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몽환공역의 부유하는 섬 (2)
곧바로 시종들이 간략하게 자신들을 상훈 앞에 소개했다.
“서신과 선물을 받고 로드를 뵈올 날만 고대해왔답니다. 저는 시종1이예요.”
짙은 흑발에 두 눈이 총명하게 반짝이고 있는 시종1.
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이 유독 돋보였다.
외모도 뛰어나지만 왠지 침착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저는 시종2예요. 보고 싶었어요, 로드.”
웨이브 진 밝은 적발. 고양이 귀를 가지고 있는 묘인족 소녀.
그녀는 애교스러운 미소로 다가와 상훈의 손에 얼굴을 부비부비했다.
그것이 너무 귀엽고 자연스럽다보니 상훈도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시종5예요.”
신비한 은발 아래 창백해 보이는 피부를 가진 다크 엘프 소녀.
눈빛은 물론 목소리까지 뭔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저는 시종6이예요. 서신과 선물 감동적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종6은 푸른색의 뿔테 안경을 쓴 지적인 인상의 미소녀였다.
“모두 반가워.”
상훈은 미소 지었다. 전달을 통해 미리 친밀도 작업을 해두길 잘한 것이다. 본래라면 상훈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야 할 시종들이 상훈을 오히려 반기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반기는 것이 아니라 상훈을 로드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너희들을 만나고 싶었다. 한 명 한 명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지금은 일단 마녀 베누스의 일부터 처리하는 게 우선일 거야.”
그러자 시종1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녀님께서 평소에 수련하시던 장소에서 쓰러져계신 걸 제가 발견했죠. 제 생각엔 수련 중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마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네, 로드.”
상훈은 시종들과 함께 혼돈의 마녀 베누스가 누워있는 침실로 이동했다.
그녀는 의식불명 상태였다.
그러나 상훈은 단 번에 그녀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봤다.
‘저건 자아가 어딘가에 갇혀 있을 때 벌어지는 일인데?’
그렇다면 상상 수련을 하던 중 뭔가 일이 벌어졌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보통은 아무리 그런 경우라 해도 지금 베누스처럼 본신까지 석화에 걸리는 경우는 없다.
이건 아주 특별한 존재가 베누스를 공격해 자아를 가두고 저주를 걸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
아마도 그 특별한 존재는 분명 혼돈자일 것이다.
‘그가 무엇 때문에 베누스를 공격한 건가?’
혼돈의 마녀는 본래 혼돈 시스템의 중심부에 있었다. 만약 이 혼돈 시스템을 만든 혼돈자라면 자신의 피조물이라 할 수 있는 혼돈의 마녀를 공격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혹시 본래 혼돈자 이외에 또 다른 혼돈자가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하긴 그래야 말이 되긴 해. 그동안 혼돈자가 왜 내 앞에 직접 나타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었는지 말이야.’
상훈은 그게 가장 궁금했었는데 이제 대충 알 것 같았다.
혼돈자가 하나가 아닌 둘 혹은 그 이상일 가능성!
언제든 시스템에 개입할 수 있음에도 지켜만보고 있다는 건 서로 다른 혼돈자를 의식하고 있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난데없이 혼돈의 마녀를 공격했다.
이는 아주 불길한 징조 중 하나일 수도 있었다.
혼돈자들간의 전쟁!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혼돈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혼돈 시스템이 또 어떻게 변해버릴지 모른다.
말 그대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것이다.
상훈은 부디 그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지만,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상훈의 두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혼돈자고 뭐고 내가 다 쓸어버린다.’
라트로들은 그저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괴물들이다.
그래서 죽여없애버려야 차원계가 평화로워진다.
그런데 만약 혼돈자들도 혼돈이라는 미증유의 힘을 가진 괴물에 불과하다면?
그들 또한 라트로와 다를 바 없었다.
좀 더 강한 힘을 가진 라트로 말이다.
“로드! 마녀님은 어떠신가요?”
그때 시종1이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치료할 수 있으니 염려 마.”
“정말인가요?”
“아직 완전히 석화되지 않았으니까.”
“와아! 정말 다행이예요.”
“로드! 꼭 마녀님을 치료해주세요!”
