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소멸의 홀 (2)
츠으으읏!
곧바로 상훈은 바스타오가 남기고 간 차원력을 흡수했다.
‘흐으읍!’
앞서 흡수했던 자하드나 카미나가 남겨둔 차원력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만큼 많은 양.
그는 매우 훌륭한 차원력 셔틀이었다.
‘바스타오마저 패배했으니 이제 더 이상 상상 결계로 쳐들어오는 일은 없겠군.’
더 이상 상상 결계를 통해 차원력을 얻기는 쉽지 않다는 뜻.
하지만 이제는 굳이 그런 걸 기대하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이 정도면 거의 회복이 됐다.’
자하드, 카미나에 이어 바스타오가 막대한 차원력을 남겨준 덕분에 이제 그는 상상 결계가 아닌 곳에서도 전투력의 대부분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부하 사로스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이 시스템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뭘 망설일 필요가 있을까?
‘본진을 친다.’
그 사이에도 사로스는 꾸준히 자하드 등이 있는 시스템의 사령부를 향해 게이트를 열고 있었다. 바스타오의 부하들에 의해 게이트가 소멸되고 있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사로스, 수고 많았다. 이제 그만 멈추고 그쪽으로 공간 좌표 하나만 만들어놔.”
“알았다, 로드.”
사로스는 즉각 공간 좌표를 만들었다. 상훈은 그것에 차원력을 주입했다.
츠으으읏!
곧바로 차원 게이트가 열렸다.
그리고 투명한 물결처럼 일렁거리는 게이트의 저편으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상훈 역시 돌연 인상을 찌푸렸다.
‘또 뭐냐? 누가 이걸 막은 거지?’
게이트는 열렸지만 정작 이동이 불가능하다?
이는 누군가 막대한 차원력을 주입해 반대편 게이트를 봉쇄해버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최소한 군황 바스타오 못지 않은 능력자여야 가능했다.
어지간한 초월자라면 상훈의 차원 게이트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큰 부상을 입고 말 테니까.
조금 전.
바스타오가 상상 결계에서의 전투에서 대패한 순간 그의 본신 역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강제 상상 결계의 후유증!
앞서 자하드나 카미나처럼 아슬아슬하게 패배한 것도 아니고, 바스타오는 일방적으로 상훈에게 밀리다 처참하게 죽은 것이다.
따라서 그가 받은 정신적 충격은 자하드나 카미나가 받은 것보다 비할 수 없이 컸다.
파지직! 콰앙!
트리안의 구슬이 금이 가더니 급기야 터져버렸고, 바스타오는 체내의 차원력이 폭주하며 반미치광이 상태가 되기 직전이었다.
“크크크큭! 다 죽여버린다!”
아르메스를 비롯한 켈라크스의 초월자들이 모두 두려워떨었다.
“바스타오님 부디 진정을······.”
“로드! 제발 진정하십시오!”
그러나 바스타오는 그들의 말조차 알아듣지 못했다.
그의 두 눈이 더욱 광기로 번뜩였다.
“크크크크! 죽인다! 모든 걸 다 죽인다! 크크큭! 크카카카카카!”
그대로 두면 바스타오 스스로 자폭을 하거나 혹은 광인이 되어 주변에 있는 모든 걸 다 파괴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바스타오를 한 대 후려쳐 진정시킨 이가 있었으니.
퍽-
“커어억!”
바스타오는 입에서 피를 토한 채로 쓰러졌다. 그러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자신을 친 누군가를 쳐다봤다.
그녀는 신비한 적발을 가진 여성이었다.
두 눈은 다이아몬드처럼 빛났고 전신의 피부는 은가루처럼 반짝였다.
“바스타오, 군황이 되어서도 너의 멍청함은 끝이 없구나.”
멍청하다니! 전직 마왕 출신의 초월자이자 켈라크스 제 7군황 바스타오에게 멍청하다 말하며 나무라는 이가 있다니!
정말로 죽고 싶어 환장을 하지 않았다면 그런 말을 입에 꺼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바스타오는 그 여인을 보자 이내 고개를 떨구며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크으으! 면목이 없습니다······. 소, 소멸······.”
