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 몽환의 정수 (1) (100/159)

 # 100

몽환의 정수 (1)

적절하게 익은 컵라면과 참치 삼각김밥, 그리고 바나나 우유.

그것들의 외양은 천계에 오자 완전히 달라졌다.

신비로운 빛으로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냄새 자체가 차원이 달랐다.

인공 조미료 냄새가 아닌 말 그대로 천상의 기막힌 향기가 컵라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참치 삼각김밥과 바나나 우유 또한 보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았지만, 컵라면에 비할 수는 없었다.

“이 컵라면은 도저히 안 먹을 수가 없겠군.”

“제가 봐도 정말 맛있어 보입니다!”

상훈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 초월자 때도 그랬는데 혼돈자가 된 지금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뭔가를 먹는다면 그냥 미각을 즐기기 위해 먹을 수는 있어도 생존을 위해 먹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먹는데 그리 큰 관심이 없었는데, 지금 헌물로 바쳐진 컵라면을 보자 군침이 마구 돌았다.

후루룩! 쩝쩝!

곧바로 한 젓가락 먹어보자 과연 맛이 기막혔다.

“네 말대로구나. 분명 평범한 라면인데 왜 이렇게 맛이 있는 걸까?”

“정성 때문이죠. 평범한 음식이라 해도 헌금이나 헌물을 바치는 신도의 정성이 높을수록 그게 천계에서는 아주 멋진 맛으로 나타납니다.”

“아크엘이 그렇게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바쳤다는 거야?”

“그는 그냥 컵라면을 바친 것이 아니라 약간이지만 정성을 들여 바로 먹을 수 있게 끓였습니다. 천계에서는 아이템 자체의 가치보다는 그런 정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비싼 걸 바친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라는거군.”

“네, 맞습니다.”

조금 전까지 시무룩했던 프루아의 표정은 금세 환해져 있었다.

“저는 방금 전 신상의 축복을 통해 당신이 특히 컵라면을 매우 기쁘게 받으셨다고 아크엘에게 알림을 통해 알려주었습니다.”

“아크엘이 꽤나 뿌듯해하고 있겠군.”

그러던 상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보다 방금 전 혼돈력이 아주 미세하지만 증가했는데 이게 뭔가 연관이 있는 것일까?”

상훈은 음식을 먹었을 때가 아니라 아크엘이 바친 음식이 천계로 올라온 순간 아주 극소량이지만 혼돈력이 늘어난 것을 느꼈다.

프루아가 미소 지었다.

“물론이죠. 이 또한 혼돈 시스템이 가진 비밀 중 하나입니다. 신도들이 많아지면 혼돈 시스템을 모두 장악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런 식으로 조금씩 강해지실 수 있습니다. 물론 게임에서 계속 살아남는다는 전제 하이지만 말이죠.”

그러나 상훈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혼돈력이 늘어나는 건 내게 거의 의미가 없는 일이다. 몽환력이라면 모를까.’

초급이나 중급 수준의 혼돈자라면 혼돈력이 늘어나는 걸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훈은 이미 혼돈력을 아무리 써도 부족함이 없는 경지에 이르른 터였다.

혼돈력이 좀 더 늘어난다고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한계를 돌파해야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냥 심심풀이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데서 만족해야겠군.’

그렇게 상훈은 큰 기대를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때 그의 초현자 부하인 아크엘이 상상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줄은 그 역시도 짐작하지 못했다.

* * *

아크엘이 헌물을 바치고 뭔가 축복을 얻는 듯하자 놀란 베누스가 즉각 물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아크엘?”

“로드께서 헌물을 매우 기쁘게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

아크엘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역시 이 봉헌함은 흔히 생각하는 일반 헌금이나 헌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 어떤 것이지?”

베누스는 상훈이 진짜 신이 아니라 그저 이 혼돈 시스템에서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흔히 신에게 바치는 헌금이나 헌물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봉헌함을 통해 저희들은 로드께 적지않은 도움을 드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헌금이나 헌물을 많이 바치면 정말로 그 분께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이냐?”

“많이 드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정성이 많이 깃든 것들일수록 로드께 도움이 된다는 것이죠.”

“정성이라? 그래서 아까 컵라면을 직접 끓여 바쳤던 것이군.”

“그렇습니다. 세 가지 음식을 바쳤는데 그 중 컵라면을 아주 기쁘게 받으셨다는 알림을 받았지요.”

“그럴 수가!”

