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현자의 탑 (2)
그때 용족 파렉스가 자이드클로프스 이라프와 함께 뭔가를 잔뜩 짊어지고 나타났다.
“로드! 다녀왔습니다.”
“그것들은 뭐야?”
“건물을 점령하며 얻은 아이템들입니다. 로드께서 버리지말고 저쪽에 쌓아두라고 하셨습니다.”
“맞아. 그랬지. 하지만 안되겠어. 여기가 무슨 쓰레기장도 아니고.”
대부분 Lv30이하의 저렙용 아이템들.
심지어 레벨 제한도 없는 초보 모험가용 장비들도 있었다.
혹시 서린에게 필요할까 싶어서 놔두라고 했는데, 그 사이 저렇게 많이 쌓였을 줄이야.
‘개미들처럼 많이도 모아놨네.’
앞으로도 이런식이면 편의점에 발디딜 틈도 없어질 것이다.
“그 사이 다른 별일은 없었지?”
“예. 근처의 건물들을 점령하며 결계가 있는 장소들은 건드리지 않고 놔뒀습니다.”
“잘했어. 거긴 내가 직접 간다.”
건물에 따로 결계가 있는 곳들!
점포의 가디언이 숨어 있는 편의점과 같은 곳이 대표적이다.
물론 용족인 파렉스는 점포의 가디언들 쯤은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지만, 그들을 굴복시켜 부하로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시스템의 저주를 풀 수 없기 때문이다.
상훈은 쓸만한 전투력을 가진 NPC들은 그냥 해치우기보다 가급적 부하로 만들 생각이었다.
“이제 난 현자의 탑에 갔다올 생각이니 파렉스 네가 이곳을 책임지고 잘 지켜라.”
“맡겨주십시오, 로드.”
상훈은 파렉스에게 서린을 보호하는 것을 비롯한 몇 가지 지시를 내린 후 편의점을 떠났다.
조용-
그렇게 상훈이 사라지자 상훈25 2호점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는 물론 무시무시한 외모를 가진 파렉스와 이라프 때문이었다.
그들은 본래보다 작아져 2미터 신장에 불과했지만, 워낙 흉악하게 생긴 외모와 특유의 흉포한 기세로 인해 엄청난 공포심을 자아냈다.
그러다 보니 서린 등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심지어 사신인 케이드와 맥크도 용족 파렉스 앞에서는 기가 팍 죽은 상태였다.
“겁먹을 것 없다, 소녀여. 나는 로드의 명령을 따라 이제부터 그대를 지켜줄 것이다.”
다행히 파렉스는 서린을 향해 최대한 인상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린은 용기를 내서 물었다.
“당신을 제가 어떻게 불러야 되죠?”
“내 이름은 파렉스다.”
“그럼 파렉스 할아버지라고 부를게요.”
“허헛! 마음대로 해라. 내가 인간에게 할아버지라 불리는 건 처음이구나.”
파렉스는 할아버지란 호칭이 마음에 드는 듯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정말 손녀를 대하듯 자애로운 눈빛으로 편의점 한쪽에 쌓여 있는 아이템들을 가리켰다.
“일단 저기 있는 장비들 중에 필요한 것들을 골라보겠느냐?”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서린은 그쪽 아이템들에 자연스레 눈이 가고 있는 상태였다.
“우와! 대박!”
“로드께서는 쓰레기 잡템들이라 하셨지만 일단 너의 레벨에서는 쓸만한 게 있을 것이다.”
“말도 안 돼요! 희귀 등급들이 어떻게 잡템이에요?”
서린은 기막혀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리자드맨의 단창만 해도 고작 일반 등급의 무기일 뿐이다. 그조차도 원래 쓸 수 없는 걸 상훈이 쓰게 해준 것인데.
지금 이 앞에 쌓여 있는 장비들 중에는 각종 스탯 보너스가 옵션으로 붙어있는 희귀 등급의 아이템들이 수두룩했다. 당연히 평범한 각성자들이라면 쉽게 얻기 힘든 물건들.
그런 걸 상훈은 잡템이라고 했다니 기가막힐 수밖에.
그러나 그녀는 상훈이 전설이나 신화 아이템들도 잡템 취급한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허허! 급할 건 없으니 천천히 골라보거라. 지금 너의 레벨이 15이니 가능하면 레벨 15 제한의 희귀 등급 장비로 맞추는 게 좋을 것이다.”
