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혼돈의 마녀 베누스 (2)
[혼돈의 마녀가 혼돈의 공역에서 나왔습니다.]
[혼돈의 페르틸라가 혼돈의 마녀를 대신해 혼돈의 공역을 차지합니다.]
갑자기 이 무슨 청천병력같은 소리인 것인가?
49개 혼돈계의 모든 초월자들은 난데없이 들려오는 알림을 듣고 경악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모든 혼돈계에 혼란스러운 일이 가득 발생합니다.]
[제 1혼돈계 모든 퀘스트 행성들의 문제 해결도가 대폭 하락했습니다.]
[제 2혼돈계 모든 퀘스트 행성들의 문제 해결도가 대폭 하락했습니다.]
······
[제 49혼돈계 모든 퀘스트 행성들의 문제 해결도가 대폭 하락했습니다.]
초월자들이 중립 행성의 각성자들을 동원해 간신히 조금씩 올리고 있던 문제 해결도가 대폭 하락해버린 것이다.
각 행성들마다 온갖 새로운 퀘스트들이 대거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이게 또 어떻게 되는 거냐?”
제 7혼돈계의 군주 아르곤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이번에 얻은 어비스 포인트로 대량의 혼돈의 괴수 소환권을 얻었다. 거기에 그의 부하들이 바친 소환권도 적지 않았다.
그것을 이용해 그는 더 이상 혼돈의 괴수를 처치해도 강해질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이전의 그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경지였다.
그러다 보니 그는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이제야말로 자신이 모든 혼돈계 최강자라 자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간 그의 2000여 초월자 부하들이 노력을 기울인 덕에 7혼돈계 퀘스트 행성들의 문제 해결도가 대부분 90%에 육박한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혼돈의 페르틸라가 어쩌고 하더니 난리가 벌어지고 말았다.
[C7002 행성의 문제 해결도가 67%하락하여 23%가 되었습니다.]
[C7003 행성의 문제 해결도가 73%하락하여 17%가 되었습니다.]
······
이제 하루 정도면 완전히 7혼돈계를 장악할 수 있었는데.
드디어 다른 혼돈계를 침공할 수 있게 됐다며 벼르고 있던 그에게 마른 하늘의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그건 아르곤만이 아니었다.
다른 군주들도 이 상황에 맥이 빠지긴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다시 행성의 퀘스트들을 수행해서 문제 해결도를 올려야 할 판이었으니까.
* * *
“······!”
상훈은 눈을 뜨고 일어났다. 자신이 웬 낯선 침대 위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통나무로 지어진 자그만 방의 투박한 가구들.
탁자 위의 작은 촛불 하나만 방을 밝혀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정신을 잃었었다.’
혼돈의 마녀와 전력을 다해 싸우고 있던 와중에 공역이 합쳐지며 페르틸라가 날아오던 급박한 상황!
상훈은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끌어올려 통로를 만들어 기적적으로 빠져나왔다. 조금만 늦었어도 지금쯤 죽었을 것이다.
‘정신을 잃어본 게 얼마만인지.’
마지막 차원력까지 쥐어짜내 완전히 소진되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리라. 거기에 혼돈계 이동의 충격까지!
‘다행히 힘은 모두 회복됐다.’
예전 같으면 그렇게 완전히 차원력이 소진된 상태에서 본래의 힘을 회복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얼마 전 지구로 귀환했을 때가 딱 그런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그때와 비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지금은 더 이상 차원력의 회복에 시간이 오래 소요되지 않았다. 잠깐의 휴식만으로도 최상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여기는 어디인가?’
-아크엘!
혹시나 싶어 초현자 아크엘에게 연락을 취해봤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곳은 상훈이 장악한 1, 2, 10혼돈계가 아님을 의미했다.
그럼 다른 혼돈계 중 한 곳일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바로 그 혼돈계에 속한 행성 중 하나일 것이고 말이다.
[제 42혼돈계 C42098 행성 - 문제 해결도 18%]
어딘지는 금방 나타났다.
군주인 상훈으로서는 당연히 알 수 있는 정보였으니까.
‘42혼돈계라면?’
다름아닌 악명 높은 라트로인 초마왕 사르탄이 군주로 있는 혼돈계다.
상훈은 묘한 미소를 흘렸다.
