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무저갱 속으로 (1)
“좋습니다. 그럼 아공간을 열게 도와주십시오.”
곧바로 자룬의 신력으로 상훈은 아공간을 열었다.
그리고 소주 100병과 맥주 100병, 그리고 라면 30그릇과 통닭 30마리를 내놓았다.
라면과 통닭 모두 조리되어 있는 요리들이지만, 불거나 식어 맛이 없어질 염려는 없었다.
먹기 직전까지 최상의 상태 그대로 유지되는 것도 정성 아이템의 특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순진한 건가? 아니면 멍청한 건가? 내가 이것들을 모조리 먹고 마신 후 모른 척하면 어쩌려고 한 번에 모두 내놓은 것이냐?”
자룬은 실제로 상훈에게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상훈은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고작 이 정도 술과 음식으로 대마신님과 거래를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일단 실컷 드십시오. 그 후에 약속을 지키시면 이것의 열 배를 내놓겠습니다.”
소주와 맥주 각 1천 병씩에 통닭 300마리와 다른 요리 300접시!
물론 모두 1단계 정성 아이템이었다.
라면은 그리 많지 않은 터라 다른 요리로 내주면 된다.
그래봤자 상훈이 보유한 술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아직도 맥주는 백만 병이 넘고, 소주도 수십 만 병이나 있으니까.
필요하면 상훈은 그것들을 모조리 다 내놓을 용의도 있었다.
봉헌 물품이야 앞으로 불멸계에서 얼마든지 얻을 수 있지만, 절대마신 케시우스의 진전을 얻지못하면 앞으로 신계에 끔찍한 대재앙이 닥쳐올 것이기 때문이다.
“크하하하!”
순간 자룬이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상훈을 다시 차갑게 노려봤다.
“그러니까 네놈은 내가 이렇게 나올줄 다 알고 있었다는 뜻이군.”
“저는 신계에서 선신들과 천신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가장 강한 분의 진전을 이어야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물론 이와 반대의 심정이지만, 상훈은 지금 이 순간은 철저히 악신이기로 했으니 이처럼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선신과 천신들을 마치 악신과 마신처럼 생각하고 감정에 이입하자 그의 두 눈에서 가공스러운 살기까지 일어났다.
그것은 대마신 자룬까지 흠칫 놀랄만큼 강력한 살기였다.
신계에 존재하는 모든 선신과 천신들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지워버리겠다는 가공스러운 의지!
그것이 느껴지자 자룬의 입가에 이내 흡족해하는 미소가 피어났다.
“크큭! 아주 훌륭해! 이제야 신입 마신 중에 제법 쓸만한 녀석이 나타났군.”
고대 대마신인 그에게 있어서는 모든 선신과 천신들이 다 사라지는 것보다 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네놈은 그저 단순한 호기로 무저갱에 내려가려는 것이 아니었구나.”
“그렇습니다. 무저갱에 계신 분이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제가 그 분의 진전을 잇는다면 더 이상 신계에 선신들이나 천신들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상훈은 절대마신 케시우스가 무저갱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했다. 절대천신 벡사티오의 존재를 고대 대천신들이 몰랐듯이, 대마신들도 무저갱에 누가 있는지 모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자룬이 돌연 웃음을 그치더니 숙연한 눈빛으로 상훈을 내려다봤다.
“네가 그 분을 만나려면 나를 비롯한 이 숲의 모든 고대 대마신들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어떻게 제가 그분들 모두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선신과 천신들을 다 쓸어버리겠다는 네 녀석의 의지가 가상하니 이제 내가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보도록 할 생각이다.”
“감사합니다, 대마신님.”
그러자 자룬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먼저 네놈은 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나의 모든 걸 배워야 나의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 물론 신력과 신병은 꿈도 꾸지마라. 그건 나의 진전을 이을 녀석에게 줄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인가? 스승과 제자가 되는 것까지는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제자 전상훈이 스승님을 뵙습니다.”
상훈은 망설이지 않았다. 대마신을 스승으로 모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악신이자 마신이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고 이 치욕은 모든 악신들과 마신들을 다 쓸어버리는 것으로 갚아주면 될 것이다.
