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다시 열린 어비스 (3)
후루룩! 쩝쩝!
잠시 후 상훈은 시종7이 끓여온 라면을 먹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못먹을 맛은 아니네. 어제 끓인 건 도저히 라면이라고 할 수 없었지.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 앞으로 기대해보겠다.”
그러자 시종7의 표정에 뿌듯한 기색이 어렸다. 칭찬으로 알아들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퉁명스럽게 말했다.
“칭찬 따위를 바라고 한 거 아니거든.”
[시종7과의 친밀도가 1 상승했습니다.]
[누적 친밀도 4209]
상훈은 힐끗 시종7을 쳐다봤다.
“칭찬은 바라지 않는다더니 친밀도가 오른 건 뭐냐?”
“친밀도는 숫자일 뿐. 친밀도가 올라간다고 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과연 그러는지 보겠다.”
상훈은 라면을 다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곧 어비스가 열리니 너도 준비해.”
“근데 너 대책은 있는 거야?”
“무슨 대책?”
“혼돈의 시종들이 모이면 네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이길 수 없어. 혼돈의 시종 셋만 모여도 넌 죽어.”
“너 설마 날 걱정해주는 거냐?”
그러자 시종7이 흠칫하더니 이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훗, 착각하지 마라! 네놈에게 드디어 쓴 맛을 보여줄 생각을 하니 즐거워 미칠 지경이니까.”
“실컷 즐거워해라. 그게 날 도와주는 거다.”
“······?”
“공연히 날 돕겠다고 시종 아닌 척 하지말고 시종7로서 철저히 행동하란 뜻이다. 내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시종7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로 죽고 싶은가 보군. 그럼 넌 일곱 명의 시종을 동시에 상대해야 될 텐데.”
“걱정되면 솔직히 그렇다고 말해. 나도 시종에게 그런 걱정 좀 들어보자.”
“천만에! 난 널 죽일 생각에 신이 나 죽을 지경이야.”
시종7은 조금도 걱정되지 않는다는 듯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 * *
[어비스가 열립니다.]
[당신은 혼돈의 어비스로 이동합니다.]
혼돈계의 심연에 위치한 가상 전장.
초월자들은 본신이 아닌 분신 상태로 모두 어비스로 이동되었다.
본신의 모습과는 다른 흑색 정령의 형체!
어비스에 들어온 모든 초월자들이 같은 형체로 되어 있어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불가능했다.
[1차 전장은 생존의 탑입니다.]
[생존의 탑은 총 10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초월자들은 무작위로 선정된 방으로 배정되어 임무를 완수해야 합니다.]
[같은 방으로 배정된 초월자들은 자동으로 파티로 구성되며 임무를 완수하면 파티가 해체됨과 동시에 다음 층으로 올라갑니다.]
[이후 다시 무작위로 파티가 생성되며 임무를 완수해야 합니다.]
‘뭐지? 전장이 바뀌었네?’
지난 번에는 빛과 어둠의 두 패거리로 싸워 진영전을 벌였는데 이번엔 웬 생존의 탑이라는 곳을 올라야 한다고 했다.
[1차 전장에서 초월자들은 다른 초월자들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5층의 임무까지 완수한 이들에게는 6층 도전을 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 경우 그간 획득한 포인트를 유지한 채 전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10층까지 도달해 모든 임무를 완수한 자들에게는 2차 전장에 참여할 기회가 부여됩니다.]
[2차 전장은 최후의 생존자 한 명만 승리하는 방식이며 1차 전장 랭킹 1위는 무조건 참여하게 됩니다.]
상훈은 실소가 나왔다.
‘지금쯤 다들 당황하고 있겠군.’
대부분 1차 전장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암구호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생존의 탑에서는 그게 무의미해진 것이다. 초월자들간 전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2차 전장에서라면 암구호를 통해 서로를 식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 2차 전장은 생각도 안하고 있을 터였다.
‘이런 식으로 어비스 전장은 매번 달라지는 건가?’
아니면 몇 가지 방식의 전장이 돌아가며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어떤 식이든 상훈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당신의 이름이 무작위로 결정됩니다.]
[당신의 이름은 불1004입니다.]
곧바로 상훈의 머리 위에 ‘불1004’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났다.