바스타오는 뭐라 말하다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한 채 그대로 실신해버렸다.
그런 그를 못마땅한 듯 내려다보는 여인.
바스타오의 부하들은 그 여인을 보며 깜짝 놀랐다. 그들은 일제히 납작 엎드렸다.
“위대하신 켈라크스 제 5군황 트리안님을 배알합니다.”
“제 5군황 트리안님을 배알합니다.”
그렇다. 폭주하는 바스타오를 뒤통수 한 대 후려쳐 정신을 차리게 만든 그녀가 바로 켈라크스를 지배하는 7명의 절대자 중 하나인 제 5군황 트리안이었다. 그녀는 또한 켈라크스 시스템의 설계자이기도 했다.
“저 녀석 어디 안보이는 곳에 갖다 치워라. 꼴보기 싫으니까.”
“며, 명을 받듭니다.”
실신한 채로 널브러져 있는 바스타오를 그의 부하들이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사이 이곳엔 트리안 뿐 아니라 그녀의 부하들도 다수 나타났다.
또한 트리안과 더불어 7명의 절대자 중 하나인 켈라크스 제 6군황 세르펜스도 게이트를 통해 건너왔다.
전신이 흑색으로 이루어진 괴인.
오직 두 눈은 하얀 광채로 번쩍이고 있어 더욱 섬뜩해보였다.
“위대하신 켈라크스 제 6군황 세르펜스님을 배알합니다.”
“켈라크스 제 6군황 세르펜스님을 배알합니다.”
아르메스 등이 황급히 다시 부복했다. 세르펜스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은채 트리안을 향해 다가와 물었다.
“트리안님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 또한 파악 중이야. 세르펜스, 넌 일단 저 게이트부터 봉쇄하는 게 좋겠구나.”
그때가 바로 상훈이 사로스의 공간 좌표를 통해 이쪽으로 차원 게이트를 생성시킬 때였다. 세르펜스는 즉각 그것이 작동하지 못하게 막았다.
“으! 이건 보통의 차원 게이트가 아닙니다. 저 녀석이 대체 누구기에?”
세르펜스는 게이트를 봉쇄하기 위해 대량의 차원력을 쏟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깜짝 놀라고 말았다. 게이트 하나로 켈라크스 제 6군황인 그를 이토록 애먹일 만한 존재가 있을 줄이야.
트리안이 안색을 굳혔다.
“바스타오가 저 놈에게 당했어. 그 정도 능력을 가진 놈이 왜 시스템 속에 갇혀 있는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이유불문하고 이제 저 놈이 저 안에서 나와선 절대 안 된다.”
“저 인간 놈이 꽤 놀라운 차원력을 보유하고 있긴 하지만 바스타오가 당했다니 믿기지 않는군요.”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야. 아쉽게도 난 구슬이 부서진 순간 이곳에 도착해 놈과 바스타오의 결투를 보지 못했다.”
트리안은 힐끗 고개를 돌려 한쪽에 엎드려 있는 아르메스를 불렀다.
“아르메스, 너는 결투를 모두 지켜보았겠지?”
“네, 트리안님.”
“네가 본대로 말해봐라.”
“믿기지 않지만 저 인간 놈이 소멸의 홀을 두 개나 펼쳤습니다.”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구나. 소멸의 홀이라니!”
트리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소멸의 홀은 그녀 역시도 아직 엄두도 내지 못하는 초월자로서의 궁극기다.
켈라크스의 군황들 중에서도 상위 3명의 군황들만 펼칠 수 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강한 제 1군황 루치페로라 해도 한 번에 소멸의 홀을 두 개나 만들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잘못 본게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트리안님.”
“아르메스의 말대로입니다. 저 또한 그것을 보았습니다.”
바스타오의 부하들이었다. 그들 또한 구슬을 통해 상훈과 바스타오의 결투를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트리안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바스타오가 실신하기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크으으! 면목이 없습니다······. 소, 소멸······.’
그렇다면 바스타오는 소멸의 홀에 대해 얘기하려다 쓰러진 것이 분명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다.’