“결론적으로 뭐든 봉헌함에 바치면 받으시기야 하겠지만 정성이 들어가 있지 않으면 로드께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베누스는 그제야 아크엘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곧바로 그녀는 고민했다. 그녀의 아공간에는 온갖 진귀한 물건들이 가득했지만, 아크엘의 말대로라면 정성없이 그냥 바치는 건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 분은 라면에 계란 두 개를 넣고 파를 송송 썰어넣어서 끓여드리면 아주 좋아하세요.”

그때 누군가 나타나 말했다. 베누스와 아크엘이 고개를 돌리자 카멜라가 서 있었다. 아크엘을 따라 카멜라도 베누스에게 인사를 하러 찾아온 것이다.

“시종7이 위대하신 혼돈계의 군주이신 마녀님을 알현합니다.”

카멜라는 베누스를 향해 공손히 절했다. 베누스는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구나. 그렇지 않아도 네가 언제쯤 날 찾아오나 했다.”

“그간 마녀님을 속인 것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모든 사정을 들어 다 알고 있으니 신경쓸 것 없다. 나 또한 너와 같은 상황이었으면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넌 이제 시종7이 아니라 카멜라다. 내 앞이라고 시종7이라 하지 말고 북천의 신께서 내려주신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도록 해라.”

“마녀님······.”

베누스의 관용스러운 태도에 카멜라는 깜짝 놀랐다. 이전에 그녀가 알고 있는 혼돈의 마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냉엄한 표정으로 크게 분노하며 벌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카멜라의 입장을 이해해주는 것이 아닌가.

대체 누가 베누스를 이렇게 변하게 만들었을까?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긴 로드라면 그렇게 하실 수도.’

카멜라 역시 상훈을 만나기 전에는 그냥 감정없이 행동하는 혼돈의 시종에 불과했다. 그러나 상훈의 부하가 된 이후에는 감정을 가진 인간처럼 변했으니까.

“그보다 아까 그 얘긴 뭐지?”

“네?”

“북천의 신께서 라면에 계란을 두 개 넣는 걸 좋아하신다고?”

“아!”

카멜라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끄덕였다.

“제가 한때 그 분의 라면 시종을 했었거든요. 그 분께서 좋아하는 라면을 끓일 줄 알아요.”

“그럼 그 비법을 내게도 알려주겠느냐?”

“물론이죠.”

그러자 시종1을 비롯한 여섯 시종들도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카멜라! 나도 배울게.”

“나도. 정성이 담긴 음식을 바치고 싶어.”

“나도 배우겠어. 북천의 신이 되신 로드께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 싶어.”

그 모습을 보고 아크엘이 쓴웃음을 지었다.

“군주님! 정성이 담긴 헌물이 꼭 음식만 있는 건 아닙니다. 전쟁에서 승리해서 얻은 전리품이나, 퀘스트를 수행해서 받은 보상 아이템에도 정성이 깃들어 있지요. 일을 해서 얻은 급료에도, 소박한 재료로 만든 평범한 물건이라도 많은 정성이 깃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본인이 그것을 얻으려고 정성을 기울였다면 말입니다.”

“아!”

그제야 베누스와 시종들은 자신들이 너무 단순한 생각만 했음을 알고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곧바로 아크엘은 아공간에서 뭔가를 꺼냈다. 신비한 빛의 액체가 담겨있는 유리병이었다.

“저는 한 가지 시험을 해보고자 합니다.”

“시험이라고?”

“예. 이건 지구의 인간 각성자 중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유서린이라는 소녀가 유일 등급의 퀘스트를 완수하고 얻은 최후의 보상 아이템입니다.”

베누스는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유일 등급의 퀘스트를 수행하고 얻은 물건이라면 꽤나 대단한 것이겠군.”

게임적 요소가 많은 혼돈 시스템의 세계에서 태어난 베누스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이템의 이름은 몽환의 정수라는 것입니다.”

“몽환이라고?”

베누스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그제야 아크엘이 들고 있는 유리병을 자세히 살펴봤다.

몽환의 정수

-등급 : 알 수 없음

-이 물건의 용도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몽환의 힘을 쓸 수 있는 누군가에게는 매우 중요한 물건일 지도 모른다.

“놀랍구나. 그건 미증유의 몽환력이 응축되어 있는 물건이다. 몽환력의 근원이라 할 수 있어.”

