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혼돈계 침공 (1)
[혈무혼이 혼돈의 괴수를 처치하고 불완전한 혼돈석을 얻었습니다.]
제 2혼돈계 C2096 행성.
짙은 흑색의 장발을 흩날리는 강인한 인상의 사내.
혈무혼은 자신 앞에 널브러진 혼돈의 괴수의 사체를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크하하하! 불완전한 혼돈석이라! 드디어 이것을 얻었군.”
그는 제 2혼돈계 10개 행성에 존재하던 혼돈의 괴수 10마리를 모두 처치했다. 그런데 마지막 괴수를 처치하자 불완전한 혼돈석을 얻은 것이다.
10마리를 처치하면서 그는 대폭 강해졌다.
오래도록 정체되어 있던 경지의 상승이 이루어진 것이다.
“조금만 더 오르면 혼돈자의 경지에 이를 줄 알았더니 내 착각이었다. 극초월의 경지란 것도 그 끝이 없는 것 같으니 말이야.”
초월자의 궁극에 이르러 하나의 벽만 돌파하면 혼돈자가 될 거라 생각한 건 우물안의 개구리같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 혼돈의 괴수란 놈을 처치해야 강해질 수 있는데 고작 10마리 뿐이 없으니 문제로군. 이대로라면 이곳 2혼돈계에서는 이제 더 이상 강해질 수 없다는 얘기인가?”
극초월의 경지에서 이런 식으로 강해지는 건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것이 쉬운 일이었으면 그가 아주 오랜 세월 정체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방법은 하나 뿐이다.”
어비스 상점에서 파는 혼돈의 괴수 소환권을 계속 사서 혼돈의 괴수를 처치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 하나에 무려 5000포인트나 한다는 것!
‘지난 번에는 포인트가 없어 랜덤 상자나 돌렸지만 다음에는 최소한 5000포인트를 어떻게든 모아서 그걸 사야 한다.’
그 생각을 하자 문득 혈무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고 보니 어비스 최후의 우승자 놈이 그 대량의 포인트로 혼돈의 괴수 소환권을 샀을 수도 있겠군.’
그렇게 소환한 괴수들을 모두 처치했다면?
그렇지 않아도 최강이었던 자가 더 넘볼 수 없는 경지로 올라섰을 것이다.
‘그놈이 있는한 2차 전장에서 승리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혈무혼은 자신이 다시 그를 만나도 이길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분하지만 다시 어비스가 열리면 1차 전장에서 최대한 포인트를 얻고 2차 전장은 포기해야 한다.’
2차 전장에 가봤자 애써 모은 포인트만 털릴 가능성이 높았다.
혈무혼은 또 랜덤 상자를 돌려서 나온 참치 삼각김밥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맛이 매우 좋아 계속 생각나는 음식이긴 하지만, 지금은 강해지는 것이 중요하지 음식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러다 어비스 최강자와 현실에서 마주치는 순간.
혈무혼은 어쩌면 바로 그때가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삶의 종지부를 찍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지금으로서는 각 혼돈계가 뚫려 있지 않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로구나.’
한 혼돈계의 모든 거점 행성을 장악해야 다른 혼돈계로 이동할 수 있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답답하게 느껴졌던 그 번거로운 절차가 지금은 어비스 최강자로부터 그를 지켜주는 일종의 보호막이 된 셈이었다.
‘그나저나 고민이로군. 이걸 어디다 쓴다?’
혈무혼은 불완전한 혼돈석의 용도에 대해 고민 중이었다.
[C2096행성에서는 극초월 등급의 거신병인 혼돈의 가디언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생산 가능 혼돈의 가디언 0/1]
[필요 자원 : 불완전한 혼돈석 1개, 상급 차원석 1000개]
[제작 기간 : 4,320시간]
그동안 혼돈의 괴수를 처치했던 행성에서 항상 보던 내용이었지만, 불완전한 혼돈석이 없어서 혼돈의 가디언 제작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상급 차원석이야 전설의 라트로였던 그에게는 남아돌 정도로 많으니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는 즉시 중립 행성 C2099로 향했다.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육 개월 후에 과연 내가 살아있을지도 알 수 없는데 가디언이 그때 완성되어봤자 무슨 소용인가?’
하나 뿐인 불완전한 혼돈석을 쓰는 용도.
그가 결정한 것은 강화였다.
