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안 되는 것도 되게 만드는 능력 (2)
혼돈의 마녀 휘하 일곱 시종.
그녀들의 이름은 따로 없이 그냥 시종이었다.
그러나 일곱 시종들은 서로를 구별하기 위해 각각의 시종 뒤에 숫자를 붙였다.
그 중 현재 10혼돈계 중립 행성에서 상훈을 두려워해 숨어 있는 이는 시종7이었다.
(시종7) 나 10혼돈계 중립 행성에 갇힘. 여기서 나가면 그놈에게 죽을 듯.
그녀는 중립 행성의 도시에 위치한 여관방 하나를 잡은 후 아공간에서 하나의 마도구를 꺼내 다른 시종들에게 톡을 전했다.
스마트폰과 비슷하게 생긴 이 마도구는 혼돈의 마녀가 시종들에게 준 것으로, 이 안에 깔려있는 ‘혼돈단톡’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어비스를 제외한 혼돈계 어디서든 서로간의 소통이 가능했다.
(시종3) 그놈이 그렇게 쎄?
가장 먼저 시종3이 반응했다.
(시종7) 그놈은 중립 행성에서도 차원력을 끌어올렸어.
(시종3) 말도 안 돼. 그건 버그인데?
(시종4) 잘못봤을 거야.
(시종1) 겁먹지 마. 중립 행성에서는 차원력을 억지로 끌어올려도 누군가를 죽일 수 없어. 그랬다간 본인이 먼저 죽게 돼.
(시종7) 정말이야?
(시종1) 응.
(시종7) 그럼 괜히 도망쳤네.
(시종1) 일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분하게 설명해 봐.
시종7은 침울한 표정으로 자신이 겪은 일을 톡으로 자세히 전했다. 그러자 다른 시종들이 한동안 충격을 받았는지 침묵했다.
(시종4) 처음엔 비등했는데 갑자기 강해졌다? 그럼 한계를 돌파했다는 뜻이네.
(시종5) 무서운 녀석이군.
(시종7) 우리 중 누구도 혼자서는 그놈을 절대 못이겨.
(시종6) 큰일이네. 우린 지금 모두 떨어져있잖아.
(시종3) 각개격파 당하면 어쩌지?
모두들 혼란에 빠졌다. 그러자 시종1이 상황을 정리했다.
(시종1) 모두들 진정해. 혼돈의 마녀님께 보고했으니 기다려봐.
시종1은 특별히 전투력이 더 뛰어난 건 아니지만 비교적 상황 판단이 빠르고 침착한 편이라 시종들의 리더였다. 혼돈의 마녀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기도 했다.
오직 그녀만이 직접 혼돈의 마녀와 1대1 톡이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은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했으니.
[혼돈의 마녀님이 혼돈단톡방에 입장했습니다.]
순간 시종들이 조용해졌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모두들 잔뜩 긴장하고 있을 것이다. 시종들의 단톡방에 혼돈의 마녀가 직접 들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혼돈의 마녀) 시종1에게 모든 상황을 보고들었다. 그놈이 무슨 수로 그리 빨리 강해졌는지 모르겠다만, 지금 이대로 그놈과 붙으면 너희는 죽는다. 다들 경거망동하지 말고 내 지시를 따르도록 해라.
(시종1) 네.
(시종2) 네.
······
시종들이 모두 공손히 대답했다.
(혼돈의 마녀) 이제 너희들은 각자가 위치한 곳에서 최대한 전투력을 상승시켜야 한다. 너희들은 일반 초월자들과 달리 혼돈의 괴수들을 처치해도 강해질 수 없는 몸이나, 장비를 강화하면 전투력을 최대한 높일 수 있다.
뜻밖에도 강화를 하라는 말이었다.
(시종1) 그럼 장비와 강화석은 어디에서 구해야 되나요?
시종1이 조심스레 물었다.
(혼돈의 마녀) 이럴 때를 대비해 각 혼돈계의 중립 행성마다 비밀 창고들을 만들어 두었다. 그 창고 안에는 극초월 등급의 장비들과 불완전한 혼돈의 강화석 200개, 그리고 차원석들이 대량으로 들어 있다. 창고의 비밀번호는 각 중립 행성의 코드 뒤에 ghsehsaksu를 붙이면 된다.
(시종1) 알겠습니다.
(시종2) 네.
(시종3) 네.
······
혼돈의 마녀는 잠시 침묵했다가 톡을 이었다.
(혼돈의 마녀)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비스 강화사와의 친밀도를 높이는 친밀도 아이템은 없다. 장비와 강화석은 강화실패시 장비가 파괴될 것을 대비해 넉넉히 준비해뒀지만, 그래도 친밀도가 낮으면 고강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시종1) 친밀도 아이템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나요?
(혼돈의 마녀) 퀘스트 행성의 히든 퀘스트를 수행하거나, 각 행성의 암거래상, 혹은 고대물품 상인들을 찾아가보면 얻을 수 있다.
(시종1) 아, 그렇군요.
