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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또 하나의 장벽을 깨부수다 (2) (6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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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장벽을 깨부수다 (2)

소녀는 상훈을 보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상훈은 그녀를 쫓아가려다 문득 생각을 바꾸었다.

‘잠깐! 여기서는 어차피 쫓아봤자 죽이지 못해.’

방법을 바꿔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중립 행성 바깥으로 끌어내야 잡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상훈은 짐짓 자신도 큰 부상을 당한 것처럼 비틀거렸다.

‘좀 약한 척 보여야 다시 내게 덤비겠지.’

그렇지 않으면 소녀가 겁을 먹고 중립 행성에만 웅크리고 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소녀가 왠지 전투력은 강하지만 단순해 보여서 펼친 연기였는데, 그건 상훈의 착각이었다.

소녀는 마치 상훈이 자신을 바깥으로 끌어내서 죽이려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더욱 긴장하는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포탈로 이동한 게 아니라 이곳 중립 행성의 도시 깊숙이 도망쳐버린 것이다.

‘윽! 안 통하네.’

그러고 보니 혼돈의 시종 소녀는 생각보다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강했다. 그런 생존 본능이 상훈이 그녀를 속이려하는 걸 눈치채게 만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한동안 여기서 웅크리고 나오지 않겠군.’

상훈이 작정하고 끌어내려고 한다는 걸 눈치챈 이상 더더욱 소녀는 이 중립 행성안으로 꽁꽁 숨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본래 있던 2혼돈계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러려면 1혼돈계의 중립 행성을 거쳐야 하는데 현재 그곳 중앙 포탈이 상훈의 지시에 의해 봉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현재 3개의 혼돈계가 연결되어 있지만, 그것은 각각 1혼돈계와 연결된 것이지, 2혼돈계와 10혼돈계가 서로 연결된 것은 아니었다.

‘골치아프게 됐네. 강제로 끌어낼 수도 없고.’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골치 아플 것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혼돈의 시종 소녀는 영원히 이곳 중립 행성에 숨어 나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훈이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혹시라도 중립 지역을 벗어나는 순간 상훈이 나타나지 않을까 두려워해 나오지 않을 테니까.

‘일단 놔두고 지켜봐야겠어.’

그때 은빛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여성 엘프 하나가 나타나 상훈 앞에 예를 취했다.

“거점 관리자 하넬, 위대하신 제 1혼돈계의 군주 전상훈님을 알현합니다. 군주께서 이곳 제 10혼돈계 중립 행성을 방문해주시다니 실로 영광입니다.”

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 행성의 거점 관리자를 만날 생각이었는데 잘되었다.

“난 제 10혼돈계 거점 행성들의 공간 좌표가 기록되어 있는 두루마리 지도가 필요하다. 상급 차원석 3개면 되겠지?”

이미 아르나와 거래를 해봤던 터라 상훈은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하넬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저희는 중립적인 존재라 누구에게든 좌표를 알려드릴 수 있어요. 상급 차원석만 주신다면 말이죠.”

“상급 차원석 여기 있어.”

“그럼 잠깐만 기다리세요. 두루마리를 소환하겠어요.”

아르나가 단정하며 늘씬한 전형적인 엘프 스타일이라면, 하넬은 아르나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완벽하게 글래머러스한 몸매였다.

피부도 아르나는 백색인데 반해 하넬은 은은하게 반짝이는 흑갈색이었다. 뭔가를 발라서 반짝이는게 아니라 피부 자체가 원래 그렇다는 거다.

‘말로만 듣던 초콜릿 엘프인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마치 게임의 커스터마이징 속에서나 등장하는 엘프. 거기에 가히 비키니를 연상케하는 과감한 노출도를 자랑하고 있었으니.

‘여기가 해변이냐?’

하긴 게임적인 요소가 매우 많은 혼돈 시스템의 세계이니 뭐가 나오든 이상할 것도 없었다. 어쨌든 예쁜 걸로 치면 아르나지만, 뭔가 매력적인 것은 하넬이었다.

“여기 두루마리를 받으세요, 군주님.”

“좋아.”

상훈은 하넬이 내민 황금빛 두루마리를 받았다. 상훈이 그것을 펼쳐 보자 하넬이 나직이 탄식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제 궁전 청소를 해놔야겠죠?”

“무슨 소리야?”

