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소멸의 홀 (1) (43/159)

 # 43

소멸의 홀 (1)

초월자들의 전투는 여러 형태로 이루어진다.

차원력을 각종 사물로 형상화해 공간 자체를 공격하는, 그야말로 신들의 전쟁처럼 싸울 때도 있고, 지금처럼 그냥 각자의 무기를 들고 보통의 인간들처럼 싸우기도 한다.

그러나 후자처럼 싸운다 해서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눈으로 보이기만 그렇게 보일 뿐, 실상 광대한 공간 속에서 차원력을 끌어올려 승부를 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각각의 공격과 방어에 초월자로서 체득한 그들의 모든 것이 다 깃들어 있었다.

“각오해라, 벌레 놈!”

휘휘휙! 파파파팟-

얼굴의 권태로운 표정과는 달리 카미나의 공격은 과감했다. 6개의 검을 휘두르면서도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푹! 푹! 푸확!

급기야 검 하나가 상훈의 왼쪽 옆구리에 박혔다. 이어서 또 하나의 검이 오른쪽 허벅지를 찔렀고, 계속해서 또 다른 검이 상훈의 가슴을 찔렀다.

푹! 푹푹!

그런 식으로 6개의 검이 상훈의 몸에 박혔다.

그러나.

“으윽······! 이게 무슨!”

갑자기 카미나가 두 눈을 부릅뜬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훈이 6개의 검에 찔리며 쓰러지는 와중에 힘겹게 내찌른 미늘창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어버린 것이다.

“마, 말도 안 되는······.”

상훈의 몸이 검들에 찔렸지만 모두 치명상은 비켜갔다. 반대로 상훈이 비틀거리며 발악하듯 내찌른 최후의 일격에 카미나는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털썩!

카미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고 이내 축 늘어졌다.

스스스.

곧바로 먼지로 변해 흩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상훈은 지친 듯 숨을 헐떡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보기만 그럴 뿐 그는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그냥 그런척하고 있을 뿐이다.

‘어설프게 하면 속일 수 없지.’

최대한 진짜같이 해야 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고작 차원력 셔틀에 불과한 카미나의 검에 맞아준 건 다 그 때문이었다.

그래야 정말 운 좋게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이제 차원력이나 챙겨볼까?’

상훈은 이내 뿌듯한 표정으로 카미나가 흘리고 간 차원력을 모조리 흡수했다. 자하드가 남기고 간 것보다 몇 배는 많았다.

‘제법 쏠쏠하군.’

이대로라면 켈라크스 시스템을 파괴하는 건 이제 시간 문제.

그 이후의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

그때부터가 진짜 전쟁의 시작이니까.

켈라크스의 군황들과 그 부하들을 모조리 다 죽여야 전쟁이 끝날 것이다.

한편 그때 카미나는 상상 결계에서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정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으으윽! 내, 내가 패하다니······.”

극도의 정신적 충격! 거기에 차원력까지 대거 소진되어버린 터라 공황 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카미나 너마저 나를 실망시키느냐?”

바스타오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카미나는 더욱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죽여주세요, 로드······.”

보통 때라면 전투에 한 번 패배했다고 이런 식으로 못난 모습을 보일 카미나가 아니었다. 강제 상상 결계에서 패배한 후유증인 것이다.

“꼴보기 싫다. 차라리 실신을 하는 게 더 나아보이는구나.”

사실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린 자하드보다 그나마 카미나가 잘 버티고 있는 것이지만, 실의에 빠져 못난 소리나 해대는 걸 보니 울화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도저히 더 이상은 안 되겠군. 내가 직접 저놈을 손 보겠다.”

바스타오는 즉각 트리안의 구슬에 차원력을 주입했다.

츠으읏! 츠으으읏-

그의 모든 차원력이 아닌 일부이지만, 양만 따진다면 카미나나 자하드가 보유한 모든 차원력을 합친 것보다 많을 것이다.

그렇게 막대한 차원력이 스며들자 트리안의 구슬이 위태롭게 진동했다.

우우우우우웅-

이러다 자칫하면 구슬이 그대로 깨져버리고 만다.

바스타오가 처음부터 나서지 않은 건 바로 이것을 우려해서였다. 트리안의 구슬이 아무리 대단하다해도 군황들의 차원력을 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구슬을 직접 만든 제 5군황 트리안도 군황들이 이 구슬을 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발! 버텨야 한다.’