(혼돈의 마녀) 조급하게 굴지말고 차분히 친밀도를 올려 강화 확률을 높여라. 그 후에 무기와 방어구 모두 강화 단계를 높여나가면 놈을 충분히 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시종1) 알겠습니다.
(시종2) 네.
······
[혼돈의 마녀님이 혼돈단톡방에서 나갔습니다.]
혼돈의 마녀가 나가자 혼돈의 시종들도 그 즉시 톡을 닫았다. 그리고는 각 중립 행성의 비밀 창고 관리인을 향해 이동했다.
시종7도 마찬가지였다.
“물건을 찾으러 온 건가?”
제 10혼돈계 중립 행성 C10092 행성의 비밀 창고 관리인.
그는 칙칙한 흑색의 철가면을 쓰고 있는 거대한 체구의 오우거였다.
“그래.”
시종7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지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검은 후드를 눌러쓰고 있었고, 혼돈의 시종으로서의 기세도 팍 줄인터라 평범한 중립 행성의 각성자처럼 보였다.
그러자 오우거가 비릿하게 웃더니 건물 탁자 위에 있는 자판을 가리켰다.
“보관료는 준비해왔겠지? 일단 거기에 비밀번호를 입력해라.”
시종7은 주저없이 혼돈의 마녀가 알려준대로 ‘C10092ghsehsaksu’를 입력했다.
그러자 창고 관리 오우거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오! 이미 선불로 영구 이용 보관료가 지불되어 있다니! 따로 보관료는 내지 않아도 되겠군.”
오우거는 급격히 친절해졌다. 곧바로 그는 큼직한 상자 하나를 꺼내 가져왔다. 그 상자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오우거도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비밀번호와 일치한 자에게 물건을 내주는 일만 할 뿐이니까.
슥.
시종7은 말없이 상자를 들고 여관으로 돌아와 그것을 열어봤다.
아공간으로 확장되어 있는 상자에는 많은 아이템들이 들어 있었다.
암흑화룡검(극초월) 10개
초마룡전신갑(극초월) 10개
불완전한 혼돈의 강화석 200개
상급 차원석 3,000개
10억 루나 전표 스크롤
시종7은 그것을 보며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무기인 암흑화룡검과 방어구인 초마룡전신갑을 잘 강화하기만 하면 전투력을 대폭 증가시킬 수 있을 테니까.
* * *
“세상에 안 되는 일이란 없어. 넌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야, 하넬.”
바로 그때가 막 상훈이 강화를 마치고 하넬에게 혼돈의 시종을 추방해달라고 요구한 때였다.
[격려 1단계가 발동됩니다.]
하넬은 감동하면서도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군주께서 그렇게 저를 믿어주시니 어떻게든 그렇게 하고 싶지만, 저의 힘으로는 불가능해요. 혼돈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라 그 시도 자체만으로도 즉시 저는 죽게 된다고요.”
[하넬과의 친밀도가 100하락했습니다.]
[누적친밀도 2701]
이런! 친밀도가 100이나 하락해버렸다. 하넬은 상심했는지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상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혼돈의 시종이 추방되면 좋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니 어쩔 수 없는 일. 안 되는 걸 무조건 되게 하라고 했다간 하넬이 결국 크게 절망할테고, 이러다 친밀도가 더욱 많이 하락할 우려도 있었다.
“무리한 부탁이었나 보군. 더 이상 신경쓰지마라. 강화만으로도 넌 충분히 내게 도움이 되었어.”
상훈은 다른 식의 격려를 해주었다. 그러자 침울했던 하넬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정말인가요?”
“물론이야. 무리한 부탁을 해서 미안하군.”
[하넬과의 친밀도가 1 상승했습니다.]
[누적친밀도 2702]
사과까지 하자 친밀도가 1 올랐다.
떨어질 때는 무려 100이나 하락해놓고, 오를 때는 고작 1이라니!
그러나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 것이 어디인가.
다행히 덕분에 하넬은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상훈을 향해 다시 무척이나 호의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록 하락했다지만 2702의 친밀도는 결코 낮은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고 보니 추방은 힘들지만 다른 식으로 군주께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그게 뭔데?”
“중립 행성에서 혼돈의 시종이 있는 위치 정도는 제가 알려드릴 수 있거든요. 그리고······.”
하넬은 잠시 주저하는 듯하다가 이내 결연한 눈빛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건 정말 말하면 안 되는 거지만, 제게 주신 군주님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한 가지 비밀을 알려드릴게요.”
“잠깐! 꼭 이렇게 귀에 대고 말을 해야 되는 거야?”
귀에 속삭이듯 얘기하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하넬의 숨결도 느껴지고 말이다. 더구나 그녀는 게임에서나 있을 법한 초콜릿 엘프이자 복장도 상당히 민망한 차림을 하고 있으니까.
“그게 혹시라도 제가 이 말을 군주님께 했다는 게 알려지면 큰일이 나거든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큰소리로 얘기했다가 누구라도 이걸 듣게되면 저는 죽을 지도 몰라요.”