그는 즉시 거점 관리자의 궁전을 찾아가 접견을 신청했다.
“거점 관리자 좀 만나러 왔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잠시 후 그는 접견실로 안내되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혈마혼님? 바쁘니 용건만 간단히 말씀해 주십시오.”
C2099 중립 행성의 거점 관리자는 금테 안경을 쓴 엘프 청년 하둔이었다. 그는 혈무혼에게 보통의 초월자들에 비해서는 다소 정중하게 대했지만, 그래봤자 매우 사무적인 태도였다.
“이 불완전한 혼돈석이 있으면 강화를 할 수 있다고 해서 왔다.”
이는 혈무혼의 부하 초월자들이 알아낸 정보들이었다.
2혼돈계 중립 행성으로 들어온 초월자들의 대부분이 그의 부하가 되었고, 그들은 지금 중립 행성의 각성자들을 고용해 퀘스트 행성들의 문제를 해결 중이었다.
또한 그들은 수시로 거점 관리자 및 행성의 하급 관리자들에게 접근해 여러 정보를 알아오기도 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거점 관리자에게 가면 극초월 장비를 강화해 장비의 위력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바로 불완전한 혼돈석이라는 것이군요.”
거점 관리자 하둔의 두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그는 급격히 밝아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하하, 정말 잘 찾아오셨습니다. 극초월 장비는 이곳 2혼돈계에서 오직 어비스의 강화사인 저만 강화할 수 있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안내해라.”
혈무혼은 뭔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하둔을 따라갔다.
‘저 녀석이 내게 이렇게 상냥한 태도를 보이는 건 처음이로군.’
그가 초월자들을 모두 부하로 들여 사실상 제 2혼돈계의 지배자가 되었음에도 하둔은 평범한 초월자보다 약간 더 대우해주는 정도일 뿐 한 번도 지금처럼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불완전한 혼돈석을 위한 강화는 하둔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일인 모양이었다.
“이곳입니다. 저 안 결계에서 강화를 할 수 있지요.”
“신기한 곳이군.”
“먼저 불완전한 혼돈석을 결계 안에 넣어 주시고 강화할 장비도 준비해 주십시오.”
“그러지.”
혈무혼은 아공간에서 하나의 검을 꺼냈다.
검신에 핏빛의 악마 문양이 새겨진 검!
극초월 장비인 혈마검(血魔劍)이었다.
그는 먼저 불완전한 혼돈석을 결계 안에 넣었다.
그러자 하둔은 차원석과 그것을 연금해 불완전한 혼돈의 강화석을 만들었다.
“강화 확률은 1강 80%, 2강 50%, 3강 20%, 그 이상은 모릅니다.”
“80%라고?”
“혹시라도 친밀도 아이템이 있으면 확률을 높일 수 있습니다.”
“친밀도 그건 또 뭐냐?”
하둔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친밀도란 아주 좋은 것입니다. 혈무혼님께서 제가 좋아하는 선물을 주시면 저와의 친밀도가 올라가고 그러면 제가 좀 더 잘해드릴 수······.”
“잠깐!”
순간 혈무혼이 인상을 확 구겼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친밀도가 어쩌고 하는 게 영 거슬렸는데 선물까지 달라고 하자 꺼림칙했던 것이다.
‘어쩐지 느끼하게 생겼다 했더니 그쪽이었던 건가?’
곧바로 그는 험상궂은 눈빛으로 말을 내뱉었다.
“대체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남자 녀석 따위와 친밀도를 올릴 생각 없다.”
“뭔가 오해를 하신 듯한데 저와 친밀도를 높여놓으면······.”
“귀가 먹었나 보군. 나는 너 따위 천박한 엘프 놈과 친밀도를 높일 생각은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게임에 대해 잘 모르는 혈무혼은 친밀도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 선물을 주고 친밀도를 올리는 건 여자에게라면 몰라도 남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혈무혼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저에게 천박한 엘프 놈이라고 말한 건 사과를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사과는 뭐 먹는 거냐?”
혈무혼은 사과 따위는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하둔의 표정이 극도로 사무적으로 변했다.
[하둔과의 친밀도가 10 하락했습니다.]
[혈무혼님의 하둔과의 누적친밀도는 –10입니다.]
애초부터 혈무혼과 하둔은 친밀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친밀도가 0 이라는 뜻.