“물론이야.”
상훈이 볼 때 베누스의 자아는 아직 무사했다.
석화가 조금씩 풀렸다가 다시 진행되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녀 스스로 저주를 풀기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치료를 시작할 테니 모두 나가라. 이 방으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
“네, 로드.”
시종1을 비롯한 여섯 시종들은 즉시 방 밖으로 나갔다.
상훈은 침대 앞에 앉아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베누스의 이마에 손가락을 댄 후 눈을 감았다.
츠읏!
순간 베누스의 이마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와 상훈의 몸에 스며들었다.
‘이건 무슨 기운이지?’
차원력이나 혼돈력과는 다른 이질적인 기운.
마치 꿈을 꾸는 듯 몽롱한 느낌이랄까?
그러나 상훈은 당황하지 않고 그 기운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자아가 있는 장소를 찾으려고 하는 순간 흘러나온 기운이기 때문이다.
‘베누스가 이 기운과 관련된 장소에 갇혀 있다는 뜻이겠지.’
스스스.
과연 틀림없었다.
곧바로 상훈의 시야에 환상처럼 한 거대한 공역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 떠있는 커다란 섬도.
‘특이한 곳이군.’
상훈은 아직 그곳 공역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마치 망원경을 통해 먼 곳을 보듯, 베누스가 있는 곳을 감지했을 뿐이다.
다행히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상훈은 즉각 가상의 분신을 만들어 그곳 공역에 진입했다.
‘여긴 일반적인 공역이 아닌 것 같은데.’
꼭 꿈 속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그럼 설마 꿈 속의 가상 공간?
그건 아니었다.
분명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그것은 준혼돈자의 경지에 이른 그의 직감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본신으로는 올 수 없고 분신으로만 진입이 가능한 특별한 공간!
‘어비스 전장이나 상상 결계의 공간과 비슷하지만 완전히 달라.’
어비스 전장에서는 그저 가상의 전투를 수행할 수 있을 뿐이다.
상상 결계는 그보다 좀 더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다. 가상의 적을 만들어 전투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이곳 공역에서는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이게 될지 모르겠네.’
상훈은 손을 슥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앞에 자줏빛 머리카락의 미소녀가 나타났다. 다름아닌 카멜라였다.
‘이럴 수가!’
물론, 지금 나타난 건 진짜 카멜라도 아니고 그녀의 분신도 아니었다. 상훈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일 뿐이다. 그리고 전투력은 실제 카멜라보다 조금 못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걸까?
현실에서 꿈과 같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니!
‘베누스의 이마에서 흘러나온 기운! 거기에 뭔가 비밀이 있는 게 분명해.’
만약 그 기운을 받지 않았다면 상훈은 이곳 공간으로 올 수도 없었다. 또한 지금 앞에서 싱긋 웃고 있는 카멜라 인형을 만들 수도 없었을 것이다.
‘베누스에게 이런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니!’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혼돈자로 추정되는 적이 나타나기 전에 최대한 빨리 베누스를 구해 야 할 것이다.
스슷.
상훈은 부유섬 위로 올라섰다. 카멜라 인형은 그 사이 연기로 변해 사라져버렸다.
‘이 섬 위는 무슨 휴식 공간 같은데?’
잠시 섬 위에 서 있었을 뿐인데 오래 휴식을 취한 것처럼 전신에 기운이 넘쳤다.
숲의 나무들과 풀들은 물론이고 호수를 헤엄치고 있는 가지각색의 물고기들까지 온갖 신비로운 빛으로 반짝였다.
평화롭고 아늑한 것이 꿈의 휴식처 같았다. 영원히 이 섬에서 지내고 싶을만큼 끌리는 장소였다.
촤아아아!
그러나 상훈은 이 부유섬에 온 목적을 잊지 않았다. 그는 즉시 호수 바닥에서 석화 상태로 굳어진 베누스를 찾아냈다. 곧바로 수면 위로 솟구친 후 그녀를 들고 섬을 빠져나왔다.
“어쩌다 이꼴이 된 건지 모르지만 깨어나서도 이건 기억해라. 난 네 생명의 은인이야.”
