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201화 (202/202)
  • 201. 다시

    2년 후.

    최연소 청와대 요리사란 타이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땐 마치 세상의 주인공이 나인 것처럼 모두가 날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는데….

    출근길이 조금 다를 뿐 여느 직장인들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이었다.

    “오늘은 좀 늦지?”

    “응 중요한 만찬이 있어서 늦을 것 같아.”

    “그럼 난 혼자서 오랜만에 밀린 드라마나 좀 봐야겠다.”

    “그래. 요즘 호텔에 사람 없어서 한참 못 쉬었잖아. 혼자만의 시간을 좀 보내.”

    한샘은 2주 만의 휴무를 한껏 기대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둘의 휴무일을 맞춰 쉴 수 있겠지만 오늘은 한샘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만찬 날이었다.

    “맘 같아선 연차 쓰라고 하고 싶은데 오늘은 특별히 봐준다.”

    “고마워.”

    “선물은 챙겼지?”

    “응 진작에 챙겨 뒀지.”

    내년에 식장까지 예약해 두고 한샘과 나는 한집에 살기 시작했다. 처음 같이 살자고 했을 때 한샘은 청와대 요리사는 계약직이니 좀 더 두고 보자며 농담 섞인 거절을 하기도 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를 수도 있고, 새로운 대통령이 오면 나를 맘에 들어 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자기는 호텔이 망할 리가 없으니 정년까지 잘릴 일도 없다나 뭐라나.

    다행히도 청와대 요리사는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매번 뿌듯하고 사명감이 느껴지는 일이었고, 대통령이 새로 바뀌어도 내 자리는 굳건했다.

    “항상 잘하겠지만 오늘은 특별히 더 잘하고 와.”

    “고마워!”

    생전 입지 않던 정장과 넥타이까지 한 채로 집을 빠져나왔다. 넥타이를 고쳐 매 주는 한샘의 손길도 나만큼 어색했다.

    어차피 조리복으로 갈아입을 테지만 마음가짐을 단정히 하고 싶었다.

    어떻게 변해 있을까.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인데.

    마치 오랫동안 보지 못한 고향의 부모님을 보는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옛날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금의환향.

    빨리 지금 내 모습을 자랑하고 싶고,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 * *

    “안녕하세요 요리사님.”

    “네 좋은 하루입니다. 출입증은 확인 안 하세요?”

    “네 오늘은 특별히 그냥 통과시켜 드리겠습니다.”

    원칙이 그러니 번거로워도 이해해 달라며 매일 그리고 매번 출입증을 확인하던 보안 요원들도 이제는 그냥 농담을 하며 통과시켜 주기도 했다.

    이곳에서도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의미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나이는 이제 겨우 서른이었다.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할 수 있는 이 젊음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저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좋은 하루입니다.”

    “어서 와요 장 셰프.”

    주방으로 들어서며 힘차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목소리는 항상 하나뿐이었다. 조근배 요리사는 아예 퇴근을 하지 않는 건지 아무리 일찍 와도 항상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조근배 요리사 역시 새로운 대통령으로 바뀌고 난 후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이것만 마무리하고 빠져 있을게요.”

    “에이 안 그러셔도 된다니까요. 옆에서 조언도 해 주시고 좀 도와주세요.”

    “아니에요. 나도 이번 기회에 그 꿀이라는 것 좀 빨아 봅시다. 빠져 있을게요.”

    조근배 요리사는 이번 만찬을 내가 직접 준비하고 지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아직 2년밖에 되지 않은 요리사에겐 특혜나 다름없었다. 그렿다고 특별히 나를 더 믿는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오늘 방문하는 손님의 취향을 내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장 셰프도 김용수 대사님 오랜만에 뵙죠?”

    “네 2년 만입니다.”

    “허허 파나르 대사관 터가 좋은가 봅니다. 파나르 출신들이 이곳으로 전부 모이는 걸 보면.”

    조근배 요리사의 농담을 듣자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오늘 만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김용수 대사였다.

    아니, 이제는 장관 후보자로 부르는 게 맞겠다.

    “오늘 대통령님도 격식 없이 편하게 준비하라 했으니 부담 가지지 말고 즐겁게 해 봐요.”

    “네 감사합니다.”

    “나는 휴게실에 있을 테니 무슨 일 생겨도 연락하지 마요. 어떻게든 혼자 해결해 봐요.”

    “네! 알겠습니다.”

    오랜만이지만 익숙한 손놀림으로 음식을 준비했다. 마치 데이터가 등록이라도 된 것처럼 저절로 손이 움직였다.