“제 10혼돈계의 주인이신 라인카스님이 쓰시던 궁전의 주인이 오늘 바뀔 것 같아서요.”

하넬은 상훈이 제 10혼돈계의 주인이 될 것임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이곳 중립 행성에도 제 1혼돈계의 중립 행성처럼 궁전이 두 개 있다. 하나는 거점 관리자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군주를 위한 것.

그러자 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가 빠르군. 곧 내가 주인이 될테니 청소를 잘해놔.”

“사실 청소는 거의 할 것도 없어요. 그간 라인카스님은 메인 거점 행성의 군황성에만 머무를 뿐 이곳에는 거의 오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기분이라는 게 있잖아. 구석구석 깨끗이 청소해.”

“네, 그러죠.”

상훈은 이미 하넬을 집사 취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넬도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럼 이제 가볼까?’

상훈은 라인카스가 있는 제 10혼돈계 메인 거점 행성의 공간 좌표를 이용해 직접 포탈을 만들었다. 그는 아직 10혼돈계의 주인이 아니니 포탈 관리자를 통해 이동하면 차원석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츠으읏!

상훈은 잠시 후 제 10혼돈계 C10001 행성 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미 1000여명의 초월자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상훈이 중립 행성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라인카스의 부하 초월자가 즉시 이곳으로 이동해 사실을 알렸기 때문이다.

“군주 전상훈! 설마했지만 혼자 온 것인가?”

1000여 명의 초월자들을 이끌고 있는 군주 라인카스.

그는 상훈이 혼자 중립 행성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만 해도 그럴 리가 없다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혼자 나타나자 황당하기 이를데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군요.”

“스스로 페르틸라를 바치러 온 것이 분명합니다, 로드.”

“전쟁이 아니라 항복하러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인카스뿐 아니라 그의 부하들의 표정이 무척이나 여유로워졌다. 라인카스가 오연한 눈빛으로 상훈을 노려봤다.

“말해보아라. 너는 내게 페르틸라를 바치러 온 것인가? 정말로 그런 것이라면 기특히 여겨 너를 살려줄 뿐만 아니라 크게 중용하도록 하지.”

그러자 상훈이 차갑게 웃었다.

“한심하군. 네 부하들은 다 허접해서 그렇다 치더라도 군주인 너조차 상황 파악이 그렇게 안 되는 건가?”

“상황 파악이라니! 설마 너 혼자서 우리를 다 이길 수 있다 생각하는 거냐?”

순간 상훈이 아공간에서 게로드의 검(+3)을 꺼냈다. 이런 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냥 결과로서 보여주면 되는 일.

번쩍!

그의 검에서 붉은 검광이 퍼져나가는 순간 모든 것이 그대로 정지해버렸다.

‘으으!’

‘어, 어떻게 된 일인가.’

물론 시간이 정지된 것이 아니었다. 라이칸스를 비롯한 그의 부하들의 육체가 석화되듯 모조리 굳어버린 것이다.

“라인카스, 네놈은 지구를 공격해 멸망시키려한 켈라크스들의 두목 중 하나다. 그간 온갖 나쁜 짓을 다했겠지만 모든 걸 떠나서 지구에 한 짓 하나만으로도 넌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

일일이 죄목을 열거하고 대상이 왜 죽어야 하는지 말한 후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인다.

그것이 예전 상훈의 방식이었지만, 지금은 그것도 귀찮았다. 혼돈 시스템으로 라트로들이 무더기로 몰려듬에 따라 죽일 놈들이 한둘이 아닌데 매번 그렇게 하려면 얼마나 번거롭겠는가.

콰콰콰콱-

“자, 잠깐! 크, 크으으윽!”

라인카스는 상훈이 알 수 없는 기운을 자신의 체내에 심은 것에 경악했다.

궁극의 초월자였던 그조차 저항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기운!

그런데 그 기운이 이내 섬뜩한 원형의 톱날로 변하더니 그대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

“크아아아아아아악!”

라인카스는 처참히 찢겨죽었다. 상훈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손을 슥 내밀었다.

슥.

그의 손에는 신비하게 반짝이는 물건이 쥐여져 있었다.

라인카스가 죽자 그의 아공간이 찢어지며 튀어나온 혼돈의 기물(奇物).

다름아닌 생존의 페르틸라였다.

이로써 상훈은 4개의 페르틸라를 가진 주인이 되었다.

