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고대 신전의 비밀 (3)
라이나엘의 두 눈에서 섬뜩한 한광이 폭사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널 어떻게 제거할까 골치였는데 알아서 나타나주었구나.”
“누가 죽을 줄은 봐야 알겠지.”
“가소로운 버그 놈! 죽여주마!”
스스스스.
라이나엘이 다가오는 순간 사방에 가득했던 광채의 피라미드들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방이 어두워지더니.
그녀를 중심으로 무수한 빛의 검들이 생성되었고, 그것들이 상훈을 향해 무더기로 쏟아져내렸다.
번쩍! 번쩍! 번쩌쩌쩍---!
콰콰쾅! 쿠콰콰콰쾅!
빛의 검들이 작렬할 때마다 거대한 폭발이 일었다.
끝없이 쏟아져내리는 가공할 공세에 결국 공간이 찢어지다 못해 무너져내렸다.
‘······!’
그렇게 초반부터 전력을 다해 미친 듯 공세를 퍼부은 라이나엘은 잠시 공격을 멈추고 상황을 살폈다.
바로 그 순간.
푸확!
시퍼런 빛으로 물든 검의 끝이 라이나엘의 하단전을 뚫고 삐져나왔다. 이어서 그 검이 폭풍과 같은 궤적을 그리며 그녀의 몸을 휘저었다.
촤촤촤촤아악!
그것이 끝이었다.
라이나엘의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그녀의 몸이 산산조각나 흩어졌다.
갈기갈기 찢긴 것처럼 형체조차 남지 않았다.
스스스.
그녀의 부서진 조각들은 이내 먼지로 변해 흩어졌다.
그 사이로 상훈이 묵묵히 서있었다.
“나를 이기려면 공격을 멈추지 말았어야 했다.”
라이나엘이 막대한 차원력을 퍼부으며 공세를 펼치는 동안에는 상훈은 전력을 다해 방어했다.
그러다 라이나엘이 승리를 확신하고 잠시 주춤한 그 틈을 노려 단번에 끝장을 내버린 것이다.
“후!”
본래라면 방어고 뭐고 없이 손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였지만, 차원력이 부족하다 보니 전력을 다해야 했다.
그러나 앞으로 또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덕분에 대량의 차원력을 얻을 수 있게 됐으니까.
츠츠츠츳.
상훈은 라이나엘의 몸에서 흩어진 차원력을 모조리 흡수했다.
츠으으읏!
이것은 얼마전 차원 균열의 과정에서 나타났던 불순한 차원력이 아니다.
그대로 몸에 흡수해 사용해도 되는 순수한 차원력 그 자체.
스슷.
덕분에 상훈의 신체는 금세 말끔한 상태로 돌아왔다.
상급 버그 헌터인 라이나엘의 차원력을 모두 흡수한 그의 기세는 이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드디어 한 녀석을 해치웠군.”
이전에 집행자로 나타났던 파괴자 루터스 같은 하급 버그 헌터가 아니라 상급 버그 헌터를 해치웠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다.”
한놈도 남김없이 다 죽일 테니까.
스스스.
그 사이 다시 나타난 수많은 광채들.
모두 혼돈력을 저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초마력공간진들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광채의 피라미드의 정상에는 자그만 크기의 괴수 한 마리가 날개를 펼친 채 둥둥 떠 있었다.
‘페르틸라!’
이번엔 그림이 아니다.
실체로 존재하고 있으니까.
물론 신화 속의 그 허무맹랑한 괴수가 아니라 켈라크스들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로봇일 뿐이다.
‘일단 챙겨두자.’
켈라크스들이 불완전하지만 혼돈의 힘까지 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상훈도 그에 대응할 준비를 해야 했다.
* * *
그 시간 미지의 상공 속에 위치한 거대한 구형 비행체 내부.
켈라크스 시스템의 수장. 붉은 머리 남자 자하드의 표정은 다소 굳어져 있었다.
“라이나엘이 죽다니! 뜻밖이군.”
“심지어 페르틸라마저 빼앗겼어요.”
아르메스는 우려섞인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것을 회수하지 못하면 우리는 최후의 시나리오를 완성할 수 없어요.”
