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절대 충성의 부하들 (2)
밝은 주황색의 긴머리가 허리까지 나풀거리는 시종4는 아이리스보다 키가 약간 컸다.
약간은 감긴 듯한 눈으로 흘겨보는 시선.
오뚝한 콧날 아래 살짝 벌어진 주황빛 입술에서는 윤기가 반짝였고, 쫙 달라붙은 초마룡전신갑을 통해 드러난 몸매는 섹시함 그 자체였다.
그러고 보면 혼돈의 시종들은 하나같이 시선강탈의 초특급 미소녀다.
아마 그녀들로만 걸그룹을 결성하면 지구 정도가 아니라 차원계를 진동시키고도 남을 것이다.
“여기는 대체 왜 온 거야, 시종3? 그리고 아무리 봐도 저놈은 전상훈 같은데?”
시종4는 아이리스가 갑자기 갈 곳이 있다고 해서 따라왔다.
그런데 그곳이 룬델의 궁전이고, 그곳 대전 옥좌에 상훈이 앉아있자 뭔가 이상했다.
그러자 아이리스가 조금은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곧 알게 될 거야.”
그 말을 하는 그녀는 속으로 시종4에게 미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시종4는 그녀만을 믿고 이곳에 따라왔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아마 사실을 알았다면 절대 따라오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미안해, 시종4. 널 살리는 방법은 이것 뿐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어.’
아이리스는 진심으로 시종4가 상훈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시종4, 그렇지 않아도 널 기다리고 있었다. 줄 것도 좀 있고.”
그때 상훈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시종4가 불쾌함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봤다.
“무엇 때문에 네가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만 나는 너 따위와 할 말 없다, 사악한 군주 전상훈.”
적의가 가득한 음성.
아마 이곳이 중립 지역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자신이 죽을지라도 상훈을 향해 검을 빼들었을 것이다.
상훈은 이제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이제는 시종들의 저런 모습들이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처음엔 다 그런 식으로 말을 하지.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이걸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그러나 그녀는 말을 하다말고 상훈의 손에서 신비하게 반짝이는 구슬에 시선을 고정 시켰다.
“그, 그건 설마?”
“맞아. 네가 생각하는 그것이지. 일단 이것부터 받고 나서 얘기하자.”
상훈이 옥좌에서 일어나 걸어왔다.
“자, 잠깐! 오, 오지 마.”
그러나 상훈이 성큼 다가와 그녀의 손에 황홀한 혼돈의 빛구슬을 쥐여줄때까지 시종4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물론 상훈이 강제로 그녀를 나가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빛구슬을 보는 순간 그것에 홀려 그녀 스스로 나가지 못한 것이다.
[시종4와의 친밀도가 2000 상승했습니다.]
[누적 친밀도 2000]
“아, 이런······.”
시종4는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파악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그 사이 상훈은 그녀에게 또 다른 선물을 계속 안겨줬다. 이번에는 아까 아이리스처럼 실신하지 않게 약간씩 텀을 두고 말이다.
[누적 친밀도 45600]
절대 충성도의 2배가 넘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친밀도!
역시나 어비스에서 친밀도 아이템을 싹 쓸어오길 잘했다.
‘친밀도는 단번에 절대 충성도까지 올려야 제맛이지.’
감질나게 몇 백씩 올리는 건 이제 못할 짓이었다.
“혼란스러워하지 마라, 시종4. 이제 나의 시종으로서의 새로운 운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라.”
“······.”
잠시 침묵했다가 상훈을 쳐다보는 시종4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였다.
“혹시 어제 어비스에서 시종7이 당신이었나요?”
“맞아.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지?”
“지금껏 제가 누군가의 손에 키스를 한 건 그때 뿐이니까요.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럼 또 무슨 이유가 있어?”
“어제 시종7이 좀 이상했어요. 갑자기 키스를 해주는 분위기가 되어서 해주긴 했지만. 그것까지는 넘어갈 수 있어요. 그런데 시종7이 2차 전장의 최후 생존자가 된 건 무척이나 이상한 일이에요.”
“아마도 그렇겠지.”
“그 때문에 마녀님께서도 의구심을 갖고 계시지만 시종7이 혼돈단톡에 들어오지를 않아 물어볼 수가 없는 상황이죠.”
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멜라도 마음 고생을 하고 있겠구나.’
지금 카멜라는 혼돈단톡방에 일부러 들어가지 않고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잘못 대답하게 되면 그녀의 배신을 혼돈의 마녀가 알아챌까 두려워서 말이다.
“그런데 이제야 알겠군요. 당신이 시종7로 위장해 있었던 게 분명해요. 그리고 시종7은 저기서 눈치를 보고 있는 시종3처럼 당신의 사악한 마수에 빠져 하수인으로 전락해 있었던 거예요.”