‘사르탄! 그렇지 않아도 네놈을 벼르고 있었는데 잘됐다.’
당장이라도 메인 거점의 공간 좌표만 알아내면 사르탄을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중립 행성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문제는 그 중립 행성의 공간 좌표를 알 수 없다는 것.
‘뭐 그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지.’
이곳 퀘스트 행성의 어딘가에 그런 비밀 좌표들을 관리하고 있는 이들은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왕이나 황제 혹은 현자와 같은 이들이니 찾기도 쉬웠다.
‘그나저나 혼돈의 마녀 베누스가 내 뒤를 따라왔던 것 같은데.’
상훈은 당시 뒤를 돌아 쳐다보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만든 통로에 베누스가 뛰어든 것을 말이다.
본래라면 그 즉시 공격을 해야했겠지만 상훈에게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통로가 닫힌다는 걸 느끼는 순간 정신을 잃고 말았으니까.
‘그럼 혼돈의 마녀도 그곳을 빠져나왔다는 건가?’
혼돈계의 알림은 상훈이 의식을 잃은 사이에 울려퍼진터라 그는 아직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한다.
덜컥!
그때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웬 10대 중반의 소년이었다.
“아저씨! 깨어나셨군요?”
상훈은 이미 누군가 방문으로 다가오는 걸 알고 있었다.
“네가 나를 여기로 옮긴 거냐?”
“아니오. 저의 형이 옮겼어요. 호수에 낚시하러 갔다가 수면에 둥둥 떠 있는 아저씨를 발견했다고 했어요.”
“그랬구나. 고맙다. 덕분에 잘 쉬었어.”
“아니에요.”
소년은 해맑게 웃었다. 상훈도 미소 지었다. 사실 그냥 내버려둬도 그는 지금쯤 알아서 깨어났을 것이다. 그래도 왠지 기특하다는 생각에 작은 선물을 주기로 했다.
스윽.
곧바로 그는 아공간에서 루나 금화 1개를 하나 꺼내 소년에게 내밀었다.
이는 1만 루나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루나는 인간 각성자들이나 상훈에게는 그냥 아공간의 계좌에 자동 입금되어 잔액이 표시되는 식이지만, 퀘스트 행성의 종족들에게는 실제로 존재하는 화폐다.
그러다 보니 아공간에서 루나를 꺼내면 알아서 화폐가 나타난다.
1루나는 500원만한 크기의 동전.
100루나는 은화.
10,000루나는 금화.
그 이상은 전표로 나타나는 식이었다.
“받아라. 날 도와준 보답이다. 형에게 전해줘.”
아공간에 루나만 수천억이 넘게 있는 상훈에게는 별거 아니지만 이런 산골의 소년 형제들에게는 제법 목돈일 것이다.
사실 더 줘도 상관없지만 공연히 평온한 소년 형제들의 일상을 깨고 싶지 않았다. 상훈이 볼 때 딱 적당한 액수였다.
“이건 금화! 우와! 처음 구경해봐요.”
소년은 금화를 받고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상훈에게 금화를 돌려주려했다.
“죄송해요. 이런 걸 받으면 형에게 크게 혼나요. 형은 돈을 바라고 아저씨를 도와준 게 아니예요.”
금화를 거절하다니! 순박하면서도 의외로 기특한 녀석들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대신 너희들을 괴롭힌다는 그 리자드맨 녀석을 해치워주마.”
퀘스트 행성 답게 소년의 머리 위에도 노란색 느낌표가 떠 있었다.
[퀘스트] 숲의 도적들을 쫓아주세요!
[보상] 10루나, 마른 육포 10조각
내용은 이곳 숲의 악당들인 리자드맨 두 마리를 쫒아줬으면 하는 것이었다.
사실 상훈은 한가하게 퀘스트나 하고 있을 생각이 없어 그냥 무시했다.
그러나 소년이 금화를 받지 않자 기특하다는 생각에 소년의 문제 하나만 해결해주기로 한 것이다.
[퀘스트 숲의 도적들을 쫓아주세요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습니다.]
퀘스트는 1초도 안 되어 끝났다. 퀘스트를 받는 즉시 퀘스트 몬스터인 리자드맨들의 위치가 떴으니까. 물론 그런 것이 없어도 숲에서 리자드맨 두 마리를 찾아내는 건 상훈에게는 장난과 같은 일이었다.