[제 1혼돈계의 군주 전상훈이 제 10혼돈계의 군주 라인카스를 죽였습니다.]

[전상훈이 생존의 페르틸라를 획득했습니다.]

이런 건 알림방지권과는 관계가 없는 듯 온 혼돈계로 다 울려퍼지는 모양이었다.

[상급 차원석 3,282개를 얻었습니다.]

[중급 차원석 62,874개를 얻었습니다.]

······

라인카스의 아공간에서 차원석은 물론 온갖 초월 등급의 장비들이 무더기로 쏟아져나왔다. 물론 그 즉시 상훈의 아공간으로 입고 되었다.

‘라트로들의 두목답게 차원석을 많이도 가지고 있군.’

이는 새로 라인카스의 부하가 된 이들이 그에게 잘보이려고 차원석과 장비들을 대거 상납한 것들이었는데, 그것들이 고스란히 상훈의 아공간으로 들어온 것이다.

한편 그렇게 상훈이 라인카스를 처치하자 그의 부하 초월자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두들 굳어진 상태라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로드가 저렇게 죽다니 믿을 수 없구나.’

‘으으! 궁극의 초월자인 라인카스님이 대항도 못해보고 죽다니!’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몸을 움직일 수 있다면 엎드려 빌기라도 하겠지만, 그조차도 불가능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라트로 로카니아스!”

상훈이 웬 아름다운 여자 초월자 앞에 섰다. 그녀는 거점 관리자 하넬 못지 않게 요염하면서도 뇌쇄적인 미모를 가진 초월자였는데, 그 아름다운 미모 안에 감춰진 악마의 본능으로 지구와 같은 세계를 무려 여섯 개나 멸망시켜버렸다.

“여기서 널 만나게 될 줄 몰랐군.”

어차피 거의 다 죽여야 할 녀석들이지만 당장은 노예로 써먹기 위해 살려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본보기로 한둘 죽일 필요가 있었다.

“로카니아스! 널 죽이고 싶어하는 라트로 헌터들이 무척 많았지. 결국 넌 내 손에 죽는구나.”

“으윽! 자, 잠깐! 사, 살려줘! 끄아아아아아악!”

로카니아스 또한 처참하게 죽었다. 그러자 1000여 명의 초월자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사, 살려주십시오!”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제발 기회를 주십시오.”

언제 경직이 풀렸는지 그들은 움직일 수 있었다. 그들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납작 엎드려 자비를 구했다.

“너희들은 나와의 전쟁에서 패배했고 이제 나의 전리품이자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나는 너희를 살려둘지 말지는 결정하지 않았다. 살고 싶다면 최대한 빨리 이곳 혼돈계의 행성들을 점령해라. 너희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 중립 행성의 각성자들을 고용해야 할 것이다.”

“마, 맡겨주십시오, 로드시여.”

“로드께서 최대한 빨리 행성을 점령하실 수 있게 하겠습니다.”

상훈은 싸늘히 말을 이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너희들의 몸에는 노예의 증표가 있다. 허튼 생각을 하는 녀석들은 라인카스와 같은 꼴이 될 것임을 잊지마라.”

“며, 명심하겠습니다.”

초월자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상훈이 말한대로 10혼돈계의 퀘스트들을 해결하러 간 것이다.

[당신은 제 10혼돈계의 메인 거점 행성인 C10001행성을 점령했습니다.]

이로써 상훈은 제 1혼돈계의 군주에 이어 10혼돈계의 군주도 되었다. 그는 메인 거점을 점령하자마자 거점 관리자로 아크엘을 임명했다.

-아크엘, 이곳 거점의 메인 행성도 네가 관리 가능하겠지?

-후후, 물론입니다. 제가 거점 관리자로 임명이 되면 멀리 있어도 그곳에 있는 것처럼 관리가 가능하니 맡겨주십시오.

-좋아. 그리고 지금 즉시 다카룬과 노예 초월자들을 10혼돈계로 보내서 퀘스트 해결에 합류하라고 해. 아르나에게는 그들을 보낸 후 다시 포탈을 봉쇄하라고 하고.

-예, 로드. 제 10혼돈계의 군주가 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로드께서 혼돈계를 통일할 날이 머지않았군요.

대현자 아크엘은 신이 나 있었다. 그리고 그 누가봐도 골칫아픈 거점 관리자로서의 임무를 그는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그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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