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신의 미늘창 (2) # 41
트리안의 구슬 (1)
소녀의 모습이었던 사로스가 돌연 그대로 부서지더니 구형체로 변해 휘돌기 시작했다.
휘우우우웅-
그 모습은 흡사 행성이 빠르게 자전하는 모습을 멀리서 보는 것과 비슷했는데, 그 상태로 엄청난 기세를 뿜어내며 돌진해왔다.
“죽어라, 인간!”
그러나 그 구형체는 상훈이 미늘창을 휘두르자 단번에 두 동강이 났다.
스스.
그 즉시 사로스는 두 개의 구형체로 변해 달려들었다.
“쓸데없는 짓을 반복하는군.”
상훈은 다시 힘껏 미늘창을 휘둘러 구형체를 가루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또한 소용없었다.
사로스는 부서져도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급기야 상훈을 중심으로 수백 개도 넘는 기괴한 형태의 물체들이 제각각 움직이며 공격을 해오기 시작했다.
차원력으로 부숴놓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차원력에 간섭받지 않고 존재하는 아주 기괴한 힘으로 이루어진 존재니까.
‘역시 그것이었나?’
상훈은 비로소 사로스의 정체가 무엇인지 간파했다.
방대한 차원계에는 온갖 특이한 종류의 종족이 존재한다. 그 중에는 어떤 특정한 형태의 유기체가 아닌 괴상한 에너지 형태로만 존재하는 녀석들도 있다.
어지간한 정령이나 로봇보다도 훨씬 생존력이 강한 종족!
아무리 박살을 내도 소용이 없는 건 바로 그때문이었다. 사로스는 바로 그런 류의 존재인 것이다.
‘그래도 해치우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
에너지 형태의 종족이라 해서 불사의 존재는 아니다.
에너지를 몽땅 흡수해서 없애버릴 수도 있고, 에너지 자체를 흩어버려 해치우는 방법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최상급 초월자급 전투력을 가진 사로스와 같은 존재는 얘기가 다르다. 그녀는 그야말로 우연에 우연이 무한대로 반복되어 정말로 우연하게 나타난 특별한 경우였다.
그 힘 자체도 근원을 알 수 없는 괴상한 것이라 상훈이라 해도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상대하기 힘들었다. 이대로라면 꽤 오랜 시간을 사로스와 실랑이를 벌여야 할 것이다.
‘가만! 그러고 보니 왠지 하라스 녀석과 비슷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데?’
상훈의 부하 중 하나였던 하라스.
그는 초월자가 아니지만 최상급 초월자에 육박하는 전투력을 가진 기괴한 존재였다. 딱 사로스와 판박이랄까?
하라스는 자신과 같은 존재가 하나 더 있다고 했다.
애초부터 둘은 동시에 태어났다고.
‘능력과 성향이 비슷하니 확인해볼 필요가 있어.’
잘하면 뜻하지 않는 조력자를 이곳에서 얻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죽어라, 인간!”
미늘창을 우하단으로 내려뜨린 상훈을 향해 사로스가 형성한 수백 개의 물체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대로 모두 멈춰섰다.
무엇때문인지 수백 개의 물체들 모두가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역시!’
상훈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그가 차원력으로 하나의 문양을 만들어보였는데, 사로스가 그것을 알아본 것이다.
푸른색 나선형태의 고리 수천개가 기괴한 형태로 뭉쳐있는 문양!
스스스.
그러자 곧바로 상훈을 포위한 수백 개의 물체들이 사라졌다. 사로스는 다시 본래의 소녀 형상으로 변해 상훈을 노려봤다.
“인간, 네가 어떻게 그 문양을 알고 있지?”
“내 부하 하라스가 알려줬다. 나에 대한 충성의 의미로! 네가 만일 하라스를 알고 있다면 절대 나와 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자 사로스의 두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뭔가 혼란스러워하는 표정도 지었지만 이내 차분히 상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문양에는 나와 하라스만 알고 있는 특별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로인해 나는 인간 네가 하라스의 로드인 걸 알겠다. 하라스의 로드이면 나에게도 로드와 같은 존재. 방금 전 무례했던 나를 용서하라.”
사로스의 태도가 금세 정중하게 변했다.
왠지 황당하지만 상훈은 이들 종족이 지닌 이런 단순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저 단순하다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와 정반대로 무섭도록 치밀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니까.
특히 전쟁에서는 말이다.
다만 그 단순함 때문에 교활하고 사악한 자들에게 이용당할 때도 있다는 게 문제.
당시에 하라스도 라트로들에게 이용당하고 있었으니까.
왠지 지금 보니 사로스도 비슷한 상황인 것 같았다.
“사로스, 지금 너의 능력이라면 이 켈라크스 시스템에 구속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어째서 그놈들의 노예 노릇을 하고 있는 거냐?”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자세히 상황을 말해봐.”
그러자 사로스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모두 말했다.
상훈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대로였기 때문이다.
다만 덕분에 이곳 지구를 공격한 켈라크스 시스템의 최수뇌부가 자하드와 아르메스라는 사실을 알아낸 건 큰 성과였다.