‘지난 번에는 어둠이더니 이번에는 불이냐?’
그래도 이번에는 뒤에 1004가 붙었다. 랜덤으로 만들어진 것치고는 괜찮은 숫자였다.
[원하시는 무기를 선택해 주세요.]
“양손 망치.”
상훈은 무슨 무기를 들던 전투력에는 별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무기에 따라 공격 형태가 달라지는 건 있었다. 괴수들을 사냥하는 거라면 양손 망치가 제법 위력적이었다.
스스.
상훈의 손에 붉게 타오르는 듯한 빛깔의 커다란 양손 망치가 나타났다.
‘이것도 간만이네.’
상훈은 양손망치를 번쩍 쳐들었다 한쪽 어깨에 걸쳤다.
[잠시 후 당신은 1차 전장인 생존의 탑에 진입합니다.]
[1차 전장에서는 괴수를 처치해도 경험치를 얻을 수 없지만, 어비스 포인트 및 아이템 획득은 가능합니다.]
[드롭 아이템은 무작위로 파티원 중 하나의 아공간에 들어가며, 아공간에 들어간 아이템은 어비스를 나가서만 꺼낼 수 있습니다. 초월 등급 이상의 아이템은 주사위를 통해 가장 높은 숫자가 나온 자가 획득합니다.]
[괴수 처치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한 자가 가장 많은 포인트를 얻게 되며, 각 층을 돌파할 때마다 파티원 전원 보너스 포인트를 얻게 됩니다.]
[생존의 탑 1층에 진입했습니다.]
그와 함께 주변의 정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파티가 구성되었습니다.]
[불1004가 파티에 합류했습니다.]
[바람0986이 파티에 합류했습니다.]
[물2245가 파티에 합류했습니다.]
[땅4572가 파티에 합류했습니다.]
[물0344가 파티에 합류했습니다.]
[1층의 모든 괴수를 처치하십시오.]
[파티원 전원 생존해야 하며, 파티원 중 1명이라도 사망시 임무는 실패하게 됩니다]
스스스스.
그와 함께 거대한 원형의 광장과 같은 곳이 나타났다.
몸체의 길이가 수십미터는 됨직한 에인션트 드래곤!
전신에서 폭풍같은 마기를 뿜어내는 마왕!
두 눈에서 가공스러운 죽음의 기운을 뿜어내는 언데드 그랜드 마스터 군단까지!
그야말로 온갖 잡스러운 몬스터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뭐냐? 장난 하는 것도 아니고.’
상훈은 왠지 어이가 없었다.
‘그 흔한 혼돈의 괴수급도 없군.’
아무리 1층이라고 해도 이런 걸 임무라고 내놓은 것인가?
그런데 생각해보니 초급 수준의 초월자 파티에서는 이 정도 몹들만 해도 만만치 않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설령 최상급 초월자들의 파티라 해도 고작 다섯 명으로는 혼돈의 괴수를 처치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 중 궁극의 초월자급 이상의 존재가 하나라도 끼어 있다면 모를까 말이다.
‘귀찮으니 빨리 끝내자.’
파티원 전원 생존 조건이 아니면, 파티원들이 몹에게 다 죽기를 기다렸다가 혼자서 마무리를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함인지 파티원 전원 생존이 임무 조건에 달려 있었다. 이렇게 되면 임무 달성을 위해서라도 파티원들간 협동이 중요해질 것이다. 서로 죽지 않게 보호도 해줘야 하고 말이다.
콰앙!
상훈이 양손 망치를 바닥에 쿵 내리찍었다. 순간 그곳을 중심으로 지상에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끅!”
“꾸엑!”
“쿠어어억!”
어딘가에서는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는 녀석들일지 모르지만, 불행하게도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상훈의 지면 강타 한 방에 1층에 있던 모든 몹들이 그대로 먼지로 변해버렸다.
[1포인트를 얻었습니다.]
[1포인트를 얻었습니다.]
[1포인트를 얻었습니다.]
······
[하급 차원석을 얻었습니다.]
[274,339루나를 얻었습니다.]
[에인션트 드래곤의 심장(신화)을 얻었습니다.]
[238,335루나를 얻었습니다.]
[마검 자라카드(신화)를 얻었습니다.]