그녀는 석상처럼 변해버렸지만 의식은 깨어 있는 상태다.
따라서 상훈이 그녀를 호수에서 건져낸 것은 물론이고 지금 그녀를 구해 섬을 빠져나오는 것도 모두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아니었으면 넌 죽었다는 거지.”
잠시 후 상훈과 베누스는 거의 동시에 눈을 뜨게 된다.
베누스의 침실에서 말이다.
그건 입장 바꿔놓고 생각해봐도 황당한 상황.
침대 위에서 눈을 떴는데 원수가 눈 앞에 앉아 있으면 그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마녀라 해도 생명의 은인을 공격하지는 않을 거라 믿는다.”
혹시라도 깨어나자마자 베누스가 발작을 하고 덤벼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자칫 선물을 줘도 통하지 않을 수도 있을 테니까.
그 사이에도 상훈은 빠르게 공역의 경계쪽을 향해 이동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이곳을 빠져나간다.’
그런데 그때였다.
“몽환공역에 들어오기는 쉬워도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서늘한 음성과 함께 뭔가가 상훈의 앞을 가로막았다.
화아아악!
그와 함께 찬란한 빛의 그물이 상훈을 휘감았다.
마치 그물 속에 붙잡힌 물고기들처럼 상훈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물을 던진 존재는 이내 경악성을 발했다.
“이런!”
그물 속에 갇혀있던 상훈과 베누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멀리서 상훈의 싸늘한 음성이 울렸다.
“여기를 몽환공역이라 하는가 보군. 네가 누군지 모르지만 조만간 다시 와서 손봐주마.”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상훈의 앞쪽에 혼돈의 검사와 혼돈의 궁수가 각각 생겨나 그물을 던진 자를 공격했다.
“큭! 이 따위 하찮은 수법을!”
그물을 던진 자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혼돈의 검사와 궁수가 먼지로 변해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분통을 터뜨렸다.
그 사이 상훈은 베누스와 함께 몽환공역을 빠져나간 상태였으니까.
* * *
상훈은 베누스의 침실에서 눈을 떴다.
무사히 몽환공역을 빠져나온 것이다.
‘마지막에 그놈이 혹시 혼돈자인가?’
가공스러운 혼돈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낸 걸 보면 틀림없었다.
신기한 건 상훈이 그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피해냈다는 것!
모두 저기 누워있는 베누스의 몸에서 흡수한 정체불명의 기운 때문이었다.
‘이 마녀는 왜 그런 기운을 가지고도 그 자에게 무력하게 당한 걸까?’
생각해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명상을 통한 상상 수련을 극한으로 한 자가 아니면 몽환공역에서 그 기운이 있어도 쓰지 못할 테니까.
상훈에게는 그것이 매우 쉬운 일이지만, 베누스는 아니었다.
‘하긴 베누스는 처음부터 지금의 능력이 주어졌으니 명상 수련을 할 필요가 없었겠지.’
반면에 상훈은 밑바닥부터 하나씩 한계를 돌파하며 여기까지 올라왔다. 초월자가 된 이후부터 명상을 통한 수련은 그의 일상이었으니 말이다.
“으.”
그때 베누스가 짧게 신음을 토하더니 눈을 떴다. 그녀 역시 금세 의식이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발작하듯 벌떡 일어나 앉으며 상훈을 노려봤다.
“대체 네가 어떻게 이곳에······.”
그러나 그녀는 이내 말문이 막혔다. 상훈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뭔가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던 것이다.
“일단 이것들부터 받고나서 얘기하자.”
“이, 이건?”
그녀의 손에서 신비로운 칠색 광채로 반짝이는 팔찌와 반지, 그리고 머리장식들.
“믿을 수 없어. 이것들을 네가 어떻게?”
“선물이니 부담 갖지 말고 받아라.”
“닥쳐라. 내가 왜 네놈에게 선물을······.”
그러나 베누스는 그것들을 거절하지 못했다. 아니, 이미 받은 상태이니 거절 자체가 의미가 없었다.
[베누스와의 친밀도가 5100 상승했습니다.]
[누적 친밀도 5100]
[베누스와의 친밀도가 5000을 돌파해 격려 2단계를 펼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