“알고 있다. 각 시나리오에 하나씩 심어둔 페르틸라가 다 있어야 최후의 시나리오가 완성되는 걸 내가 모를 리 없지.”
자하드는 건조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차피 놈을 죽이고 회수하면 되는 일. 아르메스, 너는 이후 시나리오의 진행에 신경쓰도록 해라.”
“놈에게 버그 헌터들이 계속 당할 가능성도 있어요. 이대로라면 모조리 각개격파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자 자하드가 아르메스를 슥 노려봤다.
“너는 놈이 그리 두려운 거냐? 고작 라이나엘 하나가 패배했을 뿐인데.”
“그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놈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지금으로서는 놈의 정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반 켈라크스 연합에서 심어둔 버그인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이고요.”
자하드가 차갑게 웃었다.
“놈에게 모든 버그 헌터들이 패배할리는 없겠지만 설령 그런 일이 벌어져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최후의 시나리오에 누가 있는지 잊었느냐?”
“그건 그렇군요.”
순간 아르메스의 안색이 밝아졌다. 자하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리셋이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놈을 이용할 생각이다. 어쩌면 놈에 의해 시나리오가 훨씬 빠르게 완성될 수도 있을지 모르지. 지구의 각성자들이라면 한참 걸릴 고난이도의 던전들도 놈이 개입하면 어렵지 않게 해결할 테니까.”
그러자 아르메스의 입가에도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될 수도 있겠군요.”
“놈이 무슨 짓을 하든 상관하지 말고 넌 시나리오를 차근차근 진행시켜라. 각성자들의 숫자를 적절히 유지하는 것도 잊지 말고.”
“예, 로드.”
* * *
한편 그때 상훈은 페르틸라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여기로 계속 혼돈력이 모이고 있다.’
라이나엘은 죽었지만 운명의 던전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던전의 모든 시스템은 달라진 게 없었다.
3보를 해치우고 고대 신전을 발견해 버프를 받는 것도 동일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특별한 행운이 작용할 때 라이나엘이 직접 현신해서 축복을 내려주는 것이 불가능해졌을 뿐이다.
츠읏!
만지작거리면서 살짝 차원력을 주입해봤는데 그 순간 앞쪽에 큼직한 게이트 하나가 생겨났다.
[운명의 던전이 생성되었습니다.]
‘별 기능이 다 있군.’
같은 방법으로 다시 차원력을 주입하자.
[운명의 던전이 소멸되었습니다.]
어디서나 던전을 생성했다가 없앨 수 있다니!
상훈에게는 별 쓸모없는 기능이지만, 서린 등의 레벨을 올려줄 때는 의외로 쓸만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런 기능만 있을까?
혼돈력을 이용해 고작 던전만 만들 수 있다는 건 우스운 일.
시간이 나는 대로 계속 연구해보기로 했다.
‘어쨌든 이건 따로 차원력의 아공간을 만들어 보관하는 게 좋겠어. 고블린 가방의 아공간에 두면 다른 물건들이 다 부서질 테니.’
혼돈의 힘이 모여들고 있는 페르틸라는 그 자체로 위험한 물건이었다. 상훈이니까 장난감처럼 만지고 있는 것이지, 보통 사람이라면 그 즉시 먼지로 변해버릴 것이다.
‘이런 건 안전하게.’
츠읏!
상훈은 페르틸라를 차원력의 아공간에 넣었다.
라이나엘에게 흡수한 차원력 덕분에 이제 아공간 같은 걸 만들어도 별로 부담이 없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볼까?’
곧바로 상훈은 상훈25 2호점으로 이동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아크엘과 서린 등이 반색하며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로드?”
“로드! 무사하셨군요.”
아크엘은 프로스에게 보고를 받긴 했지만 갑자기 던전이 폭발하고 상훈이 사라지자 꽤나 당황한 표정이었다.
“라이나엘을 해치웠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운명의 여신 라이나엘을 해치웠다고. 그러니 이제 그쪽은 신경쓸 것 없어.”
“······!”
순간 아크엘을 비롯해 모두의 표정이 멍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