“네, 파렉스 할아버지.”
서린은 신이 나 있었다. 아이템이 산처럼 쌓여 있는 곳에서 원하는건 뭐든 고를 수 있다니! 게임 같은 이곳 세계에서는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이리라.
숙련 모험가의 한손 검(희귀), 숙련 모험가의 장갑(희귀), 지혜의 귀고리(희귀), 지혜의 반지(희귀)······.
파렉스가 말한대로 서린은 방어구와 무기는 물론이고 장신구들까지 모두 Lv15 희귀 등급으로 골랐다. 또한 이후 레벨이 오를 때를 생각해 Lv20 장비와 Lv30 장비도 미리 골라두었다.
“다 골랐어요!”
“수고했다. 그럼 이제 남은 것들은 카르니안 성의 고블린들에게 가져다줘야겠구나.”
“고블린들에게 준다고요?”
“로드께서 이걸 여기 쌓아두지 말고 치우라 하셨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래도 고블린들에게 주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카르니안 성의 고블린들은 모두 장인들이다. 그들이라면 이 장비들을 녹이거나 쪼개서 더 상위 등급 장비를 만들 수 있단다.”
“그렇군요.”
서린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한쪽에서 그녀를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조성우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저······.”
“뭐냐?”
파렉스가 힐끗 조성우를 노려봤다. 서린에게 보여주었던 자애로운 눈빛이 아니라 용족 특유의 차갑고도 무정해보이는 눈빛.
‘으헉!’
그에 놀라 조성우는 하마터면 오줌을 지릴뻔했다. 그러나 그는 최대한 용기를 내서 말했다.
“하핫! 염치없지만 그렇게 녹이거나 뽀갤거면 저도 좀 주시면 안될까요? 무기라고는 각목하나 뿐이라서요.”
“저도요. 제발 무기라도 하나만 주세요!”
김지현도 와서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성우의 시선은 Lv5제한의 한손 검에 꽂혀 있었고 김지현은 Lv5제한의 스태프에 눈이 가 있었다.
그들도 어설퍼보이지만 각성자다. 그렇지 않았다면 튜토리얼과 시나리오 1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을 테니까.
따라서 아이템을 보면 욕심이 나는 건 당연했다.
“불가하다! 나는 로드께 그런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
그러나 파렉스는 그들에게 서린과 같은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서린은 그의 로드인 상훈이 지키라고 각별히 당부한 존재이기에 특별대우를 한 것일 뿐, 본래부터 그는 인간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로드께 듣기로 너희들은 편의점 청소를 하는 조건으로 이곳에 따라왔다. 아니냐?”
“마, 맞습니다.”
“그럼 저기 있는 이라프의 지시를 받도록 해라. 편의점 관리는 저 녀석 담당이다.”
그러자 한쪽에서 우두커니 서있던 자이드클로프스 이라프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조성우 등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크크크, 알바생들이로군. 그럼 진작 나를 찾아왔어야지. 당장 이리로 튀어와라.”
“옛!”
조성우와 김지현은 울상을 지으며 이라프 앞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한편 그 사이 상훈은 남산이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이동 중이었다. 건물들의 옥상은 물론 고층 빌딩의 옥상도 가볍게 뛰어올라 이동하는 그의 움직임은 바람과 같았다.
‘온통 좀비들 세상이군.’
거리는 좀비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시나리오 1에서 생존한 각성자들이 좀비들에 맞서 자신의 건물을 지키는 치열한 전투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키키키!”
“아악! 살려줘!”
“아아악!”
간혹 사람들이 좀비들에게 죽는 장면도 보였지만, 상훈은 멈춰서 그들을 도와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저들을 다 도와주다간 다른 일을 할 수 없어.’
어차피 켈라크스 시스템만 날려버리면 죽은 사람들도 다 살아나게 될 테니까.
[이곳은 시나리오 3이 진행되기 전에는 진입할 수 없는 공간입니다.]
잠시 후 남산 타워 앞에 이르자 투명한 막과 같은 결계가 앞을 가로막았다.
콰앙!
그러나 상훈이 초마검 젠카(+2)를 뽑아 휘두르자 결계는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다. 동시에 웅장한 남산 타워의 모습은 사라지고 푸른 빛의 원탑형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스-
결계 속에 숨겨진 신비의 건물.
현자의 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