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조화합벽진 (2)
“너희들도 무력한 상태에서 당해봐야 그 고통을 알 것이다. 물론 그래봤자 너희들이 한 짓에 비하면 수만 분의 일도 안 되겠지만.”
상훈은 리카이스를 싸늘히 내려다봤다.
“너희들을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지만 뜻한 바가 있어서 잠시 유예할 생각이다. 그러나 이 징벌을 견뎌낸다는 조건이다. 못 견딘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스스로 죽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말이야. 하지만 진정으로 참회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고통을 참아내라. 너희들이 한 짓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케시우스 스승님이 말한 마신들 중에도 착한 녀석이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게 보여봐라.”
그러자 리카이스가 다시 몸을 떨었다.
이것은 단순한 징벌이 아니었다.
상훈이 절대마신으로서 마신들에게 주는 징벌인 것이다.
그리고 일종의 시험이었다.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상훈은 모든 마신들을 다 죽여버릴 것이다.
마신들에게도 어떤 식이든 선한 의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그러한 참사를 막을 수 있으리라.
“반드시 참아내어 절대마신께 저의 충정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리카이스는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상훈은 싸늘히 웃었다.
“이곳에만 시간이 매우 느리게 흐를 것이다. 밖은 고작 하루가 지나가겠지만 이곳에선 백 년과 같은 긴 시간이 될 것이다.”
백 년이라니!
물론 신들에게 있어 백 년이란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인간처럼 고통을 느끼게 되는 상황에서 백 년을 견뎌내라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그때 상훈이 천사들과 선녀 시종들을 쳐다봤다.
“무엇들 하는 거냐? 어서 너희들을 짓밟았던 사악한 마신들과 악신들을 징벌하라!”
대천신의 명령!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대천신의 뜻을 따르겠사옵니다.”
천사 중 하나가 검을 쥐고 걸어가 앞에 서 있는 마신의 가슴을 찔렀다.
푸확!
그러자 마신이 입을 쩍 벌렸다. 그 고통이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마신의 체신이고 뭐고 그는 비명을 질러댈 수밖에 없었다.
“크아아아악!”
계속해서 다른 천사들과 선녀 시종들이 각각의 도구를 주워들고 마신들과 악신들을 공격했다.
망치로 머리를 깨뜨리기도 하고, 톱으로 썰기도 했다.
잔인하지만 그간 마신들과 악신들이 했던 것에 비하면 장난에 불과했다.
“으아악! 사, 살려줘!”
“크아아악! 잘못했습니다!”
“크아아아아악! 제발 용서해주세요!”
대마궁의 광장에 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특히나 많은 공격은 대마신 리카이스에게 집중되었다.
“크으으으윽! 크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그는 입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마신력이 봉인된 것도 모자라 고통은 수십 배라니!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가 대마신인만큼 상훈이 특별히 겹겹의 저주를 쏟아부은 터라, 그는 다른 마신들보다 훨씬 더 극악한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크아아아아아악!”
그렇게 비명을 질러대는 리카이스의 모습을 상훈은 싸늘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정심은 조금도 없었다.
그간 마신들이 한 행동은 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죽어라. 죽으면 나 또한 너희들을 깔끔하게 포기한다.’
상훈은 내심 마신들이 여기서 모두 다 자결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절대마신 케시우스의 유지를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다.
하지만 단 한놈이라도 버텨내는 놈이 나온다면?
그때는 조금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대천계의 절대천신임과 동시에 대마계의 절대마신으로서 마신들을 지배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지도 모르니까.
저 고통은 악과 깡으로 버틸 수 있는 게 아니다.
진짜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징벌을 감수하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진심어린 참회가 없다면 악으로 깡으로 버티다 십중십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릴 것이다.
앞으로 모든 마신들은 지금의 이 시험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지옥의 고통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견뎌내는 놈들만이 그나마 갱생의 여지가 있을 테니까.
마찬가지로 천신들 중에 또 위선자가 나오면 이전처럼 죽이지 말고 이 시험을 통해 갱생의 기회를 줄 것이다.
모조리 쓸어버리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절대천신이자 절대마신인 그에게는 이제 어느 정도의 관용이 필요했다.
‘진짜 전쟁은 따로 있으니까.’
환계의 신들과의 전쟁!
