 무언가 반갑기도 하고 소름 끼치기도 했다. 이 정도까지 구현되었다니. 슬슬 죽이기보단 궁금했다. 대체 누가 만든 것인지.

쑥쑥 자라나 시야를 가리는 식물을 치우고 앞으로 나아가자 조그마한 문이 보였다. 손을 틈에 구겨 넣어 강제로 열어 버렸다. 그리고 굉음이 울렸다.

콰아아앙!

“이 빌어먹을 괴물들이!”

이자벨라가 고함을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파장이 엉켜 퍼지며 사방을 휩쓸었다. 그녀가 상대하던 괴물들이 처박혀 곤죽이 되었다.

“썩을. 끝도 없군.”

그녀가 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창연이 걸어갔다.

“안녕?”

이자벨라가 황급히 몸을 돌리고,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믿을 수 없는 걸 본 듯한 얼굴을 했다.

“……창연?”

“너 왜 여기 있냐?”

“……그거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이자벨라가 얼굴을 구겼다.

“뭐야, 어떻게 된 거냐. 넌 분명 사라지지 않았나? 왜 있지? 아니, 그것보다 어디가 있었던 거냐? 대체 왜 안 나타나고…….”

“그만.”

창연이 손을 들었다. 하나하나 다 받아 주면 하루가 종일 지날 거 같았다.

“일단 지금의 문제부터 해결하지. 넌 왜 여기 있어? 여기 그 광신도들 지부 아니야? 몇 달 전에 실종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래.”

이자벨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지긋지긋할 지경이었다.

“난 이 새끼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인간 주제에, 괴물에 협력하는 놈들. 그래서 죽이려고 왔지. 겸사겸사 갇혀 있다는 사람들을 구하러. 그런데 들어오니까 빌어먹을 장치들이 발현되더군. 덕분에 갇혀서 못 나가는 상태다. 무엇보다.”

키잉.

기계음과 함께 저편에 있는 문이 열렸다. 그리고 괴물이 나타났다. 머리 여럿 달린 개. 집채만 한 크기. 이자벨라가 이를 갈았다.

“……저 개 같은 괴물들을 지속적으로 내보내더군. 마치 테스트라도 하는 것처럼. 식량도 주면서 말이야.”

“흐음.”

창연이 몸을 돌려 괴물을 바라봤다. 명백히 던전의 것. 그것도 상당히 강해 보였다. 못해도 3종, 아니면 4종. 그런 것이 현실에 있었다. 2년이란 세월 동안 이 정도로 발전하다니.

“궁금하네. 뭔 수단을 쓴 건지.”

창연이 대지를 밟았다. 파동이 퍼져 나가며 괴물을 후려쳤다. 힘의 파도에 짓눌려 짐승의 전신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쿠에! 쿠에에에!]

괴물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튼다. 피가 사방으로 퍼지며 다리가 뭉개진다. 이자벨라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린다.

“가차 없군.”

“봐줄 필요가 있나? 너나 나나 이것들 죽이고 싶은 건 마찬가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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