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천신이 되다 (1) (111/159)

 # 111

천신이 되다 (1)

블라우는 상훈을 향해 공손히 예를 취한 후 말했다.

“대천신 무타티오 님께서 당신이 말씀하신 조건을 모두 받아들이셨습니다. 당신이 선신이 되면 이후 선신계에서 지구를 초월자급 이상의 악의적인 존재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절대적으로 보호할 것입니다.”

초월자급 이상이면, 초월자, 혼돈자, 그리고 신급 존재들을 의미한다.

그들이 악의를 품고 지구에 접근하는 순간 선신계에서 나서서 완벽하게 막아준다는 뜻이었다.

물론 상훈 역시 지구 주위에 초월자 이상의 존재가 침투할 경우에만 발동하는 특별한 결계를 펼쳐둘 생각이었지만, 선신계에서 나서준다면 그야말로 안심일 것이다.

“둘째로 무타티오 님은 당신께 24품 천신 지위를 약속하셨습니다.”

“천신인건 좋은데 24품은 또 뭐야?”

“천신의 등급은 도합 25단계로 나뉩니다. 특품인 대천신 아래로 1품부터 24품까지 품계가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천신 중 가장 말단이라는 얘기군.”

상훈이 험상궂은 표정을 짓자 블라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24품 천신이 되는 것만도 보통의 선신들에게는 수 천 년의 세월이 걸릴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영원히 천신이 되지 못하고 평범한 선신으로 있다가 소멸되는 경우도 드문 일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래도 가장 말단이니 좀 그렇잖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당신이 악신에 합류했어도 그곳에서는 24급 마신의 지위를 주었을 것입니다. 천신의 품계처럼 마신들도 25개의 등급이 존재하는데, 대마신 이하 24급으로 나뉩니다.”

블라우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굳이 인간 세계로 비유하자면 천신의 품계에 들어가는 순간 귀족이 되는 것입니다. 보통의 선신은 평민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귀족이라.”

“물론 어디까지나 비유가 그렇다는 것이지 선신계에서는 천신 품계가 없는 선신들이라 해도 매우 존중해줍니다. 반면에 마신들은 급수가 없는 악신들을 종부리듯 부려먹어 거의 신 취급도 안해주는 편이죠.”

“마신 녀석들이야 당연히 그렇겠지.”

“그리고 천신이 되면 그때부터 특별한 신력이 작용해 악신을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은 가장 하급 품수인 24품 천신에게도 부여되는 것입니다.”

“그건 마음에 드는군.”

신참 신을 처음부터 귀족 반열로 올려주는 것만도 파격적인 대우일 것이다.

여기에 품계가 낮다고 따지는 것은 무리였다.

일단은 적대 신을 소멸시킬 수 있는 권능을 얻게 된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세 번째 조건인 신력석도 1개를 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당신은 선신이 되는 순간 즉각 24품 천신이 됨과 동시에 신력도 대거 높아지시게 될 것입니다.”

“좋아. 그것도 마음에 든다.”

이는 악신계에서 걸었던 조건 중 하나였다.

그들이 그런 조건을 걸지 않았다면 선신계에서도 상훈에게 이런 파격적인 혜택을 주지 않았을 것이니, 악신들에게 고맙다고 해야할 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악신 세루나는 당신이 처리하는 건 여러모로 무리가 있습니다. 대신 선신들이 그녀의 신병을 인도받아 선신계의 율법에 따라 처리할 것입니다. 다만 사자의 신분인 이상 죽일 수는 없고, 일정한 형벌을 준 후 악신계로 방면은 불가피합니다. 그 점은 부디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블라우는 상훈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사실 악신 하나 처치하는 거야 신계에서는 별 일 아니다.

그러나 사자의 신분인 경우에는 선신이건 악신이건 서로 공격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향후 새로운 신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양쪽 다 난항에 처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좋아! 그 정도는 나도 양보하지.”

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세루나를 처치하는 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앞으로 천신이 되어 악신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럼 이제 선신이 되는 것으로 확정하신 것입니까?”

블라우가 기대어린 눈빛으로 상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이다. 나는 진작부터 선신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블라우 네가 힘써준 덕분에 그래도 나쁘지 않은 조건으로 선신이 될 수 있게 되어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자 블라우가 머쓱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다른 어떤 조건보다 당신에게 천신의 지위가 내려지는 것에는 많은 이견이 있어서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만약 당신이 악신계로 가서 마신이 될 경우 그것이 선신계에 얼마나 부담으로 작용할지에 대해 설명하며 대천신님을 설득했습니다.”

“역시 그랬군.”

“하지만 여전히 당신에게 천신의 지위를 준다는 것에 반감을 가진 천신들이 많이 있습니다. 선신계에 가시더라도 그로인해 조금은 불편하실 수 있으니 그 점은 감안해야 하십니다.”

“상관없어.”

그런 게 무서웠다면 애초부터 선신계를 상대로 조건을 걸지도 않았을 것이다.

* * *

곧바로 상훈은 선신계에 있는 대천신 무타티오의 대천궁으로 안내되었다.

대천신은 선신계에 무타티오 한 명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또 다른 대천신도 어딘가 존재했다.

선신계는 매우 방대한만큼 대천신을 중심으로 마치 국가처럼 경계가 형성되어 있는 식이며, 특별한 일이 없는한 상훈은 대천신 무타티오가 지배하는 대천계에 영원히 소속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대천신 무타티오가 지배하는 대천계와 맞서고 있는 악신들의 진영이 바로 대마신 리카이스의 대마계였다.

대천궁의 대전.

무타티오는 신령한 빛의 관을 쓰고 있는 중년 남자의 형상이었다.

인자해 보이면서도 매우 준엄해보이는 눈빛.