그러자 아이리스가 흠칫하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시종4, 속여서 미안해. 널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었어.”
“알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 자가 날 죽인다고 했겠지. 넌 날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저 자의 뜻에 따른 거고.”
“그건 그렇지만······.”
“널 원망하지 않아, 시종3. 모든 건 저 자의 사악한 마수 때문이니까.”
그 말에 상훈이 울컥했다.
“사악한 마수라니! 그렇게 말하니 내가 무슨 마왕이라도 된 것 같잖아.”
“흥! 그럼 아닌가요? 대체 이제 날 어쩔 셈인가요? 훗, 하긴 내가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마음대로 농락하려 하겠죠. 그,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나는 당할 수밖에 없을 거고······.”
“시종4, 오해야. 로드께서는 절대 그런 분 아니야.”
아이리스가 다급히 아니라 말했지만 시종4는 어림없다는 표정이었다.
“오해? 지금 이 상황은 마왕이 미녀를 납치한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놔둔다고?”
“로드는 마왕과 달라.”
“내 말이 틀림없을 걸. 그렇지 않으면 친밀도를 이렇게 높여놓을 리가 없어. 생각해봐. 2천도 아니고 2만도 아니고 4만 5천이야. 난 이제 무슨 짓을 시켜도 다 해야 해! 그건 시종3 너도 마찬가지일 걸.”
“설마·····?”
그 사이 시종4에게 설득이 되었는지 아이리스도 불안한 표정으로 상훈을 쳐다봤다.
‘왜 이야기가 이상하게 흐르는 거냐?’
상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마왕들이라면 그런 일을 벌이고도 남는다. 그 역시 초월자가 되기 이전 여마왕이나 서큐버스 로드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룬 적이 있었으니까.
“갑자기 친밀도를 높였으니 그런 오해들을 할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염려마라. 나 그렇게 나쁜 놈 아니거든.”
“흥! 마왕들도 처음엔 그렇게 말한다고 하죠.”
“네가 진짜 마왕을 안 만나봐서 그러나 본데 그놈들은 말 따위는 하지 않아. 말없이 그냥 행동으로 보여준다.”
“마왕 따위가 그런 짓을 하려다간 제 손에 먼저 죽겠죠. 그리고 로드께서는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란 것 잘 알아요.”
“그런데 왜 그런 말을?”
그러다 상훈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시종4의 입가에 미소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미소는 뭐냐?”
그러자 시종4가 두 손을 한데 모으며 예쁘게 웃었다.
“용서해주세요, 로드. 실은 이 상황이 너무 어색하고 서먹해서 장난 좀 쳐봤어요.”
“시종4는 원래 장난기가 심해요. 친해질수록 장난도 더 많이 치죠.”
아이리스가 못마땅한 듯 시종4를 노려봤다. 그녀 역시 방금 전 시종4의 연기에 속은 것이 분한 모양이었다.
“그게 장난이였냐?”
“진심도 어느 정도는······.”
“됐다.”
상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친밀도를 너무 높여놓아 부작용이 생긴 것 아닐까?
“장난 그만하고 정식으로 인사나 해봐.”
“네.”
곧바로 시종4는 공손히 상훈에게 예를 갖췄다.
“미천한 시종이 위대하신 혼돈계의 군주이신 로드께 인사 올려요. 로드께서 흡족해하실만한 시종이 되도록 노력하겠어요.”
“좋아! 이제부터 네 이름은 시종4가 아니라 샬롯이다.”
“샬롯?”
“네가 나의 시종이자 정식 부하가 되었음을 의미하지. 샬롯은 내가 아는 어떤 왕국의 아주 품위있는 공주 이름이었다.”
상훈은 특히 품위를 강조했다. 샬롯이 웃으며 끄덕였다.
“근데 이 이름은 왠지 낮보다 밤에 더 품위가 넘칠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밤에 더 품위있는 시종이 되어볼까 해요.”
“또 시작이냐?”
“아니에요.”
상훈이 노려보자 샬롯은 즉시 말 잘듣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이제 너희들은 이 서신과 선물들을 다른 시종들에게 전달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도 잘 설명해라.”
“네, 로드.”
“맡겨주세요, 로드.”
상훈은 시종1과 시종2 관련 친밀도 아이템은 아이리스에게 맡겼고, 시종5와 시중6 관련 아이템들은 샬롯에게 맡겼다.
원래는 관련 친밀도 아이템은 몽땅 다 털어줄 작정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친밀도가 높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샬롯처럼 대책 없는 녀석이 또 안나오게 하려면 친밀도를 잘 계산해서 주자.’
