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무소불위 (1)
베누스로부터 주입받은 신비한 힘.
그것은 상훈이 준혼돈자가 되기까지 단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미지의 힘이었다.
그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힘을 베누스는 몽환력이라 했다.
스스.
상훈이 다시 몽환공역에 들어오자 전신에서 아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그것은 차원력이나 혼돈력이 아닌 베누스가 주입해준 몽환력!
몽환력이 많을수록 이곳 몽환공역에서는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신이라도 된 느낌인 걸.’
사실 일반 혼돈계에서는 몽환력이 전혀 쓸모가 없었다.
하다못해 오크 한 마리 잡는데도 보탬이 되지 않는 무용(無用)한 힘인 것이다.
그런데 이곳 몽환공역에서는 말 그대로 무소불위에 가까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듯했다.
“너희들이 이곳에 다시 들어오다니 뜻밖이로군. 아까와 같은 운이 또 작용할 거라고는 꿈도 꾸지마라.”
그때 그림자 형체의 존재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건 내가 해줄 말이다. 너야말로 개망신당하고 쫓겨나기 전에 이곳에서 떠났어야 했다.”
상훈이 손을 앞으로 슥 휘저었다.
스스스.
그러자 사방에서 수백여 개의 검들이 생겨나더니 그것이 그대로 원형의 거대한 차크람을 형성했다.
차크람 블레이드였다.
상훈이 이번에는 그것을 차원력이나 혼돈력이 아닌 몽환력을 이용해 펼쳐본 것이다.
‘저 놈을 물리치려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공격해야 한다.’
몽환공역에서의 능력도 몽환력에 좌우되는만큼 무제한이 아니다.
분산해서 어중간한 공격을 몇 번 펼치느니 모든 몽환력을 다 끌어올려 최강의 공격을 날린다.
그것이 지금 상훈이 만들어낸 몽환력의 차크람 블레이드였다.
콰콰콰콰콰-!
그러자 그림자 형체의 존재가 흠칫 놀라더니 손가락으로 혼돈력의 광채를 마구 쏟아냈다.
번쩍! 번쩍! 화아아아아아아악-
강렬한 광채가 몽환공역 전체를 찬란한 빛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것을 본 상훈은 감탄했다.
지금 그림자 형체의 존재가 뿜어내는 혼돈력은 혼돈의 공역을 장악하고 있는 페르틸라가 내뿜던 것에 전혀 뒤지지 않았던 것이다.
‘진짜 혼돈자가 맞았군.’
본래라면 준혼돈자급의 상훈과 베누스는 혼돈의 광채를 당해내지 못하고 이미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공스러운 혼돈력의 광채도 상훈이 몽환력을 통해 생성시킨 차크람 블레이드 앞에서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것이 마치 거대한 방패처럼 상훈과 베누스를 향해 몰려드는 혼돈의 광채를 모조리 흡수해버렸으니까.
그 뿐이 아니었다.
몽환공역 전체로 뻗어나가던 혼돈의 광채조차 순식간에 몽환력의 차크람 블레이드속으로 사라졌다.
이대로라면 그 그림자 형체의 존재도 그대로 빨려들 상황!
그것을 보며 상훈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모든 몽환력을 다 끌어올려 차크람 블레이드를 펼치길 잘한 것이다.
‘저놈을 이 기회에 죽여없애자.’
몽환공역의 무서운 점은 이곳에서 분신이 죽게 되면 실제로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이것이 보통의 상상 결계와 다른 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까 베누스가 분신 상태로 저주를 받았다고 본신마저 타격을 입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그 순간 이변이 벌어졌다.
갑자기 몽환력의 차크람 블레이드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동시에 그림자 형체의 존재도 흩어지더니 그 사이로 가히 선풍도골의 신선과 같은 용모를 가진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본신이 나타난 것일까?
그것은 아니었다. 그림자 형체로 감춰두었던 분신의 모습이 이제야 드러난 것이다.
