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트리안의 구슬 (2)
스슷.
그때 상훈의 앞에 붉은 머리 사내가 나타났다.
키는 대략 2미터.
얼굴 선은 굵었고 눈빛은 강인해 보였다.
전신에서 피어나는 기세 또한 최상급 초월자라기에 손색이 없었다.
상훈은 대략 그가 누군지 짐작이 갔다. 사로스에게 자하드의 인상착의에 대해서도 들었으니까.
“보아하니 네가 바로 그 자하드란 녀석 같은데?”
그러자 자하드는 싸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을 용케 알고 있군. 싸우기 전에 하나만 묻자. 네놈은 대체 누구냐?”
“전상훈이다.”
자하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네놈의 이름따윈 이미 알고 있어. 내가 궁금한 건 네놈의 정체다.”
“싸우기 전에 궁금한 것도 많군.”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물어볼 기회도 없을 것 같아서 그래. 최소한 누군지는 알고 죽여야지 않겠나?”
“그렇다면 알려주지.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
“좋아, 말해봐라.”
“혹시 멸황이라고 들어봤나?”
상훈은 그냥 한 번 물어봤다. 이들이 멸황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나 해서다.
그런데 자하드는 기막혀하는 표정을 지었다.
차원의 약탈자라 불리는 라트로들에게 있어 가장 껄끄러운 존재들이 바로 라트로 헌터라 불리는 자들이다. 전문적으로 라트로들만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괴멸시켜버리는 만큼 라트로 헌터들은 모두 초월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라트로 헌터들 중 가장 전설적인 존재가 바로 멸황(滅皇)이었으니!
초대형 라트로 집단 수십 개를 차원계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는 멸황은 그 이름 자체로 공포의 대명사였다.
그 스스로 멸황이라 말한 것이 아니라 다른 라트로 헌터들이 그를 경외하는 뜻에서 붙여준 명칭이라 했다.
물론 그냥 허구의 존재라는 말도 많았다. 라트로들을 겁주기 위해 라트로 헌터들이 지어낸 가상의 존재 말이다.
심지어 라트로들 앞에서 스스로 멸황이라고 허풍을 떠는 라트로 헌터들도 많다고 했으니까.
“정신이 나간 녀석이군. 혹시 네가 멸황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냥 내 친구의 친구가······.”
자하드의 안색이 흠칫 굳어졌다.
“친구의 친구가 멸황이라는 거냐?”
“아니, 그 친구의 친구가 아주 잘 아는 녀석이 멸황이다.
“큭! 미친 놈!”
자하드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는 일단 상훈의 말을 믿지도 않았지만,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상훈이 말한대로라면 멸황과 결코 대단한 관계라 할 수 없었다.
그건 그냥 모르는 사이나 마찬가지다. 어디 지나가다 멀리서 멸황이라는 존재를 한 번 봤다는 것과 다를바 없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집어치우고 네 정체나 밝혀라.”
“난 밝혔는데. 뭐 안 믿으니 어쩔 수 없지.”
상훈의 친구 초용족 라쿤. 라쿤의 친구는 상훈.
다시 상훈의 친구는 라쿤. 그 라쿤이 잘 아는 녀석은 상훈.
결론적으로 상훈이 곧 멸황이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일부러 말장난을 하며 헛갈리게한 건 그냥 스스로 멸황임을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매우 귀찮은 일이 벌어질 거야.’
멸황이라면 이를 박박갈고 있는 라트로들이 우루루 몰려와 켈라크스들과 연합이라도 하게 되면 골치아파진다.
겁날 건 없지만 그들까지 다 쓸어버리려면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것이다.
‘저 자하드란 녀석이 갑자기 강제 상상 결계를 펼쳐 나타났다는 건 분명 그 배후에 있다는 그놈들과 관계가 있겠지.’
차원력의 폭주를 일으키지 않고 시스템 내부로 상상결계 공격을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하드 따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 그런 게 가능했다면 진작 그가 상훈에게 공격을 해왔을 테니까.
