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보이지 않는 손 (1) (79/159)

 # 79

보이지 않는 손 (1)

제 2혼돈계 중립 행성 C2099 한 저택의 정원.

혈무혼은 부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모두 들어라! 그동안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여러모로 이곳 2혼돈계는 나의 꿈을 키워나갈 만한 곳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나 제15혼돈계로 이동할 것이다.”

이는 그간 혈무혼을 따른 초월자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얘기였다.

“왜 갑자기 떠나신다는 말입니까, 로드?”

“이곳에서 힘을 모아 제 1혼돈계의 군주 전상훈을 친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그간 로드만 믿고 있던 저희들은 어찌하란 말씀이신지요.”

“어비스 최후 생존자이신 로드께서 설마 전상훈을 두려워하고 계신것입니까?”

그러자 혈무혼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큭! 그럴 리가 있겠느냐? 너희도 알다시피 나는 이번 어비스에서도 최후의 강자가 되었다. 그런 내게 있어 제 1혼돈계의 군주 전상훈 따위는 그저 가소로운 존재일 뿐이다.”

그는 부하들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전쟁이란 군주들의 전투력만 가지고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모로 판단컨대 이곳 2혼돈계는 내가 전쟁을 수행하기에 극히 불리한 곳이다. 난 15혼돈계로 이동해 군주 크라니오를 처치하고 페르틸라를 손에 넣은 후 군주가 될 것이다.”

“오오!”

모두들 그제야 혈무혼의 의중을 깨달았다. 혈무혼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는 너희들을 버리는 게 아니다. 너희들도 혼돈계 이동권을 살만큼 포인트가 모이면 15혼돈계로 와라. 나는 그곳에서 군주가 되어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로드.”

“로드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저희를 용서하소서!”

혼돈계 이동권! 그것은 어비스의 비밀 상점에서 파는 특별한 물건이었다.

[혼돈계 이동권]

-군주 및 군주의 권속 사용 불가

-각 혼돈계 중립행성 소속 초월자 전용

-49개의 혼돈계 중 원하는 혼돈계로 이동할 수 있음

-장당 가격 5,000P

혈무혼은 이번 어비스 1차 전장에서 생존의 탑 10층까지 오른 15명 중의 하나였다.

그가 획득한 포인트는 72,802P

2차 전장을 포기한 터라 그는 그 포인트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즉시 그는 어비스 비밀 상점에서 5000포인트를 주고 혼돈계 이동권을 구매했다.

‘전상훈이란 놈이 있는 한 나는 이곳 중립 행성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다.’

말은 부하들에게 그럴 듯한 핑계를 댔지만, 사실 혈무혼은 상훈이 두려워서 떠나는 것이었다.

[혼돈계 이동권을 사용합니다.]

[원하시는 혼돈계를 선택해주세요.]

“15혼돈계로 가겠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몸이 환한 광채에 휩싸였다.

[15혼돈계로 이동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그의 앞에는 훤칠한 키를 가진 포탈 관리자가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혈무혼님. 제 15혼돈계 중립 행성 C15098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이 15혼돈계가 맞느냐?”

“그렇습니다.”

그 말에 혈무혼은 비로소 안도했다.

‘처음부터 이런 곳으로 들어왔으면 지금쯤 큰 세력을 갖췄을 텐데 아쉽군.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다. 차곡차곡 힘을 길러 혼돈계의 패권을 거머쥐고 말 것이다.’

그의 두 눈이 강렬히 번뜩였다.

‘군주 크라니오! 네놈이 지금껏 용케 군주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 운은 오늘까지다.’

켈라크스 제 3군황 크라니오!

궁극의 초월자급 전투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래봤자 혈무혼 앞에서는 그저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것이 그가 이곳 혼돈계를 굳이 선택한 이유였다. 일단은 군주가 되는 것이 중요한 터라 가장 만만한 대상을 골라야 했으니까.

“지금 즉시 메인 거점 행성으로 가는 포탈을 열어라.”

“알겠습니다.”

상급 차원석 1개를 주자 포탈 관리자는 즉각 제 15혼돈계의 메인 거점 행성인 C15001로 향하는 포탈을 열었다.

그 즉시 혈무혼은 그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잠시 후.

[초월자 혈무혼이 제 15혼돈계의 군주 크라니오와의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혈무혼이 어둠의 페르틸라를 획득했습니다.]

[혈무혼이 제 15혼돈계의 군주가 되었습니다.]

[크라니오가 혈무혼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혼돈계에 또 새로운 군주가 탄생했다.