소멸의 홀을 동시에 두 개나 만들어내는 존재가 나타난 것만도 켈라크스에 위협적인 사태였다.
그러나 그런 자가 하필이면 켈라크스 시스템에 침투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트리안은 노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아르메스를 노려봤다.
“아르메스! 넌 왜 저 놈이 시스템에 침투했음을 진작 보고하지 않았느냐?”
“처음엔 그저 반 켈라크스 연합 소속의 버그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상급 버그 헌터면 놈을 없앨 수 있다 생각했는데 갈수록 강해졌습니다.”
아르메스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간 있던 상황을 빠르게 보고했다.
이에 트리안이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라 했지? 놈의 손에 페르틸라가 3개나 들어갔다고?”
“놈이 초마력혼돈진을 간파한 후 매 시나리오가 시작될 때마다 곧바로 페르틸라를 접수해버리는 터라······.”
아르메스의 말을 들은 트리안은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자하드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이 실수였구나. 놈의 자질이 나쁘지 않아 장차 군황이 될만한 재목이라며 루치페로님이 총애를 아끼지 않으셨기에 특별히 이 중요한 임무를 맡겨두었더니 일을 이렇게 망쳐놓다니!”
그러자 제 6군황 세르펜스 역시 인상을 굳힌채 말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저 놈이 소멸의 홀을 두 개나 소환해 낸다면 나와 트리안님이 동시에 상대해도 놈을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저 놈이 정말로 그 정도로 강한 능력을 갖고 있다면 군황들 모두가 모여야 저 놈을 이길 수 있겠지.”
“지금 즉시 다른 군황들께 지원을 요청해야겠습니다.”
“이미 전언을 보냈다. 잠시 후면 이곳으로 모두 모일 것이다.”
그렇게 말을 하는 와중에도 트리안의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야.’
물론 그녀는 군황들이 모두 모인다면 충분히 상훈을 처치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그러나 그건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시스템이 파괴된 이후에나 벌어질 일이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을 또 만들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켈라크스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들어간 자원은 어마어마하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대량의 차원석과 그 얻기 힘들다는 혼돈석까지.
차원석이야 엄청난 시간을 들인다면 어떻게 또 대량으로 구할 수 있겠지만, 혼돈석은 또 구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혼돈석을 통해 만들어낸 10개의 페르틸라 모형들.
시스템이 부서지면 그것들도 날아가버리게 되고!
혼돈력을 얻어 전차원을 지배하겠다는 켈라크스 군황들의 야심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차라리 저놈과 협상을 벌여보는 게 좋겠어.’
비록 게이트는 봉쇄되었지만 그것을 통해 마치 투명한 유리창을 마주한 듯 게이트 건너편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짙은 흑발을 가진 인간 청년이 뭔가 못마땅해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그는 상훈이었다.
스스.
곧바로 트리안의 모습이 상훈이 있는 쪽에 나타났다. 이는 그녀의 본신이 아닌 환영이었다.
이 시스템을 설계한 그녀에게 차원력의 폭주없이 환영 하나 만들어 집어 넣는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다만 어디까지나 환영일 뿐이라 대화 정도만 가능할 뿐 전투 능력은 전혀 발휘할 수 없었다.
“넌 또 뭐지?”
“켈라크스 제 5군황 트리안.”
라트로들의 군황 답지 않게 아름답고 고귀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마치 여신이나 천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심지어 목소리까지 감미로웠다.
“환영으로 나타난 이유는?”
“잠시 후면 켈라크스의 모든 군황들과 최정예 초월자들이 모두 모인다. 네가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다 해도 그들을 상대로 이길 수는 없어.”
“그래서? 지금 날 협박하러 온 건가?”
그러자 트리안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이제 이런 무의미한 전쟁은 그만두자는 거야. 널 죽이는 와중에 우리도 적지않게 피해를 입을 테니까. 그리고 그건 양쪽에 모두 불행한 일이겠지.”
“그래서 이제 그만두고 물러가겠다?”
“우리에게 협조해라. 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