“그 정도야?”
상훈은 놀랐다. 대체 어떤 비밀이기에 하넬이 이토록 조심스러워하는 것일까?
“좋아. 말해봐. 무슨 비밀인데?”
상훈도 나직하게 물었다. 그러자 하넬이 다시 귓속말을 했다.
“혼돈의 시종도 저처럼 선물을 주면 친밀도를 올릴 수 있어요.”
“친밀도를 올려서 뭐하게?”
상훈은 혼돈의 시종을 그냥 내버려두자니 영 찜찜해서 죽여없애려고 하는 판이었다. 그런 적과 친밀도를 올려서 어쩌라는 건가?
“혼돈의 시종이 군주님과 저처럼 친밀해지면 여러 비밀스러운 얘기를 나누는 것도 가능해지겠죠. 어쩌면 군주님께 꽤 큰 도움이 되는 정보를 줄 수 있을 지도 몰라요. 혼돈의 시종은 혼돈의 마녀에 대해 꽤 많은 걸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고 보니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당장 죽일 수 없다면 구슬려서 뭔가 정보를 알아낸다?
다른 정보도 아니고 혼돈의 마녀에 대한 정보라면 상훈에게도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건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만약 혼돈의 시종과의 누적 친밀도를 20000까지 올리면 군주님의 동료나 부하로 만드는 것도 가능해요.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죠. 혼돈의 시종이 좋아할 만한 아이템은 극히 드물어서요.”
“그래?”
이는 뜻밖의 정보였다. 혼돈의 시종을 동료나 부하로 만들 수도 있다니!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물론 상훈은 혼돈의 시종을 동료나 부하로 만들만큼 공을 들일 생각은 없었다. 그냥 혼돈 시스템 세계의 최종 보스인 혼돈의 마녀에 대한 정보나 좀 알고자 할뿐이었다. 적을 알아두어야 나중에 상대하기 편할 테니까.
“근데 너 이런 건 말해도 괜찮은 거야? 혹시 혼돈을 거스렸다고 죽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자 하넬이 흠칫하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도 모르면 괜찮아요. 만약 제가 이 말을 했다는 소문이 퍼져 혼돈의 마녀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저는 그 즉시 죽고 말 거예요.”
그래서 귓속말을 한 것이었나 보다. 상훈은 미소 지었다.
“그건 염려 마. 내가 말을 안 하면 누구도 알지 못할 거야.”
“그럼 이건 저와 군주님만의 비밀이예요.”
“물론이지. 좋은 걸 알려줘서 고마워.”
“후훗, 저와 군주님이 어디 보통 사이인가요? 이 정도 도움이야 당연히 드려야죠.”
“그래. 우리 사이가 보통 사이는 아니지.”
누적 친밀도 2702의 사이니까!
“근데 내가 혼돈의 시종에 대한 친밀도 아이템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지? 설마 그 시종이 너처럼 내 손에 키스를 할리는 없을 테고 말이야.”
“어떻게든 그런 상황을 만들어야죠.”
“그러니까 내 손등을 억지로라도 시종의 입술에 잽싸게 부딪히라는 거군.”
“안 돼요. 키스는 혼돈의 시종이 스스로 하지 않으면 소용없어요.”
“무슨 수로?”
“그건 방법을 찾아봐야해요.”
그러던 하넬이 돌연 두 눈을 반짝였다.
“혼돈의 시종이 이곳으로 오고 있어요. 나를 찾아오고 있는 게 분명해요.”
“호랑이도 제말 하면 온다더니 여긴 웬일이지?”
“일단 군주께서는 잠시 저 반대쪽 결계에 들어가 계세요.”
어비스 강화 결계의 반대쪽에 있는 또 하나의 결계였다.
“저 결계는 왜?”
“거기 있으면 혼돈의 시종도 군주님이 그곳에 있는지 알지 못해요. 그러나 군주님은 저와 혼돈의 시종을 볼 수 있고 대화도 들을 수 있죠.”
“혼돈의 시종이 여기까지 내려오려 할까? 여긴 강화하는 곳인데.”
“혼돈의 시종이 저를 찾아오는 이유는 틀림없이 강화 때문일 거예요. 어비스의 강화사인 저를 찾아오는 거죠. 그 외에 날 찾아올 이유는 없어요.”
“혼돈의 시종이 강화를? 그렇게라도 전투력을 올려보겠다는 건가?”
“어서 들어가계세요. 물론 이건 오직 군주님이니까 가능한 일이에요. 저와 군주님은 서로 비밀이 없는 사이잖아요.”
2702의 친밀도면 서로 비밀이 없는 사이인 건가? 역시나 하넬의 친밀도를 대폭 올려둔 보람이 있었다.
“좋아. 나는 저쪽에서 지켜보고 있겠다.”
상훈은 즉시 결계로 들어갔다. 그러자 잠시 후 하넬이 차가우면서도 도도한 인상의 소녀를 데리고 나타났다. 시종7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