곧바로 자룬은 상상결계를 펼쳤다.
뜻밖에도 그는 막상 상훈을 제자로 거두자 술과 음식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보다 상훈을 수련시키는데 온 정신을 집중할 생각인 것이었다.
“이제 네놈은 뇌륜마신공을 배우게 될 것이다. 뇌륜마신공은 1단계가 입문이고 10단계가 완성이다. 입문단계만 해도 지옥의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 과연 네놈에게 그만한 의지가 있는지 보겠다.”
“어떤 고통이든 상관없습니다.”
“물론 그래야지. 그 정도도 견디지 못한다면 그 분의 진전은커녕 나의 진전조차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수련은 네놈이 그 분의 진전을 이을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시험이기도 하니 전신이 부서질지라도 참아내야 한다.”
그와 함께 뇌륜마신공(惱輪魔神功)의 수련이 시작되었다.
뇌륜은 고통의 륜이었다.
수련자체가 상상을 초월한 고통이었다.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 무너지게 만드는 극고의 고통이 수반되는 수련!
상훈은 그제야 자룬이 누구인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 자가 바로 뇌륜의 대마신 자룬이었군.’
절대마신 케시우스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 외의 대마신들 중에서는 역대로 손을 꼽을 만큼 강한 존재!
이는 상훈이 대천신 스승들에게 들었던 내용이었다.
역대 대마신들과 그들의 마신공의 특징도 모두 들었다.
‘어떤 신공이나 마신공이든 상성이 존재한다고 했는데.’
공교롭지만 대천신 디파운의 조화검신공이 바로 뇌륜마신공과 상극이었다.
최강이라 불리던 대마신 자룬을 죽인 자가 바로 대천신 디파운이었던 것이다.
물론 디파운 역시 무적은 아니었다.
그 후에 나타난 요극마신공의 대마신 크델라에게 처참히 죽었다고 했으니까.
또한 대마신 크델라의 요극마신공은 대천신 안젤리카의 천화봉신공 앞에 무력하게 깨어졌다.
이런 식으로 뭐든 상극의 신공이나 마신공이 존재하는데, 유일하게 그런 것이 없는 신공이 바로 여의신공이었다.
여의신공은 다른 신공의 위력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거라 상극이 존재할 리가 없었다.
이와 동급의 능력을 가진 여의마신공이 있지만 상극은 아니었다.
여의마신공 또한 다른 마신공의 위력을 높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득한 고대에 절대천신 벡사티오와 절대마신 케시우스는 무슨 수를 써도 서로에게 우세를 점할 수가 없었고, 결국 그 상태로 한계까지 싸우다보니 동귀어진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훈도 만약 어떤 악신이 절대마신 케시우스의 여의마신공을 이어받기라도 한다면 그를 이기기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쉽게 패배하지도 않겠지만, 자칫 아득한 고대의 벡사티오나 케시우스처럼 동귀어진의 불행한 운명을 맞이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런 비극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여의마신공을 상훈이 얻어야 하는 것이다.
‘크윽! 그나저나 고통스럽다고 하더니 장난이 아니군.’
뇌륜마신공의 1단계 입문.
고통 참는데는 이력이 나 있는 상훈이지만 육체가 아닌 정신까지 찢어발기는 무서운 고통 앞에서는 절로 신음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흐흐, 제법 잘 참는구나. 하지만 1단계이니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렇게 상훈은 생지옥의 고통 속에서 아득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10단계까지 연공하는데 성공했다.
상상 결계에서는 인간의 일생이 몇 번 반복되는 것처럼 아득한 시간이었지만 실제로는 불과 이틀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후! 정말이지 두 번 할 짓은 아니다.’
상훈은 뇌륜마신공의 10단계 연공을 잘 참아낸 스스로에게 상을 주고 싶을 정도였다.
“크하하하! 불과 이틀만에 뇌륜마신공을 완벽하게 연공하다니 대단한 녀석이로군.”
이틀은 현실의 시간일 뿐 실제는 수백 년이다!