거기서 친밀도가 하락하니 마이너스로 떨어진 것이었다.
“하여간 별 미친!”
혈무혼은 애초부터 하둔과 친밀도를 높일 생각이 없었기에 마이너스가 되었다한들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이런 건 대체 어떤 새끼들이 만들어놨는지 모르지만 제 정신이 아닌 놈들인 게 분명하다.’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 그는 어비스 강화사와의 친밀도가 마이너스가 되면 강화 확률이 대폭 하락하게 된다는 사실을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강화 확률은 1강 75%, 2강 45%, 3강 15%입니다. 이대로 진행해도 상관없으십니까?”
“뭐냐? 왜 갑자기 75%로 떨어진 것이냐?”
혈무혼은 움찔했다. 80%도 찜찜한 편인데 75%라니.
“불안하시면 이제라도 친밀도를 좀 올리시면······.”
하둔은 솔직히 더 이상 입 아프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강화사로서 강화를 꼭 성공시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여러모로 혈무혼이 못마땅해도 다시 설득해보고자 했다.
그러나 혈무혼은 친밀도라는 말에 다시 인상을 구기며 손을 휘휘 저었다.
“제기랄! 또 그 소리인가? 그 딴 거 필요없으니 어서 강화나 시작해라.”
“1강 실패시 장비는 보호되지만 강화석은 사라집니다. 실패해도 저의 책임이 아니니 나중에 원망하지 마십시오. 모든 건 혈무혼님의 운에 달려 있습니다.”
“알았으니 어서 해라.”
혈무혼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성공을 확신했다.
‘흐흐, 내가 운빨하면 또 어디 가서 뒤지지 않지.’
극초월 장비인 혈마검을 얻은 것이 대표적이었다. 운빨이 나쁘다면 그런 엄청난 기연은 얻지 못했을 테니까.
‘75%면 무조건 성공할 것이다.’
그렇게 그는 성공을 확신하며 결계를 바라봤다.
그러나 하둔이 그때 크게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후! 우려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군요.”
“무슨 소리냐?”
그 사이 결계 안에 있던 강화석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혈마검만 둥둥 떠 있을 뿐.
[강화에 실패했습니다.]
[불완전한 혼돈의 강화석이 사라졌습니다.]
혈마혼은 두 눈을 부릅떴다.
‘실패? 실패라고?’
어떻게 얻은 불완전한 혼돈의 강화석인가?
10마리나 되는 혼돈의 괴수를 해치우고 딱 하나 얻은 것이었다.
“······.”
혈무혼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다음에 불완전한 혼돈석이 생기면 또 저를 찾아주십시오.”
하둔 역시 기분이 좋지 않은 듯 표정을 굳히고 사라졌다.
* * *
제 1혼돈계 C1003 행성 절망의 절벽 중턱에 있는 동굴.
아래 위로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되어 있는 이곳은 어지간한 능력을 가진 이는 찾아오기 힘든 험지였다.
그러나 이 동굴에 바로 어비스의 대장장이 가일이 있었다.
“드디어 미늘창이 완성되었습니다.”
“수고 많았다, 가일.”
상훈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신비로운 푸르스름한 빛깔의 미늘창을 결계에서 꺼냈다
게로드의 검(+3)에 이어 또 하나의 극초월 무기인 가일의 미늘창을 얻는 순간이었다.
‘그럼 이제 또 다른 어비스 대장장이를 찾으러 가볼까?’
지구의 각성자들뿐 아니라 초월자 노예들이 가세함으로 역시나 행성의 문제 해결도 상승 속도는 무섭도록 빨라졌다.
초월자 노예들이 고용한 중립 행성의 각성자들 숫자는 대략 300만으로 지구 각성자들의 두 배나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개별 능력이나 레벨이 지구의 각성자들보다는 현저히 뒤지는 편이었다. 그래도 다카룬을 비롯한 200여명의 초월자 노예들이 단 1초도 쉬지 않고 그들을 닦달하며 퀘스트 도우미를 하다보니 문제 해결도는 예상보다 더욱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25일 정도면 모든 행성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 로드.
그렇게 알아서 다들 잘하고 있으니 상훈은 편했다.
그는 달리 할 일도 없고 해서 행성의 문제 해결도가 일정 이상 충족될 때마다 출현하는 어비스 대장장이들을 찾아 극초월 무기를 만드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