멀리서 봐도 그가 대천신이라는 것이 딱 느껴질 정도였다.

태양과 같은 광채로 반짝이는 그의 좌우 아래로 수많은 천신들이 계단형으로 배치된 자리에 서서 상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위압감은 상상 이상이어서 어지간한 신출내기 신들은 제대로 서있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상훈은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무타티오가 미소 지었다.

“네가 새로 선신이 된 전상훈이냐?”

“그렇습니다.”

상훈도 대천신에게는 정중한 태도를 취했다.

말로만 듣던 신이 되어 대천신을 만나게 될 줄은 사실 상훈도 상상 못했던 일이었다.

그저 사악한 라트로들로부터 지구를 지켜보겠다는 이유로 죽도록 수련하며 한계를 돌파했을 뿐인데, 이곳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무타티오가 말했다.

“선신이 되겠다는 너의 의지는 가상하나 감히 선신계와 악신계를 저울질하며 조건을 붙이는 모습은 그다지 반길 만한 일은 아니었다.”

상훈은 묵묵히 고개를 숙인채 그의 말을 들었다.

“하여 너의 요구 조건에 대해 대천궁의 천신들 중 다수가 반대를 하였으나 나는 특별히 너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줄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두 가지다. 하나는 라트로 헌터로서의 너의 행적이다. 너는 사악한 약탈자인 라트로들을 증오할 만큼 미워하며 수많은 라트로를 죽였지. 그것은 선신계에서도 인정해줄만한 훌륭한 업적이다. 네가 비록 저울질을 했다지만 애초부터 라트로와 같은 성향인 악신 진영으로 가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타티오는 상훈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두 번째는 가족과 지구를 지키려는 마음이다. 너는 네게 불이익이 닥칠지라도 그들을 지키고자 했지. 또한 너의 이익을 위해 하부 세계들을 희생시키지도 않았다. 그 또한 선신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하겠다.”

“그건 선신이 아니라 적어도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기본이라 생각합니다.”

가족을 지키고, 이유없이 약자들을 괴롭히지 않는 것.

이건 당연한 일이다.

크게 칭찬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인 것이다.

적어도 상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무타티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아주 기본이라 할 수 있지. 인간처럼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는 어떤 존재들에게도 그것은 기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것을 지키는 이들은 많지 않다. 나는 너의 그같은 모습을 특별히 기특하게 여긴 것이니라.”

곧바로 그의 두 눈에서 찬란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하여 나는 전상훈 네게 24품 천신의 자격을 부여하겠노라.”

상훈이 대천계의 천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신비롭고 아름다운 악기의 연주 소리가 대천계의 선녀들과 천사들이 합창을 하며 축하하는 소리와 함께 웅장하게 울려퍼졌다.

또한 상훈이 천신이 되는 것을 반대하며 못마땅하게 여기던 다른 천신들도 이 순간만은 모두 어쩔 수 없다는 듯 축하의 찬사를 보내주었다.

‘왠지 기분이 묘하네.’

상훈은 가슴이 뭉클했다.

역시나 선신이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었다.

모든 게 다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라트로나 악신을 미워하는 자들이 함께 모여있는 곳이었으니 말이다.

그간에는 혼자서 모든 걸 하는 것처럼 고독했다면, 이제는 뭔가 소속감도 들고 외롭지 않다는 느낌이었으니까.

번쩍!

그때 무타티오가 마치 별처럼 반짝이는 조각을 상훈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신력석이다. 대천궁에서도 매우 귀하게 여길만큼 희귀한 것으로 네가 이것을 요구한만큼 앞으로 그만한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해야 할 것이다.”

악신들을 많이 처치해 천신으로서의 용맹을 보이라는 뜻.

상훈은 미소 지었다.

“저는 악신들을 모두 쓸어버리기 위해 선신이 되었습니다. 전쟁이라면 절대 마다하지 않으니 어디든 선봉으로 투입해주십시오.”

“네 마음은 잘 받아두도록 하겠다. 하나 너는 곧바로 신계의 전쟁에 투입되지 않고 일정기간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교육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다. 네가 비록 곧바로 천신이 되었다지만 신입 선신으로서 수행해야할 교육은 반드시 이수해야 한다. 교육은 선신들에게 단 한 번 주어진 기회라 할 수 있지. 네가 하기에 따라 너의 능력이 대폭 상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기회라면 최선을 다해 교육에 임하겠습니다.”

고리타분한 교육이 아니라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교육이라면 상훈에게는 무조건 환영이었다. 설령 크게 강해지지 못한다 해도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상훈이 교육이라는 말을 오히려 반기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무타티오는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오늘 이후로 지구는 이곳 대천계에서 특별히 보호할 것이니 너는 안심해도 좋다. 이제 너는 속히 혼돈 시스템을 없애 그 안에 구속된 하부 세계들의 모든 것을 본래대로 복귀시키도록 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또한 잠시 휴식이 필요할 터 인간의 시간으로 한 달의 시간 동안 네게 휴가를 내릴 테니 가족들과 잘 보내도록 하라. 교육은 그 이후에 시작될 것이니 늦지 말고 참석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즉시 상훈은 베누스와 서큐버스 초월자들에게 뜻을 전했다.

-혼돈 시스템을 소멸시키고 불멸계를 열어라.

그 순간 49개의 혼돈계로 이루어진 거대한 혼돈 시스템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동시에 그에 구속되어 있던 수많은 세계들은 본래의 시공간으로 복귀했다.

또한 상훈 전용의 세계인 불멸계가 생겨났다.

그 어떤 하부 세계도 건드리지 않고, 오직 혼돈 시스템에 의해 창조된 것들만을 모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것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구가 정상으로 복귀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