그냥 지옥에 던져진 후 수백 년 후에 나왔다고 보면 된다.
상훈은 이가 갈리는 심정이었지만 애써 미소 지었다.
“모두 스승님 덕분입니다.”
“흐흐, 알고 있다니 기특하구나.”
“이제 저를 인정해주시는 것입니까?”
“물론이다. 나는 이미 너를 인정했다. 또한 다른 대마신들도 곧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럼 이제 술과 음식들을 좀 먹어볼까?”
자룬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한쪽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술과 음식을 신나게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가 소주를 대략 2병 정도 마시고, 맥주를 3병 정도 마셨을 무렵 숲 도처에 흩어져 있던 고대 대마신들이 하나둘 그의 근처로 모여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게 대체 어디서 나는 기막힌 냄새인가?”
“아니! 저건 정성이 깃든 술과 음식들인데?”
“자룬! 너무하는군. 그래도 오래도록 보아온 사이인데 그 술을 혼자 마시고 있는 것인가?”
상훈이 자룬에게 인정을 받는 순간 다른 대마신들도 상훈은 물론 상훈이 내놓은 술과 음식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대천신들에게 인정받을 때와 동일한 현상이었다.
“다들 멀뚱히 서있지 말고 와서 앉아라. 나는 이 술과 음식들을 가져온 정성을 봐서 저놈을 무저갱에 계신 그 분께 보내려 한다. 뇌륜마신공을 10단계 극성까지 연공한 독한 놈이니만큼 자격은 충분하니 모두들 협조를 해주는 것이 어떠냐?”
자룬은 대마신들 중에서도 상당히 연배가 높은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마신들은 생각보다 쉽게 그의 뜻에 따라주었다.
무엇보다 상훈이 마신공 중에서도 가장 익히기가 난해한 뇌륜마신공을 대성했다는 말을 듣자 모두들 놀라는 것 같았다.
“흠, 그러고 싶은데 술과 음식이 좀 부족한 것 같군요.”
“내 말이 그말이다. 이 정도 술로는······.”
그 순간 상훈이 최대한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술과 음식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곧바로 자룬의 도움을 받아 아공간을 연 상훈은 소주, 맥주, 막걸리, 기타 각종 위스키나 과실주까지 종류별로 1천 병씩 내놓았다.
물론 모두 1단계 정성 아이템이었다.
통닭을 비롯한 각종 요리들도 산처럼 쌓아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오! 맙소사!”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지.”
“뭔가를 잘 아는 녀석이로군.”
“좋아! 도움을 주도록 하겠다.”
그 즉시 대마신들은 여기저기 모여앉아 대작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훈을 향해 한 명씩 다가와 각자의 마신공을 전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룬에 이어 두 번째로 상훈 앞에 상상결계를 펼친 이는 대마신 크델라였다.
뇌쇄적인 용모의 여마신!
그녀는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창인 극(戟)을 신병으로 사용하는 요극마신공(妖戟魔神功)이란 것을 전수했는데, 이것을 익히는 과정은 무척이나 곤혹스러웠다.
요극마신공은 운공하는 순간 상대를 매혹시켜버리는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었다.
그 매혹은 대천신들이라도 정신줄을 놓아버리게 만들만큼 가공스러웠다.
뇌륜마신공의 자룬을 해치운 대천신 디파운이 크델라에게 죽었던 이유도 바로 그때문이었다.
루비처럼 붉은 머리에 눈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크델라.
그녀는 고대의 대마신이지만 상훈이 지금껏 본 가장 아름다운 여신인 에메스와 쌍벽을 이룰만큼 사기적인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가슴과 하체만 살짝 가리고 있는 복장은 서큐버스를 연상케했지만, 품격 자체가 다르다 보니 그 유혹의 강도는 가히 수만 배에 달할 것이다.
그런 그녀가 요염하게 몸을 비틀며 눈웃음을 보냈다.
“네가 이 마신공을 익히려면 먼저 매혹에 저항하는 능력부터 배워야 해. 이리 와보겠니?”
꿈결처럼 감미로운 음성. 그것은 이성을 그냥 흩어버리는 미증유의 마력이 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