“큭! 나 가이룬의 모습이 드러나게 만들다니 놀랍군. 네놈이 몽환공역을 다룰 수 있는 힘을 어디에서 얻었는지 모른다만 그 정도로 나를 이기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가이룬이라고 자신을 밝힌 노인의 기세는 방금 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신선처럼 보였던 그의 백발 사이로 붉은 빛의 홍채가 번쩍이는 순간 사악한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상급 혼돈자쯤 되는 건가?’
상훈은 가이룬이 몽환의 차크람 블레이드를 그렇게 가볍게 소멸시켜버리자 무척 놀란 상태였다.
‘베누스에게 주입받은 몽환력의 거의 전부를 사용하고도 저놈을 처치하지 못하다니.’
또 다시 그것을 펼쳐내려면 몽환공역을 벗어난 후 다시 베누스의 본신으로부터 몽환력을 주입받아야 한다.
다시말해 지금 노인이 공격해온다면 무조건 도주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물론 당연히 도주를 위한 최후의 몽환력은 남겨두었다.
상훈은 최악의 상황도 대비하지 않을만큼 무모하지는 않았으니까.
‘표정을 보니 저 놈도 긴장하고 있는게 분명해. 내 몽환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겠지.’
그래서 상훈은 짐짓 가소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는 여러모로 나를 귀찮게 하는군. 가이룬이라고 했느냐? 나는 네놈의 정체 따윈 관심없다. 네가 혼돈자이건 아니 그보다 더한 존재이건 이곳 몽환공역에서 죽으면 완전히 소멸된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각오해라! 죽여주마!”
그 말과 함께 상훈은 가이룬을 향해 공격하려는 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가이룬이 흠칫 놀라며 뒤로 쭉 물러났다.
그러나 곧바로 특별한 공격이 펼쳐지지 않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접근해왔다.
“큭! 감히 나 가이룬을 상대로 허세를 부리는 놈이 있을 줄은 몰랐구나. 네놈은 지금 몽환력이 소진되어 있을 터. 어디 그 상태로 나의 공격을 버텨낼 수 있을지 두고보겠다.”
츠츠츳!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다시 가공스러운 혼돈력의 폭풍이 휘돌기 시작했다.
상훈은 서둘러 전방에 몽환력의 벽을 생성시켰다.
‘일단 후퇴했다가 다시 와야겠군.’
그런데 그때였다. 묵묵히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고있던 베누스가 상훈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손으로부터 몽환력이 끊임없이 쏟아져들어왔다.
‘오호!’
이 안에서도 몽환력을 주입해줄 수 있을 줄이야.
단순히 주입 정도가 아니었다.
츠츠츠츠츠츠츠!
이 순간 상훈과 그녀의 몸이 일체가 된 듯 가히 무한대라 할 수 있는 엄청난 양의 몽환력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다.
곧바로 상훈이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가이룬이 생성시킨 혼돈력의 폭풍이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다.
푸화악!
동시에 가이룬의 몸이 상하로 두 쪽이 났다.
“크으윽! 이럴 수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푹! 푸확! 팍파파팍!
상하로 분리된 가이룬의 몸체가 각각 수십 조각으로 쪼개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이룬의 분리된 조각들이 그 상태로 반대편 공역의 끝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몽환공역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괴물이 따로 없군. 저 상태로도 살아서 도망가다니!”
상훈은 가이룬을 죽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전신이 산산이 갈라진 상태에서도 살아서 도망칠 줄이야.
그러나 그는 나가서도 한동안 고생해야 할 것이다. 분신에 엄청난 타격을 받은 상태이니까.
“후우!”
베누스가 긴장했다가 안도하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상기된 표정의 그녀는 지금 상황이 잘 믿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상훈이 미소 지었다.
“봤지, 베누스? 이 안에서 우린 무적이야.”
그녀가 적시에 몽환력을 빌려주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이 후퇴했어야 했을 것이다. 상훈은 베누스가 기특하다는 생각에 그녀의 손을 쥔 손에 살짝 힘을 주고 흔들었다.