이는 자하드와 비할 수 없이 강력한 존재들이 개입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그보다 누군가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데?’
초월자로서 궁극에 이르렀던 그의 직감!
정상적인 경우라면 상상 결계 속의 전투를 누군가 지켜보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막대한 차원력을 소모해 시스템 내부로 강제 상상 결계를 침투시킨 상황이니까.
‘분명 그 배후에 있는 놈들이겠지.’
그들은 상훈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이 결투를 통해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했다.
‘슬슬 본 게임이 시작되는 건가 보군.’
상훈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나를 향해 상상 결계로 승부수를 던진 건 너희들의 실수다.’
곧바로 상훈은 자하드를 차갑게 노려보며 외쳤다.
“이제 그만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는 게 어때?”
“원하는 바다, 애송이!”
순간 자하드의 양쪽 팔뚝 부근에서 붉은 광채가 일어나더니 그것은 이내 둥그런 륜(輪) 형태로 변했다. 차크람이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네놈에게 진정한 초월자의 힘이 무엇인지 보여주마.”
자하드가 두 팔을 흔드는 순간 그의 팔에서 튀어나온 두 개의 차크람이 거대하게 변했다. 차크람의 테두리는 수백 자루의 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파파팟!
파파파파-
맹렬히 회전하는 저 차크람에 슬쩍만 스쳐도 수백 자루의 검에 연달아 맞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런 차크람 두 개가 상훈의 양쪽을 포위하며 날아들었다.
“차크람인가? 나랑 비슷한 취향을 가진 녀석이 있었군.”
상훈도 저와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차크람을 즐겨 사용하곤 했다.
차원력이 깃든 수백 자루의 무기가 원형을 이룬채 무한 회전하며 전장을 누비게 되면 그 앞에 남아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물론 그건 상훈이 차크람을 조종할 때의 얘기다.
자하드의 공격은 그저 가소롭기만 했다.
다만 상훈은 생각한 바가 있어 일부러 꽤 고전하는 것처럼 결투를 벌였다.
휘이잉! 파파파파-
쉴새없이 날아드는 두 개의 차크람들로 인해 상훈은 매우 위태해보였다. 어느덧 그는 여기저기 극심한 부상을 입어 만신창이처럼 되어 있었다.
“크큭! 쥐새끼처럼 잘도 피한다만 그래봤자 소용없는······커억!”
그런데 자하드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힘겹게 차크람들을 피하던 상훈이 기습적으로 던진 미늘창이 그의 가슴에 박혔기 때문이었다.
푸확!
미늘창은 자하드의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자하드는 뻥 뚫린 가슴을 바라보며 불신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차크람 두 개가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앞에서 안도의 표정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상훈의 모습도 보였다.
바로 그 때문에 자하드는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분하다! 다 이겼는데 방심을······.’
자하드는 급작스럽게 날아든 미늘창의 기습만 아니었다면 상훈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끝장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는 원통스러운 표정으로 맥없이 널브러졌고 그 즉시 상상 결계의 공간에서 사라졌다.
“저런 바보 같은 놈 같으니! 그깟 기습 하나 못 피한다는 말이냐?”
바스타오가 분통을 터뜨렸다.
트리안의 구슬을 이용해 상상 결계를 펼치면 다른 이들도 구슬을 통해 그 결계의 상황을 지켜볼 수 있다.
따라서 바스타오는 자하드가 상훈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다 불의의 일격을 받고 패배하는 장면을 모두 지켜보았다.
처음에 상훈의 입에서 멸황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바스타오 역시 흠칫 놀라긴 했지만, 이내 픽 웃고 말았다.
친구에 친구가 어쩌고 하는 말을 들어보니 그저 허풍에 불과했으니까.
그런 허풍이나 치는 녀석에게 자하드가 패배했으니 어이가 없었다.
“우욱!”
그때 눈을 감고 상상 결계의 전투에 몰두해 있던 자하드의 몸이 세차게 떨리더니 입에서 피를 토했다. 상상 결계 전투에서의 패배로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으으······.”