10% 하락을 예상하고도 대략 2만대 초반 수준만 나오게 하면 될 것이다.
“그럼 다녀오겠어요, 로드.”
“틈을 봐서 시종들에게 로드의 선물을 잘 전달하겠어요.”
“급하게 하려고 하지말고 최대한 신중하게 해라. 마녀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해.”
“네, 로드. 염려마세요.”
아이리스와 샬롯이 궁전을 빠져나갔다.
‘아직 섣불리 베누스에게는 선물을 건낼 때가 아니야.’
친밀도 아이템을 다 합쳐봤자 500뿐이라 자칫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시종들이 그것을 전해주게 되면 베누스는 어떤 상황인지 금세 파악을 할 것이다. 시종들에게 무슨 화가 미칠지 모를 일이었다.
‘친밀도가 2만까지는 아니어도 2천 정도는 되어야 뭐라도 해볼 수 있겠지.’
예전의 카멜라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그녀들이 나간지 얼마되지 않아.
[시종5와의 친밀도가 1845 상승했습니다.]
[시종5와의 친밀도가 92 상승했습니다.]
······
[누적 친밀도 21832]
금세 기회가 생긴 건지 샬롯이 시종5에게 선물을 건넨 모양이었다.
상훈과 시종5의 친밀도가 절대 충성도를 넘어섰다.
‘벌써? 빠르기도 하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6, 시종1, 시종2 순으로 친밀도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 즉시 모두 성공적으로 절대 충성도를 달성했다.
‘좋아!’
이로써 혼돈의 시종 일곱 명이 모두 상훈의 시종이 되었다.
그녀들은 단순한 시종이 아니라 모두 절대충성의 부하들이 되어줄 것이다.
‘이제 베누스 한 명 남았군.’
그런데 그녀와 관련된 친밀도 아이템은 정말 안 나왔다.
혹시나 싶어서 어비스 거래소에 있는 비밀 상점에서 랜덤 상자를 한 번 돌려보기로 했다.
‘물량으로 승부다. 설마 하나는 나오겠지.’
그러나 무려 10만 포인트를 써서 상자 1000개를 돌려봤지만, 원하는 건 나오지 않았다.
베누스와 관련없는 온갖 친밀도 아이템들과 삼각김밥, 바나나 우유와 같은 잡동사니 먹을 것들만 아공간에 잔뜩 쌓였을 뿐이다.
‘더 돌려도 소용없겠네.’
괜히 포인트만 날릴 뿐이다.
아무리 봐도 행운 문제였다.
다음에 1혼돈계로 가면 이네르타와 파티를 맺고 돌려보기로 했다.
‘베누스는 당분간 포기하고 수련이나 하자.’
그 뒤로 상훈은 온종일 혼돈자가 되기 위한 수련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씩 어비스 거래소에 가서 친밀도 아이템들을 싹 쓸어오는 것.
그리고 간혹 인사차 찾아와 혼돈의 마녀의 현황에 대해 보고를 하는 아이리스와 샬롯을 만나는 것.
그때가 그나마 그의 휴식 시간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10여 일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동안 방문이 뜸했던 아이리스와 샬롯이 상기된 표정으로 그를 찾아왔다.
“로드! 드디어 저희가 해냈어요!”
“해내다니? 뭘 말이야?”
상훈이 고개를 갸웃하자 그녀들이 즉시 아공간에서 뭔가를 꺼내 상훈에게 바쳤다.
“받으세요, 로드! 마녀님과의 친밀도 아이템들이예요.”
“하아! 저희들이 이것들을 찾느라 퀘스트 행성들을 얼마나 뒤졌는지 몰라요.”
“오!”
상훈은 반색했다. 그는 포기하고 있었는데 기특하게도 시종들이 알아서 그것들을 찾아올 줄이야.
절대혼돈의 칠색 머리장식과 반지, 귀고리.
정말로 모두 베누스와의 친밀도를 올릴 수 있는 아이템들이었다.
기존에 있던 것들과 합쳐보니.
[혼돈의 마녀 베누스 친밀도]
-절대혼돈의 칠색 머리장식 : 친밀도 100 상승 (18)
-절대혼돈의 칠색 반지 : 친밀도 100 상승 (12)
-절대혼돈의 칠색 귀고리 : 친밀도 100 상승 (19)
-잃어버린 칠색 팔찌 : 친밀도 200 상승 (1)
무려 5100의 친밀도를 올릴 수 있게 됐다.
‘절대 충성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 정도면 해볼만 해.’
2단계 격려를 펼칠 수 있으며, 투덜대긴 해도 상훈의 뜻을 거절하지 못할 정도의 친밀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