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대환신 일루시온 (1)
미스티코의 시스템은 본래 열두 명의 장로라 불리는 고대의 환신들이 완벽하게 수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날 그리포스의 대환신 일루시온의 음모로 그들은 모두 흩어지게 되고, 그때부터 그리포스와 미스티코의 전쟁은 계속 되었고, 그리포스에 의해 신계는 더욱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고 했다.
사라진 열두 장로들은 어딘가에 자신들의 진전을 남겼고, 그 후로 미스티코의 환신들은 그 진전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진전을 상훈이 얻음과 동시에 그리포스와 미스티코의 최후 전쟁이 도래한 것이다.
“그리포스의 대환신 일루시온이 고대 환신병의 비밀을 풀어낼 줄은 우리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전상훈 당신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이곳 결계는 물론이고 미스티코의 시스템도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대환신 나스룬과 파스나는 상훈을 향해 진심어린 사의를 표했다.
미스티코의 시스템은 차원 시스템이나 혼돈 시스템과 같은 하부 시스템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으로, 신계를 포함한 모든 세계가 유지되도록 만들어진 초신적(超神的)인 영역에 있는 것이었다.
미스티코의 환신들은 장난처럼 그것을 조종하거나 간섭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그것을 지키는 수호자로서의 역할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포스의 환신들은 금단의 영역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모든 걸 파괴하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들에게 가장 거슬리는 것이 바로 미스티코의 시스템이고, 그래서 고대로부터 끊임없이 야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티코의 시스템이 부서지는 건 저 역시도 원하지 않습니다. 시스템을 위협하는 그리포스의 세력은 제가 모두 제거할 테니 당신들은 지금처럼 이곳에서 계속 시스템을 지켜주세요.”
그러자 나스룬과 파스나의 안색이 환해졌다.
“이곳은 저희가 최선을 다해 지키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꼭 그리포스의 세력을 물리쳐주십시오.”
“지금은 당신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 사이 나스룬의 환신체는 모두 복구된 터였다.
그러나 이제 파스나의 환신체가 사라진 터라 유사시 나스룬 혼자서 그리포스들과 상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환신체가 둘 이상만 나타나도 밀리고 말 테니 말이다.
그래서 파스나는 상훈에게 한 가지 정중한 부탁을 해왔다.
“혹시 위급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저희가 당신을 이곳으로 소환 요청할 수 있게 허락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상훈은 흔쾌히 끄덕였다.
“오히려 바라는 바입니다. 그럼 저도 마음 놓고 그리포스를 공격하러 나갈 수 있겠지요.”
그게 안 되면 상훈도 이곳에 남아 계속 방어만 하고 있어야 한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리포스들이 공격해 오면 골치아프기 때문이다.
그러자 곧바로 파스나가 다가와 상훈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손에서 신비한 환신력이 나와 상훈의 몸을 휘감았다
“이것은 미스티코의 대환신인 제가 가진 권능을 당신에게 주어 진정한 미스티코의 대환신으로서 인정한다는 의식입니다. 이로써 당신은 특별한 권능을 갖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대환신 나스룬도 상훈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자신의 권능을 내주었다.
“이후 당신이 점령해나가는 그리포스의 영역들은 자동적으로 미스티코의 영역이자 당신의 영역으로 바뀔 것입니다. 어떤 곳이든 당신이 한 번 거쳐간 곳은 당신의 영역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미스티코의 모든 환신들 중 오직 당신만이 가진 권능입니다.”
이렇게 나스룬과 파스나는 대환신으로서 자신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권능들을 상훈에게 아낌없이 넘겼다.
사실상 상훈이 미스티코 환신계의 최고 권능자의 위치에 오른 것이었다.
이제 상훈이 지나간 모든 곳이 상훈의 영역이 될 것이다.
물론 상훈이 점령했다 해도 그리포스의 환신들에게 패배하면 그곳은 다시 그리포스의 영역이 된다.
다만 일단 상훈의 영역이 되면 그곳 전체를 손바닥 보듯 볼 수 있게 되며, 어디든 공간이동이 가능하다.