순간 베누스의 표정에 뿌듯해하는 미소가 피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흠칫하더니 재빨리 손을 슥 뺐다. 그리고는 딴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나는 네가 걱정되어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죽으면 나도 죽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도운 것 뿐이니까.”
“뭐 그렇겠지.”
[베누스와의 친밀도가 20 상승했습니다.]
[누적 친밀도 5205]
“하아! 왜 또 친밀도가?”
베누스는 기막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뭐만 하면 친밀도가 올라버리는 것 같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던 그녀는 그 사이 몽환공역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부유섬을 향해 이동했다.
“드디어 내 휴식처를 되찾았구나.”
섬 위에 내려선 그녀는 기뻐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봤다.
상훈도 잠시 섬을 살펴봤다.
“아무리 봐도 여기는 단순한 휴식처가 아니다. 분명 뭔가 비밀이 있을 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하지만 별로 알고 싶지 않았어.”
“알고 싶지 않았다고?”
“여기 오면 그냥 마음이 편했다. 여기선 내가 혼돈의 마녀가 아닌 그냥 베누스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 같아서.”
“그냥 베누스는 뭐가 다른데?”
“굳이 말하자면 평범한 인간이 된 기분이랄까?”
뜻밖의 말이었다. 상훈은 베누스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넌 부유섬에 오니 마치 다른 존재같다.”
“다른 존재?”
“네 말대로 진짜 인간 여자같은 느낌이야.”
“그럴 지도 모르지.”
베누스는 아까 저쪽 공역 위에 있을 때만해도 혼돈의 마녀 특유의 냉랭한 분위가 느껴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기서는 평범한 인간 여성 같았다.
물론 말만 평범이지 외모는 평범과 거리가 먼 초특급 미소녀다.
베누스가 시종들과 함께 있으면 그녀들이 빛을 잃을 정도이니까.
“하지만 이 섬을 떠나는 순간 난 다시 본래의 혼돈의 마녀로 돌아가게 돼. 그게 나의 운명이자 숙명이야.”
상훈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그런 운명이나 숙명은 사라졌다. 네가 원하면 난 영원히 네가 이곳 몽환공역의 부유섬에서 지내도록 지켜주겠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
“여기서 내가 몽환력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도록 도와주면 모든 게 해결돼.”
베누스는 씁쓸히 웃었다.
“그래봤자 이곳 몽환공역에서만 쓸 수 있는 힘일 뿐이야. 밖으로 나가면 아무 쓸데도 없는 허무한 힘.”
“그 힘이 내가 혼돈자가 되도록 도와줄 거야. 이 이상 수련에 적합한 공간은 없으니까.”
상상 결계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몽환공역은 혼돈자가 되기 위한 최고의 수련장이었다.
베누스가 잠시 고심하더니 입을 열었다.
“좋아. 네가 마음껏 몽환력을 쓸 수 있게 해주겠어. 대신 그 약속을 꼭 지켜줘.”
“반드시 지킬 테니 염려마라.”
“그럼 나는 이만 나가겠다.”
“밖으로 나간다고?”
“이 안에서는 아까처럼 계속 손을 붙잡고 있어야 하는데 그 상태로 수련을 하기란 불가능하잖아.”
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밖에서 내가 계속 네 몸에 몽환력을 넣어줄게. 그럼 여기서도 사용할 수 있어.”
“고맙다, 베누스.”
상훈이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표정을 짓자 베누스는 뭔가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네가 좋아서 하는 거 아니야. 이건 어디까지나 거래일 뿐이야.”
“알았다.”
곧바로 베누스는 몽환공역 밖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상훈은 신비한 힘이 몸 안 가득 쌓인 걸 느꼈다.
다름아닌 몽환력이었다.
아까 베누스의 손을 잡고 있을 때보다 더욱 방대한 양.
이 정도면 이 안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좋아! 그럼 수련을 시작해볼까?’
이제 혼돈자가 되기 전에는 몽환공역을 나가지 않을 것이다.
곧바로 상훈은 무아지경 속에서 수련에만 몰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