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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무저갱 속으로 (2) (123/159)

 # 123

무저갱 속으로 (2)

상훈이 애써 버티자 크델라가 춤을 추듯 몸을 비틀며 요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다시 까닥였다.

“으······.”

대천신들도 저항하지 못했는데 상훈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

상훈은 그대로 달려가 크델라를 덮치고 말았다.

그러자 크델라가 잔혹한 미소를 피워내더니 창대로 상훈을 마구 후려쳤다.

“이 따위 가벼운 유혹도 견디지 못하다니! 벌을 받아야겠구나.”

퍼퍼퍽! 퍽퍽!

“크윽!”

크델라는 지독히 가학적인 취향을 가진 듯 매를 후려치면서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잘 들어라. 요극마신공도 네가 익힌 뇌륜마신공처럼 10단계까지 연공해야 한다. 단계가 오를수록 매혹의 정도도 강력해지고 창의 공격력도 강해진다만 매혹에 대한 저항력을 기르지 못하면 연공 자체가 불가능하다.”

“명심하겠습니다.”

상훈은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천화봉신공을 펼치면 저 따위 유혹쯤은 가볍게 이길 수 있는데 그랬다간 의심을 살 테고 이거 진짜 미치겠다.’

대천신 안젤리카의 천화봉신공(天華棒神功)을 펼치면 요극마신공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지금 앞에서 상훈에게 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대마신 크델라가 대천신 안젤리카에게 죽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상훈은 이미 천화봉신공을 10단계까지 익힌 터라 작정하면 크델라가 무슨 짓을 해도 매혹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펼쳤다가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후훗······!”

크델라가 붉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상훈을 흘겨봤다.

이리 오라는 눈짓.

그것 뿐이지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으으!”

버티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상훈은 그대로 달려갔고 크델라는 기다렸다는 듯 창대를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1단계 매혹도 버텨내지 못하다니! 역시 또 맞아야겠구나.”

퍽퍽퍽!

“크윽!”

신기한 것은 죽도록 얻어맞고나면 조금씩 매혹에 대한 저항력이 올라간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래봤자 크델라가 다시 매혹의 강도를 높이면 꼼짝없이 그녀를 덮쳐야 했고, 그 대가는 처절한 응징이었다.

그런데 차라리 그렇게 맞기만 하면 나을 것이다.

간혹 크델라도 그런 상황을 즐길 때가 있었기에 상훈이 무슨 짓을 하든 그냥 둘 때도 있었다.

그 또한 매혹 저항력을 높이기 위한 훈련의 일환이라 했다.

그렇게 시간은 또 흘러갔다.

현실에서는 이틀 정도지만 상상 결계에서는 아득한 시간이!

그 사이 상훈의 요극마신공은 10단계에 이르렀다.

‘후! 이 짓도 두 번은 절대 못해!’

덕분에 상훈은 크델라의 어떤 유혹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수 있는 저항력이 생긴 것은 물론이고, 반대로 상대를 매혹하며 창을 찌르는 요극마신공의 고난이도 기술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매혹 능력은 전투에서만 통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상훈이 요극마신공을 끌어올린채 미소를 지으면 어지간한 여신은 간단하게 매혹되어버릴 테니까.

마신이건 천신이건 상관없이 말이다.

물론 그랬다간 신계 최악의 난봉꾼이 되어버리겠지만.

‘그런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상훈은 그저 절대마신 케시우스의 진전을 잇기 위해 요극마신공을 익혔을 뿐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나저나 마신공들은 다 이런 식인 거냐?’

뇌륜마신공에 이어 요극마신공까지 이제 고작 2개를 익혔을 뿐인데 그 정신적인 피로의 강도는 대천신들의 신공 100여개를 다 익힌 것 못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지.’

상훈은 계속해서 다른 대마신들의 마신공도 수련해나갔다.

그렇게 다시 시간은 흘렀다.

어느덧 상훈은 이곳 숲에 있는 모든 고대 대마신들의 신공을 다 완벽하게 연공했고, 그들의 인정을 받았다.