바스타오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구슬에 차원력을 주입했다.

그러던 일순.

스스스.

드디어 상상 결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성공했군.’

바스타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스스스.

동시에 상훈에게도 다시 상상 결계가 둘러졌다. 그리고 그의 앞에 키가 3미터쯤 되는 악마 형상의 바스타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까지 오게 만들다니 제법이로구나, 인간.”

바스타오의 전신에서 풍겨나는 가공스러운 기세를 본 상훈은 비로소 진짜가 등장했음을 간파했다.

‘더 이상 실력을 숨기기 힘들게 됐군.’

상훈은 바스타오의 경지를 단 번에 꿰뚫어봤다.

초월자로서의 궁극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직전까지는 이른 상태랄까?

따라서 상훈이 전력을 다해야 이길 수 있다. 실력을 감춘 채 대충 싸워서 이길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제 7군황 바스타오라는 녀석이 바로 너인가?”

“날 알아보다니 기특하구나.”

“모습을 보니 넌 마왕 출신같은데 초마왕이 되어서 하찮게 라트로짓을 하고 있는 거냐?”

용족의 초월자를 초용족이라 하듯이, 초마왕은 마왕들 중 초월자가 된 이들을 의미한다.

흔히 말하는 마왕들은 마계에 넘쳐나게 많고 그런 마왕들 중에서 아주 드물게 초마왕이 등장하게 되는데, 딱 보니 바스타오가 그런 경우였다.

“뭔가 잘못 알고 있군. 우리는 전차원을 지배할 정복자이지 라트로 따위가 아니다.”

“천만에! 너희들은 혼돈의 힘을 손에 넣어 전차원을 지배하겠다는 헛된 망상을 가진 라트로일 뿐이다.”

그러자 바스타오가 크게 웃었다.

“하찮은 벌레 놈인줄 알았는데 제법 많은 걸 알고 있었군. 하긴 날 이곳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힘을 숨기고 있는 걸 보면 평범한 녀석이 아니겠지.”

“그걸 눈치 챘나?”

“여기와서다. 내가 켈라크스의 군황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네놈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다.”

바스타오의 표정은 긴장으로 물들어 있었다. 구슬을 통해 보았을 때와 달리 막상 직접 상훈 앞에 서보니 그 전투력이 도무지 가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로소 그는 자하드와 카미나가 방심을 해서 당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묻겠다. 네놈은 멸황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군. 날 죽이면 멸황이 와서 널 죽일까봐 겁이 나는건가?”

“크큭! 우리가 멸황 따위를 두려워할 것 같은가? 그놈은 언제고 우리가 손을 보려고 하고 있었지. 나는 그저 네놈의 정체가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이다.”

“날 이기면 내가 누군지 말해주마.”

“건방진 놈! 너는 이제 내가 왜 켈라크스의 제 7군황이라 불리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 순간 바스타오의 몸체가 거대하게 변했다. 본래도 거대했던 그의 신장이 그와 비할 수 없이 더 커졌다.

언뜻봐도 수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악마의 모습!

그의 주위로 검은 기운이 폭풍처럼 휘돌기 시작하자 사방이 마치 천지가 개벽하는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콰콰콰콰-

그런데도 상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싸우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자. 왜 하필 지구를 선택한 거지? 다른 곳도 많았을 텐데?”

그러자 바스타오가 음침하게 웃었다.

“글쎄!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고?”

“너희 인간들이 벌레를 죽이는데 이유를 따지며 죽이느냐? 우리도 마찬가지야.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했을 뿐이다. 켈라크스 시스템을 적용할 만한 곳을 찾던 중 우연히 지구가 눈에 띄었을 뿐 다른 이유는 없다.”

“역시 그랬군.”

상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별 대단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는 그 역시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우연히 지구가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우연히! 그냥 우연히!

지구의 인간들은 아무런 죄도 없이 그냥 우연히 눈에 띄었다는 이유로 이 끔찍한 재앙을 겪은 것이었다.

‘생각할수록 열 받는군.’

정말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

물론 애초부터 용서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바스타오! 너 따위가 켈라크스놈들 사이에서는 군황이라고 불릴만큼 대단하게 여겨지는 지 모르지만 내가 볼땐 그저 그런 수준일 뿐이다.”