“와아!”
소년 피터는 상훈이 순식간에 리자드들의 사체들을 마당에 내동댕이 치자 탄성을 질렀다. 그때 막 집에 도착해 그것을 본 형 톰도 깜짝 놀랐다. 사실 그는 리자드맨들에게 어제 잡은 물고기들을 털려 밤새 다시 낚시를 하고 오던 중이었던 것이다.
톰은 넙죽 엎드리며 절했다.
“헤헤! 정말 감사합니다. 숲의 도적들이 사라져 앞으로 이 숲은 매우 평화로울 겁니다.”
“별 일 아니니 일어나라. 그럼 난 이만 가보겠다.”
정말로 별 일 아니었지만 왠지 마음은 뿌듯했다. 그런데 톰이 벌떡 일어나더니 뭔가를 내밀었다.
“잠깐만요. 그놈들을 쫓아주셨는데 제가 가진 게 없어서 보답할 게 없군요. 부디 이거라도 받아주십시오.”
“이건?”
톰이 내민 것은 투박해보이는 팔찌였다. 그냥 보면 고물같지만, 정보를 살펴보니 무려 신화 등급의 아이템이었다.
[잃어버린 칠색 팔찌]
-등급 : 신화
-용도 : 친밀도 아이템
-누군가가 잃어버린 것 같다. 본래는 화려한 칠색 빛깔을 가진 장신구지만 지금은 그저 빛바랜 고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특별한 누군가의 앞에서는 이것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상훈의 두 눈이 빛났다. 친밀도 아이템이라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팔찌의 형태가 낯익었기 때문이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건데.’
빛이 바래서 무척이나 투박해 보인다. 그러나 만약 여기에 화려한 칠색의 빛이 번쩍인다면?
‘틀림없어. 그 마녀가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야.’
혼돈의 마녀 베누스의 손목에서 반짝이던 칠색의 팔찌.
그녀와 미친 듯 싸우다 보니 상훈은 그 팔찌의 형태를 잘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 어디서 구한 거지?”
“밤에 호수에서 낚시하던 중에 걸렸어요. 낚싯줄에 뭔가 걸려 기대했는데 빛바랜 장신구라서 실망하고 말았지만요.”
“호수라고? 혹시 내가 떠있었다는 거기냐?”
“예. 어떻게 아셨어요?”
순간 상훈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제 자신이 만든 통로로 베누스가 뒤따라 들어와 설마 했는데.
‘그 마녀도 이곳 행성에 들어온 건가?’
상훈처럼 호수로 떨어져내렸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러던 와중에 손목에 있던 팔찌가 흘러나온 것이고 말이다.
‘이 행성이 멀쩡한 걸 보니 다행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군.’
상훈은 혼돈의 마녀 베누스가 얼마나 가공스러운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깨어나 창 한 번 휘두르면 이런 행성쯤은 그냥 먼지로 변해버리고 말 것이다.
‘깨어나기 전에 내가 먼저 찾아 죽여야 한다.’
상훈은 즉각 톰이 말한 호수로 이동했다.
그러다 돌연 호수 위를 평지처럼 걸어다니며 아래를 살피고 있는 웬 여성을 발견했다. 그녀는 마치 잃어버린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던 그녀는 힐끗 고개를 돌려 상훈을 발견하고는 두 눈에서 섬뜩한 안광을 뿜어냈다.
“네놈은?”
“역시 너도 이곳에 왔군, 베누스.”
상훈의 입가에 냉소가 피어났다. 혼돈의 마녀는 즉각 무기를 꺼낼 태세였다.
바로 그 순간.
[한 시간 후 혼돈의 어비스가 열립니다.]
[49 혼돈계의 모든 초월자들은 한 명도 예외없이 어비스로 강제 진입됩니다.]
[지금부터 어비스가 닫힐 때까지 어비스 지역 이외에서의 전쟁은 모두 금지되며, 이를 어길 경우 혼돈이 주는 죽음의 징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런! 하필이면 어비스가?”
베누스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그녀라 해도 혼돈의 룰을 어기지는 못한다. 상훈 역시 마찬가지.
어비스가 열렸다 닫히기 전까지 혼돈계 전역이 중립 행성과 같은 상태가 된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