다행히 세 번째 마신공부터는 비교적 수월했다.

이는 물론 가장 수련이 난해한 두 가지 마신공인 뇌륜마신공과 요극마신공을 익힌 덕분이었다.

“크흐, 우리 모두의 인정을 받는 녀석이 나타날 줄이야.”

“호호!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구나.”

“기대하고 있겠다. 네 손으로 선신들과 천신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그 순간을 말이야.”

대마신들은 무저갱의 주위를 빙 둘러 선 채로 상훈을 향해 한 마디씩 하는 중이었다.

상훈은 그들을 향해 공손히 절을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스승님들의 가르침 잊지 않겠습니다.”

이 말은 그의 진심이었다.

가는 길이 달라 결국은 저들을 배신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가르침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자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무저갱에 뛰어내려라. 우리가 너를 보호할 테니 파멸의 기운은 신경쓸 것 없다.”

“예.”

상훈은 주저없이 무저갱으로 뛰어들었다.

흑색으로 소용돌이치는 가공스러운 파멸의 기운.

본래라면 그것에 휘말리자마자 처참하게 몸이 찌그러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대마신들이 일제히 신력을 끌어올려 파멸의 기운을 흩어버리자 상훈은 아무런 제약없이 무저갱 아래로 내려갈 수 있었다.

* * *

무저갱은 바닥이 없는 듯 상훈은 끝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대마신 스승들이 파멸의 기운을 흩어준 덕분에 죽지 않았지만 이러다 바닥에 추락하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을 뿐.

일순 상훈은 마치 환상처럼 바닥에 멈춰섰다.

마치 애초부터 그 자리에 서있었던 것처럼 추락의 충격은 전혀 없었다.

‘여기는?’

암흑의 무저갱 아래 펼쳐진 정경은 위에서 보았던 고대 대마신들의 산처럼 음산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대 대천신들의 숲처럼 밝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잔잔하게 빛나는 호수.

그 주위로 피어있는 온갖 종류의 기화이초들.

그리고 호수의 중앙에 있는 널따란 정자(亭子)에는 한 명의 여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설마 저 여자가?’

상훈은 깜짝 놀랐다.

절대마신 케시우스가 여신이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녀의 용모를 본 순간 상훈은 일순 정신 줄을 놓아버릴 뻔했다.

천신 에메스나 대마신 크델라조차 평범한 여신으로 만들어버리는 미의 종결자!

그녀의 외모 자체가 매혹의 결정체였다.

그저 담담히 눈을 감고 앉아있는 모습만으로도 요극마신공의 10단계를 넘어서는 불가사의한 매혹의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으니까.

‘요극마신공을 통해 매혹 저항력을 높여놔서 천만다행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상훈은 그녀를 보는 순간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어떻게 저런 외모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상훈은 선신계의 여신 에메스나 고대 대마신 크델라를 보면서도 그냥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은 했을 뿐, 지금과 같이 가슴이 두근거린적은 없었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케시우스의 마음만 얻을 수 있다면 지금껏 이룬 모든 걸 다 포기해도 좋을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던 것이다.

시공간을 초월해 정말로 단 한 번 운명적인 이성을 만날 수 있다면 그녀가 바로 케시우스였으면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정신차리자.’

그러나 상훈은 어렵게 그 마음을 뿌리쳤다.

이는 요극마신공으로 단련된 매혹 저항력 때문도 있지만 그가 지금껏 밑바닥부터 천신까지 올라오며 쌓아 온 강인한 의지력 때문도 있었다.

물론 그것들보다 더욱 그의 마음을 지탱해주는 힘은 바로 악(惡)에 대한 증오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절대마신 케시우스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건 스스로를 악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짓은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다.

‘난 악신과 마신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저 케시우스야 말로 반드시 없어져야 할 악의 근원.’

그가 그렇게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는 순간 정자에서 눈을 감고 있던 케시우스가 두 눈을 번쩍 뜨고 상훈을 쳐다봤다.

“제법이군. 역시 벡사티오의 진전을 이은 녀석답구나.”