곧바로 상훈의 두 눈에서 새하얀 광채가 번쩍였다.

그가 손가락을 앞으로 빙글 돌리자 전방에 커다란 원반 같은 것이 생겨났다.

파아아아-

그리고 그 원반이 마치 블랙홀처럼 전방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바스타오의 몸에서 피어난 거대한 폭풍도 그 원반 속으로 맥없이 빨려들어가 소멸되어 버렸다.

“으윽! 그것은 설마?”

초월자로서의 궁극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펼칠 수 있는 절대무적의 비기(祕技)!

모든 차원력의 공격을 무력화시켜버리는 소멸의 홀!

그것은 차원력을 운용하는 초월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악몽과 같은 것이었다.

그보다 더 강한 힘이 있다면 혼돈력 정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네, 네놈이 대체 누구이기에 소멸의 홀을!”

바스타오는 경악하다 못해 혼이 날아간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켈라크스 제 7군황답게 그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소멸의 홀이 가공스러운 중력으로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지만, 그는 전력을 다해 버텨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피한다.’

라트로답게 그는 자신보다 강한 적 앞에서 도주하는 걸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강제 상상 결계는 그가 펼쳤던 만큼 언제든 해제가 가능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전방 멀리서 가공스러운 위력을 발휘하고 있던 소멸의 홀이 그의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콰아아아-!

설마 그 사이 상훈이 소멸의 홀을 뒤로 이동시킨 것일까?

그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전방에는 소멸의 홀이 그대로 자리잡고 있었으니까.

믿을 수 없게도 또 하나의 소멸의 홀이 생성된 것이었다.

“으!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는 전방에 있는 소멸의 홀에 빨려들어가지 않기 위해 후방쪽으로 최대한 힘을 주어 버텨야 했다. 그 상황에 후방에 소멸의 홀이 생겨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아, 안돼! 크아아아악!”

그는 금세 후방 쪽 소멸의 홀로 빨려들어갔다. 마치 그가 스스로 뛰어든 것처럼 순식간이었다.

그 순간 상훈도 깜짝 놀랐다.

‘저게 어떻게 된 거야?’

그는 잔뜩 분노한 상태로 전투에 몰입하던 중 무의식적으로 소멸의 홀을 또 하나 생성시켰다.

이는 본래 그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일.

그의 모든 차원력을 쏟아부어 소멸의 홀을 생성시킨 것인데, 어디서 차원력이 생겨나 소멸의 홀을 또 만들 수 있겠는가.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군.’

설마 그 사이 초월자의 궁극을 넘어서 혼돈자의 경지에 이른 것인가?

그것은 절대 아니었다.

정말로 혼돈자가 되었다면 고작 소멸의 홀 하나 더 생성시키는 정도가 아닐 테니까.

‘혹시 페르틸라들 때문인가?’

불완전한 혼돈력일망정 어쨌든 차원력의 힘보다 상위의 힘이다.

한동안 그것들을 계속 만지작거리며 연구하던 도중 뭔가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게 뭔지 전혀 감이 안잡힌다는 것!

다시금 소멸의 홀을 동시에 두 개 생성시킬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스스스.

그 사이 소멸의 홀들은 사라졌고, 만신창이 상태로 변해 널브러진 바스타오가 상훈의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다시 3미터 정도로 작아진 그의 몸은 어느 한 군데 정상인 곳이 없었다. 팔다리가 휘어지다 못해 이리 저리 뒤틀린채 꺾여 있었고, 심지어 머리는 몸에서 떨어져 나간 채 따로 뒹굴고 있었다.

“크으으으으!”

그런데도 그는 죽지 않았다. 힘겹게 몸을 복원하고 있었고 머리 또한 스스로 움직여 몸체에 붙었다.

그런 그를 향해 상훈이 무심한 표정으로 걸어갔다.

“바스타오! 벌레가 되어 죽는 기분이 어떤 건지 너도 한 번 느껴봐라.”

상훈은 아루엘의 대검을 번쩍 쳐들었다가 그대로 마구 내리찍었다.

콱! 서컥! 퍽퍽퍽!

“크아아악! 아아악! 크아아악!”

처참하게 조각난 바스타오의 몸체는 이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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