베누스는 즉시 이 아이템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그녀에게 몽환력이 존재하는 터라 유리병에서 느껴지는 불가사의한 몽환력을 대번에 감지한 것이다.

“설마 이 물건이 뭔지 알아보신 것입니까?”

아크엘이 놀라 물었다. 그는 그저 막연하게 이것이 상훈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직감을 가지고 있었을 뿐 정확한 용도는 알지 못했다.

베누스의 안색은 상기되어 있었다.

“물론이다. 그건 혼돈의 세계에서도 아주 지극한 행운이 주어져야 얻을 수 있는 보물 중의 보물이라 할 수 있다.”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니 놀랍군요.”

“몽환력은 현실에서는 쓸 수 없는 허무의 힘이라 특별한 존재가 아니고서는 그건 그저 쓸모없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북천의 신이 되신 그 분께는 정말 큰 힘이 될 것이다.”

“역시 저의 직감이 맞았군요. 로드께 힘이 되는 것이라니!”

베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지구의 각성자가 얻었다니 놀랍구나. 아무리 지극한 행운이 주어졌다 해도 초월자도 아닌 인간 각성자가 수행하기에는 난이도가 굉장히 높은 퀘스트일 텐데.”

“바로 그 때문에 그만큼 정성이 더 많이 들어가 있는 물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이다. 어서 그것을 봉헌함에 바치도록 해라. 그 물건의 주인은 오직 북천의 신이신 그 분 뿐이시니까.”

그러자 아크엘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걸 제가 바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이것을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지구의 각성자를 불러서 바치게 하겠다는 뜻이군.”

“그렇습니다. 유서린은 초월자가 아니라서 직접적인 계시를 받지는 못하지만 봉헌은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다. 어서 그 지구의 각성자를 이곳으로 불러라.”

잠시 후.

붉은 색 트레이닝 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있는 서린이 아크엘과 함께 나타났다. 그녀는 강남역에서 산책 중이다 갑자기 아크엘이 나타나 갈 곳이 있다고 해서 함께 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갈 곳이 지구에서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제 42혼돈계 C42001 행성일 줄이야.

낯선 행성이지만 인간인 그녀에게도 아무런 해가 없는 환경이었다.

거대한 성으로 둘러싸인 궁전.

그 궁전 옆에 위치한 거대한 신전.

그곳에는 서린에게도 너무 낯익은 존재가 신상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신비하고 웅휘한 모습에 서린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오면서 로드가 신이 되셨다는 말을 듣긴했는데 정말이었구나.’

초월자들은 신을 선택하라는 알림이 주어지는 터라 신들이 혼돈계에 간섭한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서린과 같은 인간 각성자들은 그런 걸 전혀 알지 못했다.

혼돈계에 경천동지할 만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그저 퀘스트 행성에 가서 퀘스트를 수행하는 동일한 일상의 반복일 뿐이니까.

따라서 서린은 상훈이 혼돈자가 되어 이 시스템의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나마 방금 전 오면서 아크엘에게 상훈이 신이 되었다는 말을 간략히 들어서 알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얻은 몽환의 정수를 봉헌함에 직접 바쳐야 한다는 것도 말이다.

“인사드리거라. 저 분이 바로 군주이신 혼돈의 마녀 베누스님이시다.”

서린은 베누스를 바라보며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혼돈의 마녀라고 해서 무척이나 무섭게 생긴 줄 알았는데 정말로 아름다운 용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린이 볼 때 베누스는 미소녀라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무슨 찬란한 보석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진짜 여신이 있다면 바로 저분일 거야.’

곧바로 서린은 공손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어떤 식으로 인사를 해야하는 지는 아크엘이 다 알려주었다.

“지구의 각성자 유서린, 위대하신 혼돈계의 군주이신 베누스님을 알현합니다.”

베누스는 미소 지었다.

“유서린! 네가 어려운 퀘스트를 수행해 보물을 얻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 그것을 북천의 신께 바친다고 하니 실로 기특하구나.”

“그 분께 작은 도움이라도 드릴 수 있다면 저에겐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거예요.”

서린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에 베누스를 비롯한 시종들, 그리고 아크엘도 서린을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냈다.

아크엘이 말했다.

“저곳이 봉헌함이다. 네가 얻은 이 몽환의 정수를 직접 가서 바치도록 해라.”

“네.”

서린은 아크엘에게 몽환의 정수를 받아쥐고는 신전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그것을 조심스레 봉헌함에 넣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