“로드!”
아르메스가 다급히 부축했지만, 자하드는 동공이 풀린 채로 신음하더니 그대로 실신해버렸다.
“한심한! 여러모로 무능한 녀석이었군. 그래도 그간의 공로를 참작해 만회할 기회를 주었건만.”
바스타오의 인상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때 누군가 그의 앞에 부복하며 외쳤다.
“저 녀석은 저에게 맡겨주시겠습니까, 로드?”
그녀는 제 7군황 바스타오 휘하 최강의 무장인 카미나였다.
자하드와는 비할 수 없이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초월자.
바스타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미나 네가 나서긴 우스운 꼴이긴 하다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 최대한 압도적으로 놈을 몰아붙여 죽여라. 그래야 놈이 극도의 절망에 빠져 모든 걸 포기하게 될 테니까.”
“기대하십시오, 로드. 놈을 절망에 빠뜨려 스스로 죽게 만들어 보이지요.”
카미나는 곧바로 트리안의 구슬에 차원력을 주입했다.
츠으으읏!
그렇게 다시 상훈을 향해 강제 상상 결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스스스.
물론 상훈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터라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나오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드디어 배후에 있는 녀석들 중 하나가 내 앞에 나타나는 건가?’
역시나 그들은 상상 결계 속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일부러 약한 척 하길 잘했어.’
상훈이 전력을 다 드러냈다면 그들은 섣불리 다시 공격해오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아주 아슬아슬하게 이겨주었다.
운 좋게 기습을 통해 이긴 것처럼 말이다.
상훈과 비등한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면 그같은 상황을 절대 눈치챌 수 없었다.
‘어쨌든 뜻밖의 수확이야. 상상 결계에서 승리했을 뿐인데 차원력이 회복되다니.’
트리안의 구슬에 주입되었던 자하드의 차원력!
자하드가 승리했다면 그 차원력은 다시 그에게 대부분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패배하자 차원력은 일시적으로 주인을 잃어버렸고 그것을 상훈이 모조리 흡수해버렸다.
그것은 물론 자하드가 가진 모든 차원력은 아니었다.
그래도 상급 버그 헌터 하나를 해치운 수준은 되었기에 상훈으로서는 매우 고무적인 상황이었다.
스슷!
그 사이 상상 결계가 완성되고 상훈의 앞에 한 여성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는 대략 2.5미터.
얼굴은 아름다운 미소녀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무려 여섯 개의 팔을 가진 괴수였다. 그 각각의 팔마다 검을 쥐고 있었는데 풍기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제법 대단한 녀석이 나타났군.’
자하드와 같은 최상급 초월자!
그러나 최상급 초월자라고 해도 그 수준 자체가 달랐다.
자하드가 서너 명이 있어도 상대하기 힘든 수준이랄까?
“나는 위대하신 켈라크스 제 7군황 바스타오님을 모시고 있는 카미나다. 감히 켈라크스 시스템에 침투해 분란을 일으킨 벌레 놈! 이제 네놈에게 군황 바스타오 님의 분노를 보여주겠다.”
차가운 눈빛으로 상훈을 내려다보는 카미나의 표정에는 짜증스러움과 함께 약간의 권태로움도 보였다. 그녀의 입장에서 상훈은 그저 하찮은 벌레에 불과했던 것이다. 시스템의 버그로서의 벌레가 아니라 진짜 벌레 말이다.
상훈은 픽 웃었다.
“친절하게도 네가 누군지 다 밝혀줘서 고맙구나.”
카미나는 상훈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저 같은 걸 밝혔겠지만, 덕분에 상훈은 그녀가 켈라크스 제 7군황 휘하에 있는 무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제 7군황의 이름은 바스타오라는 것도.
그뿐인가?
켈라크스에 그런 군황이 적어도 7명이 있다는 것까지 추측이 가능했다.
“각오해라, 벌레 놈!”
곧바로 카미나가 붉은 광채로 휩싸인 여섯 개의 검을 휘두르며 돌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