그것은 상훈이 그리포스의 세력과 싸울 때 매우 유용할 것이다.
* * *
상훈은 아르타나와 함께 그리포스의 영역으로 이동 중이었다.
천계가 천역들로 구분되어 있고, 마계가 마역으로 구분되어 있듯이, 환계 또한 무수한 환역(幻域)들로 구분되어 있었다.
나스룬과 파스나로부터 모든 권능을 넘겨받은 상훈이기에 그가 지나가는 그리포스의 환역들은 모두 미스티코의 환역임과 동시에 상훈의 환역이 되었다.
‘정말로 내가 지나간 곳은 손바닥처럼 훤히 보이는군.’
투명한 입체지도가 저절로 생성되는 것과 비슷했다.
“천역이나 마역들과 달리 환역은 조금도 개발되어 있지 않군. 모두가 그저 황무지처럼 황량하게 느껴지는구나.”
잠재력을 보면 천역이나 마역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곳이 바로 환역이다.
그러나 그러면 무엇하는가.
개발을 하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이다.
아르타나가 씁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오직 전쟁만 해왔던 환신들에게 개발은 사치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만약 로드께서 일루시온을 비롯한 그리포스의 환신들을 모두 제거하면 그땐 환계에도 평화가 도래해 환역들을 개발할 수 있게 될 거예요.”
“곧 그 날이 올 테니 염려마라. 그리고 이제부터 나는 네 말대로 환신장들의 환신궁부터 모두 다 부술 생각이다. 하나씩 안내해라.”
“네, 로드.”
잠시 후 상훈은 그리포스 제 8 환신장 후에베스의 환신궁에 도착했다.
환신궁이 있는 환역 위에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궁전.
그곳 주위로 수많은 환신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러나 상훈이 나타나자 환신들은 기겁하며 도주했다.
“도망가지 못한다!”
환신체 상태인 상훈은 종횡무진 환역을 누비며 거검 아르타나를 휘둘렀다.
“으아아악!”
“크아악!”
그리포스 환신들이 모조리 먼지로 변해 흩어졌다.
그들의 환신력 또한 모두 흡수되었는데, 잠재력으로 들어오는 것이라 당장 환신력이 늘어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언제고 환신력으로 전환되면 상훈은 거의 고갈되지 않는 무한한 환신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환신장 녀석이 보이지 않는군.’
딱 보니 이곳의 환신장 후에베스는 상훈이 환역에 나타나자마자 도주한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부하들을 두고 혼자 살겠다고 도주하는 건가?’
상훈은 왠지 어이가 없었다.
이로써 그는 가볍게 제 8 환신궁을 점령했다.
환신궁은 상훈이 환신체 상태에서 거검 아르타나를 한 번 휘두르자 그대로 먼지가 되어 내려앉았다.
그리포스의 환신궁 하나가 이렇게 사라졌다.
그리고 이곳 또한 상훈의 환역이 되었다.
계속해서 상훈은 제 7환신궁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곳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상훈이 나타났는지 알아챘는지 환역에 진입하는 순간 환신장은 도주했고 상훈은 환신들만 처치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어찌 보면 무서운 놈들이군.’
사실 승산이 없으면 도주하는 게 현명하다.
그러나 대부분 그것을 알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경우도 많지만, 환신장들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오래도록 자신들의 기반이 되어주던 환신궁이 부서지는데도, 또한 부하 환신들이 죽어나가는데도 조금의 미련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도주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상훈에 의해 그리포스의 환역들이 계속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식이라면 어딘가 다른 곳에 환신궁을 다시 세우기도 쉽지 않을 테니까.
* * *
그리포스의 환신계 대환신궁의 신비한 정원.
그곳에 푸른 색의 신비한 머리카락에 환상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 바닥을 내려다봤다.
정원의 바닥은 그리포스 환신계의 지도가 축소되어 펼쳐진 상태.
각각의 환역이 있는 곳마다 풀이나 꽃이 자라고 있었는데, 지금 그 풀과 꽃들이 계속 줄어드는 중이었다.