어쩌면 대천계와 대마계를 통합하면 그들과 싸우는데 조금이나마 유리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 * *
하루의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그러나 그 하루가 대마궁 안에서는 백 년처럼 길었다.
대천신 상훈의 명령을 받은 천사들과 선녀 시종들은 엄숙한 표정으로 징벌을 수행했고, 마신들과 악신들은 고통 속에서 울부짖었다.
그리고 실제로 구할 이상의 마신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들에게는 진심어린 참회를 할 생각도, 자신의 행위에 대해 징벌을 감수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뜻밖에도 대천궁에 있던 수천 명의 마신과 악신들 중 대략 300여 명이 끝까지 그 고통을 참아냈다.
그 중에는 대마신 리카이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멈춰라. 이제 그만 징벌을 끝내라.”
그 말에 징벌을 행하던 천사와 선녀 시종들도 안도하며 물러났다.
그들은 더 이상 마신들과 악신들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들의 표정은 모두 비장했고, 또한 진심어린 참회의 자세가 되어 있었다.
특히 가장 큰 고통을 받았던 대마신 리카이스의 표정에는 그 어떤 원망의 기색도 없었다.
천신들처럼 성스러운 표정은 아니지만, 더 이상 그의 눈빛과 표정에서 악스러운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뜻밖이군. 그 고통을 버텨내다니.”
“짐승처럼 살았던 저의 과오를 떠올리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참회의 기회가 영원히 없을 것이란 생각에 버텼습니다. 당신의 자비로 저에게 삶의 기회가 계속 주어진다면, 그간 제가 고통을 주었던 모든 존재들에게 진심으로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리카이스의 말에는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약속대로 일단은 살려준다. 하지만 잊지마라. 그렇다고 너희들을 용서한 것이 아니니까. 그저 잠시 너희를 죽일 시간을 늦춘 것뿐이다. 이후에 너희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계속 지켜보겠다.”
“솔직히 천신들처럼 선하게 살 수 있을지는 자신없지만, 더 이상 이유없이 악을 행하며 죄없는 자들을 괴롭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 휘하에 그런 일을 벌이는 녀석이 있으면 따끔하게 혼을 내주어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벌이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대마신 리카이스의 입에서 이같은 말이 나올 줄이야.
정말로 저 말이 지켜진다면 신계 뿐 아니라 하부 세계에도 매우 평화로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사악한 마왕과 라트로들이 몽땅 사라져 없어져버릴 테니까.
“아직 이곳 대마계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마신들이 무수히 많다. 그 모든 마역들의 마신들을 관리해 지금의 너와 같은 생각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 너의 할 일이다.”
“명을 받들겠사옵나이다.”
리카이스는 사명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엎드려 대답했다.
상훈은 다시 말했다.
“나는 환계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환계라시면?”
“너와 계약했다는 여신 아르타나가 바로 환계의 신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근원적인 악의 세력이 바로 그들이지.”
“당신의 뜻이 그러시다면 저는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들과 어떻게 연락을 했는지 말해라.”
“어느날 그들이 나타나 이 수정구를 줬습니다.”
리카이스는 아공간에서 신비한 빛의 수정구 하나를 꺼내 바쳤다.
“이 수정구에 마신력을 주입하면 그들이 제게 연락을 취해 오는 식이었습니다.”
상훈은 수정구를 자세히 살폈다.
알 수 없는 신비한 기운.
그것은 분명 환신력의 기운이었다.
‘환신들이 만든 것이 분명하군.’
상훈은 수정구를 아공간에 넣었다. 시간을 두고 수정구를 살펴보기로 했다.
“환계의 신들과의 전투를 위해 나는 천신들과 마신들로 이루어진 합벽진(合壁陣)을 구상 중이다. 그들은 천신이나 마신 따로는 상대하기가 매우 어렵지만, 서로 힘을 합치면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희들이야 이미 준비가 되었지만 천신들이 과연 저희들과 합벽진을 이루려 하겠습니까?”
“그건 염려할 것 없다.”
대천신인 상훈의 뜻을 따르지 않을 천신은 없으니까.
곧바로 상훈은 대천궁으로 돌아와 애신 리오니스를 비롯한 최상급 천신들에게 자신이 절대천신 벡사티오의 진전을 이었음을 밝혔다.