“넌 이용만 당했을 뿐이다. 자하드란 녀석은 애초부터 너와 네 부하들을 풀어줄 생각 따윈 없으니까. 아마 네가 날 죽였어도 그놈은 네 부하들을 인질로 삼아 너의 능력을 봉인하려 할 것이다.”
“······.”
“봉인의 사슬은 대상자가 거부하지 않아야 두를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그동안 너는 스스로 힘을 봉인해 그들의 노예가 되었던 게 분명해. 그러나 그것은 절대 부하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너의 그런 바보 같은 행동이 오히려 부하들을 더욱 절망으로 빠뜨렸을 거다.”
“······.”
사로스는 묵묵히 상훈의 말을 듣더니 물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하지?”
상훈이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네가 이미 말한 대로야. 하라스가 나의 부하이니 이제 너도 나의 부하가 되어야 한다. 이제부터 날 로드라 불러라.”
“알았다, 로드. 이제부터 난 너의 부하다.”
사로스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상훈은 미소 지었다.
“좋아.”
하라스도 저렇게 했다. 말투가 어색하지만 그래도 저것이 저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라는 걸 상훈은 잘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사로스 너는 더 이상 켈라크스 시스템의 명령을 따를 필요 없다. 오직 내 명령만 따라라.”
“그러겠다.”
일단 이렇게 되면 사로스는 그 어떤 상황이 와도 배신같은 건 하지 않는다. 마치 프로그램에 입력된 것처럼 상훈의 명령이 절대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무조건 상훈의 지시에만 따르기 때문에 외부에 이용당할 여지도 사라지고 말이다.
“그럼 나의 부하들은 어떻게 하지? 내가 로드를 따르게 됐으니 이제 그들이 나의 부하들을 죽일 거야.”
“잘 들어라. 애석하게도 그들이 죽는다면 그땐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철저히 복수를 해줘야 한다. 그러면 그들의 죽음은 명예로운 것이 된다. 지금처럼 네가 그들을 살리겠다고 켈라크스들의 노예 노릇을 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을 모욕하고 절망으로 모는 것임을 잊지마라.”
“알겠다.”
상훈 역시 부하들이나 가족들이 같은 상황에 처한다 해도 방금 말한 것처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오히려 그들을 구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아마 켈라크스들이 널 이용하기위해서라도 쉽게 그들을 죽이지 못할 거야. 너의 부하들은 켈라크스 시스템이 파괴되면 내가 구해주도록 할테니 너무 염려마라.”
“고맙다, 로드.”
시무룩하게 변했던 사로스의 표정이 약간 밝아졌다.
슥.
곧바로 상훈은 세 번째 페르틸라를 챙겼다.
이로써 그는 용맹의 던전을 지배하는 주인이 되었고, 3개의 페르틸라가 주는 효능으로 인해 차원력 회복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사로스! 그놈들이 있는 곳으로 날 안내해라.”
시스템을 벗어나 시스템을 조종하고 있는 켈라크스 수뇌부가 있는 곳으로 간다.
더 이상 시나리오고 뭐고 다 필요없다.
여기서 그놈들을 죽여버리면 시스템 자체가 사라져버릴 테니까.
상훈 혼자서는 아직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사로스가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
이제 그만 끝내자. 이 싸움.
“알았다, 로드.”
사로스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듯 앞쪽에 하나의 게이트를 생성시켰다.
츠으으읏!
그 순간 미지의 상공에 떠 있는 구형체의 내부.
자하드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이런! 이곳에 게이트가 생성되면 끝장이다!”
그는 게이트가 완성되기 전에 급히 소멸시켰다. 아르메스 역시 초긴장한 표정이었다.
“게이트가 생성되어 그놈과 사로스가 이곳으로 이동하면 차원력의 폭주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상훈과 싸우는 걸 두려워하는 게 아니었다.
그 와중에 차원력이 폭주하여 켈라크스 시스템이 파괴되어버릴 수 있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사로스가 지속적으로 게이트 생성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 그녀는 상훈이 그만하라고 하기 전까지 그 작업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로인해 자하드 또한 게이트를 소멸시키느라 다른데 정신을 팔 수가 없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군. 대체 저놈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사로스마저 굴복시킨 것인가?”
“최악의 상황이군요! 이대로라면 시나리오를 더 이상 진행시킬 수도 없어요.”
“내가 최대한 막고 있을 테니 너는 속히 상부에 지원을 요청해라.”
그러자 아르메스가 주저했다.
“상부에 이 상황을 알리는 순간 로드께서는 큰 징계를 받게 되실 지도 몰라요.”
“지금 그건 문제가 아니다. 차원력이 폭주해 켈라크스 시스템이 파괴되면 그때야말로 끝장이야. 시간이 없으니 빨리 지원을 요청해.”
“알겠습니다, 로드.”
한편 상훈은 페르틸라들을 만지작거리며 느긋한 표정으로 사로스가 게이트 생성을 시도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봤다.
‘저 게이트만 생성되면 이 시스템은 끝장난다.’