이는 상훈이 그리포스의 환역을 계속 점령해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스룬과 파스나가 저놈에게 모든 권능을 넘겼나 보군.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이었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청년은 조소를 흘렸다.
‘전상훈이라는 놈이 갑자기 별종처럼 튀어나왔지만, 그놈은 결국 나 일루시온의 하수인이 될 운명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 이 신비한 외모의 청년이 바로 그리포스의 지배자인 대환신 일루시온이었다.
‘저 놈이 나의 하수인이 되면 미스티코의 환신계는 저절로 나에게 떨어지게 되겠지. 저놈의 모든 권능 또한 내가 가지게 될 것이다.’
그 사이 또 다른 환신궁이 공격당하고 있었다.
환신궁에 속했던 모든 그리포스의 환신들이 상훈에게 죽임을 당했고, 환신궁은 모두 무너져내렸다.
일루시온은 정원의 지도를 통해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짙은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어차피 때가 되면 모두 정리할 녀석들이었는데 알아서 해결해주니 나로서는 고맙다고 해야겠지. 나의 수고를 덜어주었으니까.’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또 흘렀을까?
어느새 대환신궁을 제외한 8개의 환신궁이 모두 상훈에게 점령당했다.
이대로라면 이제 숨겨져 있던 그리포스의 마지막 환역이 드러나 이곳 대환신궁도 노출되게 될 것이다.
‘이제 때가 왔군. 그놈을 나의 하수인으로 만들 때가 말이야.’
일루시온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전상훈! 네놈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내가 왜 그리포스의 환신들을 네놈에게 죽게 만들었는지. 네놈이 흡수한 그 많은 환신력! 이제 그것이 너를 나의 하수인으로 굴복시킬 것이다. 너는 나의 가장 충실하면서도 강한 부하가 될 것이다.’
그와 함께 그는 한 손바닥을 활짝 폈다.
화르르!
검붉은 불꽃이 그의 손에서 일어나더니 돌연 거대한 불의 폭풍으로 변해 어디론가 사라졌다.
바로 그 순간.
상훈은 8개의 환신궁 중 마지막 제 1환신장의 환신궁을 박살낸 후 담담히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생겨나더니 그것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놀랍게도 그것은 욕망덩어리였다.
사악한 욕망!
그리포스 환신들의 환신력을 흡수할 때마다 조금씩 이런 욕망을 느끼긴 했지만 그는 이내 그것을 소멸시켜버렸다.
‘사라진 게 아니었던건가?’
완전히 없앴다고 생각했던 사악한 욕망의 감정!
그런데 지금껏 그렇게 사라졌다 생각했던 욕망의 불꽃들이 한 번에 솟구쳐나올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화르르르르!
어느 새 그의 마음속에는 그 욕망의 불꽃들의 거대한 폭풍이 되어 휘돌고 있었다.
맑게 빛나고 있던 상훈의 눈빛은 점점 어둡게 변하더니 이내 완전히 검어졌다가 다시 섬뜩한 붉은 빛으로 변했다.
‘크으윽! 내 마음을 제어할 수가 없다······.’
상훈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마음이 통제가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파괴해버리고 싶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없애버리고 싶었다.
‘미스티코 시스템만 파괴하면 모든 걸 끝낼 수 있다.’
지구가 어떻게 되든, 가족들이 어떻게 되든, 지금껏 그를 믿고 따라와준 부하들이 어떻게 되든, 상훈은 그런 것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지금 그의 마음을 장악한 파괴적인 욕구에만 충실하고 싶을 뿐이었다.
‘크으윽! 아니야. 이건 절대 정상적인 마음이 아니다.’
붉게 물들었던 상훈의 두 홍채가 이내 세차게 흔들렸다.
어느덧 환신체에서 본신으로 돌아온 그는 이를 악물며 비틀거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설마 그리포스 환신들의 환신력 때문인가?’
숫자조차도 알 수 없는 수많은 환신들의 환신력이 상훈의 몸에 잠재력으로 들어와 있는 상태다.
그 잠재력의 양이 어느 정도일지는 상훈도 측정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미증유의 잠재력!
그런데 그것들이 결국 뭔가 부작용을 일으킨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