* * *

그 시간 제 10혼돈계 중립 행성 C10092.

상훈은 거점 관리자이자 어비스의 강화사인 초콜릿 엘프 하넬의 궁전에 막 방문했다.

그러다 혈무혼이 15혼돈계로 가서 크라니오를 패배시킨 후 새로운 군주가 되었다는 알림을 들었다.

“중립 행성에 처박혀 있다더니 결국 다른 곳으로 갔군.”

그간 아크엘은 초월자 중 하나를 2혼돈계의 중립 행성으로 보내 그곳의 실정을 파악했고, 그것은 그대로 상훈에게 보고되었다.

혈무혼이 2혼돈계의 실질적인 지배자.

2혼돈계로 진입한 상당수의 초월자들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물론 상훈에게는 혈무혼이 무척이나 가소로운 존재였지만, 문제는 그가 중립 행성에 처박힌 채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중립 지역에 숨어있는 초월자들은 상훈도 어쩔 수 없었다. 강제로 끌어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래서 혈무혼이 어떤 식으로든 중립 지역을 벗어나 활동을 할 때까지 일부러 2혼돈계로 진입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가 도주한 것이다.

그러자 하넬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는 군주님을 두려워해 도주한 것이 분명해요.”

“살고 싶다면 차라리 혼돈계 이탈권을 써서 영원히 혼돈계를 떠났어야 했어. 다른 혼돈계로 이동한 건 아직 욕심이 남아있다는 뜻이야.”

혼돈계 이탈권은 5만 포인트나 되지만, 혈무혼이라면 분명 그만한 포인트를 획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떠나지 않았다. 다른 혼돈계로 가서 혼돈자가 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결국 아르곤, 혈무혼, 트로모스가 모두 군주가 되었군.’

전설의 라트로들이라 불리는 악명높은 초월자들.

[군주 아르곤]

-제 7 혼돈계

[군주 혈무혼]

-제 15혼돈계

[군주 트로모스]

-제 28혼돈계

[군주 실비아나]

-제 34혼돈계

[군주 사르탄]

-제 42혼돈계

상훈을 제외한 군주들이었다.

‘사르탄 녀석도 잘 버티고 있고.’

제 42혼돈계의 군주 사르탄의 실력은 아르곤 등에 버금가면서도 음흉하기로는 오히려 그들을 능가했다.

‘근데 실비아나는 누구지?’

제 34혼돈계의 군주 실비아나.

다른 군주들은 상훈이 모두 이름을 들어 알고 있는 자들이지만, 그녀는 유일하게 상훈이 모르는 존재였다.

그녀는 본래 그곳 혼돈계의 군주였던 켈라크스 6군황 세르펜스를 죽이고 그 자리에 앉았다. 상훈은 그때의 알림을 기억했다.

‘보통 라트로들끼리는 죽이지 않고 부하로 거두는 게 일반적인데?’

그렇다면 실비아나는 라트로가 아닌 것일까?

단정할 수는 없었다.

사르탄은 전투에서 승리하면 상대가 누구이든 죽여버리는 걸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머지않아 만나게 되겠지.’

부하들이 많아지면서 퀘스트 행성의 문제 해결도는 더욱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조만간 10혼돈계의 모든 행성이 점령될 것이고, 2혼돈계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그 쟁쟁한 악명을 떨치던 혈무혼도 군주님을 이토록 두려워하는 걸 보면 군주께서 모든 혼돈계를 제패하실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아요.”

“물론이야. 내가 혼돈계를 제패하는 거야 시간 문제다. 시종7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상훈은 자신의 뒤에서 묵묵히 서있는 시종7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천만에! 네놈은 언젠가 혼돈의 마녀님께 된통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말할 줄 알았다. 넌 대체 언제쯤 혼돈의 마녀를 잊고 날 진심으로 존경할 생각인 거냐?”

“천지가 개벽해도 그런 일은 절대 없다. 나에겐 오직 마녀님 뿐이야.”

상훈은 힐끗 하넬을 쳐다봤다.

“대체 친밀도가 얼마나 되어야 쟤가 과거의 주인을 잊고 나에게 좀 공손해질까?”

“글쎄요. 일단 2만이 되면 과거의 주인을 잊는 건 확실하겠지만, 태도는 성향문제라서 과연 공손해질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과거의 주인을 잊는 건 가능하다는 거야?”

“2만이면 절대 충성을 바치게 되니까요. 그 무슨 일이 있어도 오직 군주님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뜻이죠.”

“절대 충성이라! 아주 듣기 좋은 말이군.”