그러나 게이트가 계속 소멸되고 있는 걸 보면 자하드란 녀석이 그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언제까지 버티나 두고보자.’
이제 사로스는 24시간 단 1초도 쉬지 않고 게이트를 생성시키려할 것이다. 그런 건 그녀에게 조금도 힘든 일이 아니니까.
반면에 그것을 막아내는 쪽은 상당한 힘이 소모된다.
그러다 보면 단 한 번이라도 틈이 생길 터.
상훈은 그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 즉시 게이트를 통해 이동해서 모든 걸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바로 그때.
츠으읏!
자하드와 아르메스의 앞에 번쩍이는 게이트가 생성되더니 하나의 흐릿한 그림자가 그로부터 튀어나왔다. 그 그림자는 점차 선명해지더니 3미터 신장의 거인으로 변했다.
머리에 솟아난 두 개의 뾰족한 뿔에 전신이 붉은 비늘로 뒤덮여 있어 마치 악마와 같은 외양이었다.
“무슨 난리가 벌어졌기에 지원을 요청한 것이냐?”
순간 자하드와 아르메스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그 즉시 허리를 숙였다.
“바스타오님을 알현합니다.”
“위대하신 제 7군황 바스타오님을 알현합니다!”
켈라크스가 다스리는 방대한 영역을 지배하는 7명의 절대자!
그들을 군황이라 한다.
켈라크스의 모든 건 이들 군황들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군황들도 서열이 존재하는데 제 1군황 루치페로가 가장 상위 서열이며 그 아래로 6명의 군황이 존재했다.
그 중 막내라 할 수 있는 제 7군황 바스타오가 직접 나타난 것이다.
바스타오의 뒤를 이어 그를 수행하는 켈라크스 상급 초월자 10여 명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자하드와 아르메스의 표정은 긴장으로 물들었다.
‘설마 바스타오님이 직접 왕림하실 줄은 몰랐구나.’
자하드는 허리를 숙인 상태에서도 한 손으로는 계속 사로스의 게이트를 소멸시키고 있었다.
“자하드! 지금 네놈은 뭐하고 있는 것이냐?”
바스타오는 어이가 없다는 듯 노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자하드를 노려봤다. 자하드는 울상을 지었다.
“차원력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저에 대한 문책은 뭐든 감수할테니 일단 도와주십시오.”
옆에 서 있던 아르메스가 그간 벌어진 일을 빠르게 설명했다.
그러자 바스타오가 안색을 굳히더니 곧바로 시선을 돌려 화면 하나를 노려봤다.
그 화면 속에는 초마력혼돈진의 아공간에서 페르틸라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저 놈이냐?”
“그렇습니다.”
“놈의 정체는?”
“반 켈라크스 연합 소속으로 추정중입니다만 아직 정확한 정체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놈의 실력은?”
그 사이 자하드가 하던 게이트 소멸 작업은 바스타오를 따라온 이들이 대신 수행 중이었다. 자하드는 바스타오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만만히 볼 수는 없습니다만 제가 나서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차원력의 폭주만 아니었으면 벌써 손을 봤을 겁니다.”
“그럼 일단 자하드 네게 놈을 손 볼 기회를 주도록 하겠다.”
“어떻게 말입니까?”
순간 바스타오는 아공간에서 커다란 구슬 하나를 꺼냈다.
“이 구슬은 켈라크스 시스템을 설계한 제 5군황 트리안님이 최근에 만든 것이다. 바로 지금과 같은 사태를 대비해서 말이야.”
그는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걸 통해 시스템 내부에 있는 이들과 강제 상상 결계 결투가 가능하며 승리하면 비록 정신적인 영역에 한해서지만 타격을 줄 수 있다.”
“정신적 타격이라시면?”
“압도적인 전투로 눌러버리면 적의 의욕을 잃게 만들거나 혹은 두려움에 질리게 만들어 항복하게 만들 수 있다. 반대로 패배하면 결투를 시도한 쪽이 그 같은 지경에 처하게 된다.”
상상결계는 초월자들이 가상의 전투를 벌이는 가상 공간.
그러나 그곳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결과는 현실에는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이 구슬을 이용하면 타격을 줄 수 있다니!
비록 정신적 영역에 한해서라지만.
자하드의 두 눈이 번뜩였다.
“이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맡겨주십시오.”
“그럼 이 구슬에 너의 차원력을 쏟아넣어라. 비록 상상 결계라지만 시스템에 무리없이 침투하는 것인만큼 상당한 차원력이 소모될 것이다.”
“염려마십시오.”
자하드는 즉시 구슬에 차원력을 주입했다.
츠으으읏!
대량의 차원력이 구슬로 빨려들어갔다. 자하드는 당황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일순간 구슬이 환한 빛을 내뿜었다.
화아아악!
곧바로 상훈의 주변 공간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누가 내게 상상 결계를?’
자신의 동의없이 강제로 펼쳐지고 있었지만 상훈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소로울 뿐이었다.
혼돈자가 아니면 상상 결계에서 그를 패배시킬 존재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