“······!”

순간 상훈은 머리가 하얗게 빈 듯한 느낌이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환청도 아니었다.

분명 케시우스의 입에서 상훈을 향해 ‘벡사티오의 진전을 이은 녀석’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차가운 조소를 흘린 채 상훈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상훈은 짐짓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케시우스가 그냥 떠본 말일 수도 있는데 거기에 휘말리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케시우스가 상훈 앞으로 번쩍 다가와 서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말해라. 너는 누구냐?”

“24급 마신 전상훈이 무저갱의 위대하신 대마신님을 뵙습니다.”

상훈은 그녀의 정체도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렇게 그가 부복한 채 말하자 케시우스가 코웃음 쳤다.

“너는 내가 누구라 생각하느냐?”

“고대의 대마신이 아니십니까?”

“이곳에는 어떻게 들어왔지?”

“위에 있는 다른 대마신님들께서 도와주셨습니다.”

“그놈들이 널 도와줬다?”

“예. 저라면 이곳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순간 케시우스가 상훈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마치 매가 사냥감을 탐색하듯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정말로 벡사티오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것이냐?”

“그러고 보니 혹시 전설의 절대천신이라 말하던 그 벡사티오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신입 악신 교육에서 그 정도는 당연히 언급되었을 것이다.

완전히 모른다고 하면 이상한 터라 이렇게라도 아는 척을 해야 했다.

그러자 케시우스가 다시 코웃음 쳤다.

“전설의 절대천신은 무슨! 그래봤자 나에 비하면 허접한 수준이었을 뿐이다.”

“그렇군요.”

상훈이 그런가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케시우스가 다시 뭔가를 탐색하듯 쳐다보며 물었다.

“묻겠다. 아까 무슨 수로 나의 매혹을 이겨냈지?”

“이곳에 오기 전 대마신 크델라님으로부터 요극마신공을 배웠습니다.”

순간 케시우스가 뜻밖이라는 듯 두 눈에 이채를 발했다.

“요극마신공을 어디까지 익혔느냐?”

“10단계까지 수련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쉽지 않은 일인데 제법 대단한 의지를 가진 녀석이로군.”

절대천신 벡사티오는 돌산 위에서 고대 선신들의 무덤을 두루 살피고 있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반면에 절대마신 케시우스는 이곳 무저갱에만 있다보니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

‘다행히 처음에는 그냥 한 번 떠본 말인 게 분명해.’

무엇 때문에 보자마자 그같은 질문을 날렸는지 모르지만, 지금 케시우스의 표정에는 상훈에 대한 의심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상훈은 계획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곧바로 그는 다시 정중히 케시우스에게 절하며 외쳤다.

“저는 이곳 고대 마신의 무덤 26층에서 가장 강한 대마신님의 진전을 이어받으러 왔습니다. 부디 저에게 당신의 진전을 잇게 해주십시오. 신계의 모든 선신들과 천신들을 다 쓸어버리겠습니다.”

그러자 케시우스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가장 강한 고대 대마신을 찾은 거라면 제대로 찾은 건 맞다. 그러나 진전을 얻기 위해서라면 너는 잘못 찾아온 것이다. 나는 네놈에게 나의 신력과 신병을 전해줄 생각이 없다.”

상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제가 당신의 진전을 잇기에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다. 위에 있던 녀석들이 합심해서 밀어넣을 정도면 넌 악신계를 통털어 손에 꼽을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겠지.”

“그런데 어째서······.”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진전을 이을 존재가 따로 있다는 뜻입니까?”

“알았으면 그만 올라가라.”

상훈은 뜻밖의 상황에 당황했다.

‘이런 경우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자칫하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지경이었다.

‘이미 진전을 이을 악신을 정해주었다니! 이건 생각도 못했던 일이구나.’

만약 케시우스가 지정해둔 악신에게 그녀의 진전이 이어진다면?

그 경우 스승 벡사티오가 예견했던 신계의 대재앙이 실제로 벌어질 지도 모른다.

‘절대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말고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막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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