동시에 절대마신 케시우스의 진전도 이은 것도 말했다.
“이것은 여의천병이고 이것은 여의마천병이다. 다시 말해 나는 천신이 될 수도 있고 마신이 될 수도 있다. 이후 신계의 천신들과 마신들이 모두 나의 아래 모여 하나가 될 것이며, 그들과 함께 환계의 신들을 말살시킬 것이다.”
그러자 리오니스 등은 모두 경악했다. 상훈이 천신이자 마신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리오니스는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즉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신은 대천신의 뜻에 따르겠사옵니다.”
이는 그녀가 상훈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대천궁 직속인 3품 천신 예리엘 또한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대천신의 뜻대로 하소서. 소신은 대천신께서 악을 얼마나 미워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사옵니다. 마신들이 진심으로 참회한다면 천신들이 어찌 그들을 수용하지 못하겠사옵니까?”
그녀는 현재 대천궁 직속의 천신 중 가장 높은 품계를 가진 천신이었다. 그녀보다 상위 품계를 가진 천신은 이번 소노루의 난에 휘말려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의 말이 대천궁 모든 천신들의 뜻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사천의 대신장과 대천궁 최상위 천신이 상훈의 뜻을 따르기로 한 이상 그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물론 상훈은 누군가 반대를 한다고 해서 뜻을 굽힐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천신들에게도 선택할 기회를 준 것이었다. 무작정 따라오라고 하기보다 납득시켜서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곧바로 상훈은 천신과 마신들이 함께 펼칠 수 있는 합벽진을 만들었다.
조화합벽진(造化合壁陣)!
이는 상훈이 대천신들의 신공과 대마신들의 마신공들을 두루 터득했기에 창안할 수 있었다.
신공과 마신공이 조화되자 그 각각의 위력이 증폭되어 상상 이상의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는 천신들간의 합벽진이나 마신들간의 합벽진으로는 낼 수 없는 불가사의한 위력!
신계에서는 불가능하다 여겼던 천신과 마신의 조화가 이루어낸 기적인 것이다.
이에 리오니스가 놀라 말했다.
“조화합벽진은 환신들 뿐 아니라 다른 어떤 강적들이 나타나도 매우 큰 위력을 발휘하겠군요.”
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이제부터 리오니스 네게 훈련의 총대장을 맡기겠다. 리카이스 너는 부총대장으로 총대장인 리오니스의 명령을 따라 마신들을 잘 통솔하도록 해라.”
“맡겨주세요.”
“명을 받들겠습니다.”
리오니스가 상관이 되었지만 리카이스는 불만을 품지 않았다.
물론 전투력으로 따지면 리오니스가 리카이스보다 더 강했다.
리오니스는 1품 천신이지만, 고대 대천신의 진전을 이었을 뿐 아니라 모든 잠재력을 신력으로 전환했고, 그후로도 부단한 노력을 한 터라 어지간한 대천신이나 대마신을 능가하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전투력이 강한 리오니스가 상관이 되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상훈이 설령 하급 천신을 상관으로 앉혀놔도 리카이스는 순응했을 것이다.
그는 뭐든 상훈의 뜻이라면 그 어떤 토도 달지 않고 따르겠다는 절대충성의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리오니스와 리카이스에게 훈련의 책임을 맡겨둔 상훈은 비로소 한숨을 돌렸다.
‘그럼 이제 나 또한 수련을 해볼까?’
합벽진을 창안하는 도중 떠오른 영감들을 활용하면 상훈 자신만이 펼칠 수 있는 강력한 신공이나 마신공을 창안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전에 잠깐 대천고와 대마고를 한 번씩 훑어봐야겠군.’
열쇠들만 받아두고 아직 열어보지 않은 대천계와 대마계의 보고들.
상훈은 먼저 대천고의 열쇠부터 손에 쥐었다.
‘아공간에 있으니 어디서든 이 열쇠만 있으면 열 수 있다고 했지.’
과연 그 말대로였다.
상훈이 찬란한 백색으로 빛나는 대천고의 열쇠를 손에 쥐는 순간 앞쪽에 투명한 문같은 것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열쇠 구멍이 보였다.
끼릭.
상훈이 열쇠를 넣고 돌리자 대천고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