상훈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피어났다. 곧바로 그는 시종7을 향해 말했다.

“들었지? 최대한 빨리 친밀도를 2만으로 올려 혼돈의 마녀를 너의 머릿속에서 지워주마.”

그러자 시종7이 움찔했다. 친밀도 6210인 지금도 상훈의 명령을 거절하지 못하는데 2만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럼 안 돼!’

그런데 한편으로 왜 이렇게 기대가 되는 것인지.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최대한 무관심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쓸데없는 짓이다.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여기서 멈춰.”

“더 올려달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이 비열한 놈! 그런다고 내가 마녀님을 잊을 것 같으냐?”

“그때가서 두고 보면 알겠지.”

그러자 하넬이 몽롱해보이는 눈빛을 하며 말했다.

“2만은 그야말로 꿈의 친밀도죠. 제가 만약 군주님과 그 정도의 친밀도를 갖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거예요.”

“너야 강화사니까 강화 확률이 대폭 오르겠지. 2만 정도면 아마 10강 정도는 안전 강화일 거야.”

“그건 올라봐야 알아요. 하지만 강화 말고도 많은 면에서 도움이 될 수 있답니다. 전 거점 관리자이기도 하니까요.”

“그 말은 너의 친밀도도 꼭 2만으로 올려달라는 것 같은데?”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는 더 이상 바랄게 없죠.”

“좋아. 일단 널 위해 준비한 선물들이 좀 있긴 해.”

지금도 아크엘은 중립 행성들의 암거래상들과 고대물품상들, 그리고 각성자들의 히든 퀘스트 보상 아이템들까지 박박 긁어 모아 상훈에게 보내고 있었다. 물론 친밀도 아이템으로 추정되는 것들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상훈의 아공간에는 각종 친밀도 아이템들이 꽤 많이 쌓였다. 거기에 어비스 거래소에서 몇십 포인트로 사들인 것들도 제법 있었다.

고대 괴수의 부스러기 - 12개

혼돈의 다크 초콜릿 - 4개

그 중 하넬과 관련된 친밀도 아이템은 두 종류였다.

[하넬 친밀도]

-고대 괴수의 부스러기 : 친밀도 100 상승 (♥)

-혼돈의 다크 초콜릿 : 친밀도 1000 상승 (♥)

혼돈의 다크 초콜릿은 지구의 각성자들 중 극소만이 히든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신화 등급의 아이템이었다.

[혼돈의 다크 초콜릿]

-등급 : 신화

-용도 : 친밀도 아이템

-혼돈이라는 말이 붙어 있을만큼 맛이 기괴하기 이를데없는 이상한 초콜릿. 평범한 입맛을 가진 사람은 절대 먹을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매우 맛있는 초콜릿일지도 모른다.

-하넬 친밀도 1000 상승

본래는 열댓 명 정도가 이 퀘스트를 수행했는데 뭔가 대단한 효능이 있을 거라는 기대에 먹었다가 그대로 버렸다고 했다.

신화 등급의 초콜릿이니 다들 기대가 많았겠지만 결과는 대실망.

그것을 아크엘이 후한 가격을 쳐주고 매입해 온 것이었다.

“자, 받아라. 네가 좋아하는 고대 괴수의 부스러기들도 있고 이건 혼돈의 다크 초콜릿이란 거야.”

“어머나! 그 초콜릿은?”

역시나 하넬은 혼돈의 다크 초콜릿에 매우 큰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그 중 하나를 받아 포장을 벗긴 후 한입 깨어물더니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이 맛은 정말 독특해요.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

“네 표정이 더 독특해 보인다. 맛은 있는 거야?”

“물론이죠. 이 희귀한 초콜릿을 먹을 수 있다니 정말 행복해요.”

그녀는 고대 괴수의 부스러기를 받았을 때와는 비할 수 없이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취향 한 번 특이하다니까.’

고대 괴수의 부스러기로 예술품을 만든다는 것도 그렇고 저런 괴상한 초콜릿에 행복해하는 엘프라니.

어쨌든 상훈으로서는 친밀도만 올려놓으면 되는 것.

[하넬과의 친밀도 1200이 상승했습니다.]

[하넬과의 친밀도 4000이 상승했습니다.]

[누적 친밀도 7903]

[누적 친밀도가 5000을 돌파하여 하넬에게 격려 2단계를 펼칠 수 있습니다.]

[격려 2단계 발동시 강화 확률이 추가로 10% 상승합니다.]

이로써 하넬에게도 2단계 격려를 펼칠 수 있게 됐다.

다른 것보다 강화시에 아주 유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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