······
어비스 포인트가 무더기로 들어왔다. 각 몹마다 주는 포인트는 고작 1뿐이었지만 그래도 합치니 421포인트나 되었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421마리의 몹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작위로 아공간에 입고되는 드롭 아이템들은 그야말로 허접한 잡템들.
“뭐, 뭐냐?”
“혼자 다 처치하다니!”
“제길! 치사한 녀석!”
“혼자 독식하는 거냐?
그러자 파티원들이 펄쩍 뛰며 투덜거렸다. 아마 초월자들이 아닌 다른 파티라면 상훈이 혼자서 적을 싹 쓸었다고 좋아할지도 모르지만, 여기서는 얘기가 달랐다. 어지간한 초월자라면 혼자서도 1층 싹쓸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다는 말도 모르나 보군. 뭐든 동작이 빨라야 되는 거야.”
상훈은 양손 망치를 어깨에 걸치며 씩 웃었다.
[생존의 탑 1층의 임무가 완수되었습니다.]
[파티원 전원에게 보상으로 100포인트가 주어집니다.]
이로써 상훈의 어비스 포인트는 521.
1층이다 보니 포인트 보상도 상당히 짠 편이었다.
[파티가 해체되었습니다.]
[생존의 탑 2층으로 진입합니다.]
스스스.
[파티가 구성되었습니다.]
[불1004가 파티에 합류했습니다.]
[땅4572가 파티에 합류했습니다.]
[바람0986이 파티에 합류했습니다.]
[물1123이 파티에 합류했습니다.]
[불0937이 파티에 합류했습니다.]
[2층의 모든 괴수를 처치하십시오.]
[파티원 전원 생존하여 하며, 파티원 중 1명이라도 사망시 임무는 실패하게 됩니다.]
콰아앙!
상훈은 생존의 탑 2층의 전장이 나타나자마자 볼 것도 없다는 듯 망치로 지면을 강타했다.
[2포인트를 얻었습니다.]
[2포인트를 얻었습니다.]
[2포인트를 얻었습니다
······
[중급 차원석을 얻었습니다.]
[432,882루나를 얻었습니다.]
[초특급 회복 포션을 얻었습니다.]
[426,093루나를 얻었습니다.]
[마룡의 스태프(신화)를 얻었습니다.]
[불사의 갑옷(신화)을 얻었습니다.]
······
어비스 포인트와 잡템들. 그래도 2층은 각 몹마다 2포인트씩 주다보니 무려 1,732나 되었다. 1층에 비해 몹들의 수준은 비슷한데 숫자만 두 배 정도 늘어난 것이다.
“제기랄! 불1004 진짜 너무하는 것 아니냐?”
“으득! 저 망치 든 놈이랑 또 파티에 걸리다니!”
그러고 보니 땅4572와 바람0986은 방금 전 1층에서 같이 파티를 했던 녀석들이었다. 무작위로 매칭되는 파티에서 그들은 또 다시 몹 한 번 못잡아보고 상훈이 포인트를 독식하는 걸 지켜봐야 했으니 울화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불0937은 처음 당해보는 상황에 황당해하는 듯했다.
반면에 물1123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냥 덤덤한 기색이랄까?
그는 포인트 획득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불1004 이름을 달고 있는 상훈을 향해 호기심어린 눈빛만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상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특이한 녀석이네. 아이템은 관심없다 쳐도 포인트는 필요할텐데.’
그래서 상훈도 잽싸게 선방을 날린 것이었다. 단 1포인트라도 더 챙기기 위해서 말이다.
‘혹시?’
상훈은 문득 한 가지 짚이는 바가 있어서 슬쩍 물1123에게 접근해 나직이 외쳐보았다.
“마녀.”
그러자 물1123이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는 곧바로 뭐라고 대답하려고 했지만, 그 사이 전장이 종료되어 주변의 정경이 변해버렸다.
[생존의 탑 2층의 임무가 완수되었습니다.]
[파티원 전원에게 보상으로 200포인트가 주어집니다.]
이로써 상훈의 어비스 포인트는 도합 2,453.
아직까지는 별로 많지 않지만 층이 올라갈수록 포인트 보상은 많아질 것이다.
[파티가 해체되었습니다.]
[생존의 탑 3층으로 진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