    “장덕수 셰프님. 이제 음식을 내어 주세요.”

    대통령이 직접 신호를 줬고,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주방을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후보자님.”

    능청스럽게 인사를 건네자 김용수 대사는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악수를 건네려 했지만 김용수 대사는 격한 포옹으로 날 반겨 주었다.

    덕분에 들고 있던 접시까지 놓칠 뻔했지만 서둘러 식탁 위에 올려 두고 나 역시 김용수 대사를 끌어안았다.

    “잘 지냈어요 장 셰프?”

    “보시다시피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김용수 대사의 손길이 닿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반가움에 감정이 북받쳐 흘렀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괜찮습니다. 근데 누가 보면 두 사람 한 20년은 떨어져 지내다 만난 것 같네요.”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코를 훌쩍거리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2년이면 파나르에서 함께 보냈던 시간보다도 짧은 시간인데 왜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을까.

    파나르에서의 3년을 가족처럼 지냈기 때문에 이렇게 감정이 북받쳐 흐르는 거겠지.

    “이 광경 하나만으로도 제가 외교부 장관 하나는 잘 고른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늙은이에게 또다시 기회를 주셔서요.”

    “또라니요. 저는 아직 김용수 대사님의 덕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요.”

    김채훈 대통령을 이어 새로 당선된 최동원 대통령은 김용수 대사의 말에 질투 섞인 말투로 대답을 했다.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다. 여전히 능력이 뛰어나시니 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일해 주셔야지요. 저는 후보자님을 황희 정승처럼 생각할 예정입니다.”

    김용수 대사는 내가 파나르를 떠난 후에도 여전히 수많은 결과를 냈다.

    대기만성도 이렇게 큰 대기만성 사례는 드물 정도.

    덕분에 2번째 파나르 대사의 임기를 채 마치기도 전에 한국으로 소환되어 외교부 장관 후보자까지 될 수 있었다.

    “김용수 대사님과 장덕수 셰프가 파나르에서 함께 근무할 때 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성과를 냈다고 들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냥 손발이 잘 맞았다 정도일 뿐입니다.”

    나와 김용수 대사는 번갈아 가며 겸손을 떨었다.

    그런 모습이 우스웠는지 최동원 대통령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두 사람의 케미를 제 임기 동안에도 맘껏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파나르에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장 셰프가 기발한 음식으로 항상 해결책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호오.”

    “대통령님께서도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을 때면 장덕수 셰프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보십시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네. 꼭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직접 채용하진 않았지만 저 역시 장덕수 셰프를 많이 아끼고, 의지하는 중입니다.”

    아직 청문회라는 관문이 남아 있었지만 김용수 대사는 큰 이변이 없는 한 외교부 장관으로 임명이 될 것이다.

    다른 후보자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 것이 약점이 될 수 있겠지만 일흔이 넘어서 시작한 대사 생활에도 수많은 성과를 낸 것을 보면 나이 또한 발목을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랜만에 입맛에 딱 맞는 음식 잘 먹었습니다 대통령님.”

    “저한테 인사를 할 게 아니라 장덕수 셰프에게 해야죠.”

    “고마워요 장 셰프. 오랜만에 집밥을 먹는 느낌이었어요.”

    “아직은 손이 대사님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허허허 기분 좋은 말이네요.”

    최동원 대통령과 김용수 장관 후보자가 독대하는 만찬은 처음부터 끝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나 역시 주방과 식탁을 오가며 대화에 한두 마디씩을 거들었고, 준비한 음식 또한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장 셰프?”

    “네 후보자님.”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예전에 먹던 그것도 있나요?”

    “그거요?”

    그거라는 물음에 최동원 대통령이 먼저 되물었다.

    “파나르에 있을 때 항상 먹던 것이 있어서요. 식사 후에 한잔하면 속이 편안하고 입 안이 깔끔했는데, 별거 아닌 것 같으면서도 만들기 어려운가 보더라구요. 새로운 요리사한테 부탁을 했었는데 예전 그 맛이 나지 않아서 좀 아쉬웠어요.”

    “그게 뭔가요 장덕수 셰프? 오늘 준비가 되어 있나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김용수 대사에게 처음 대접했었던 음식.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꾸역꾸역 매운 생양파를 삼키려던 김용수 대사의 모습이.

    그리고 그걸 억지로 먹으려는 이유가 뭔지도 잘 알기 때문에 미련하다고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양파주스는 넉넉히 만들어 뒀습니다. 가실 때 몇 병 챙겨 가셔도 됩니다.”

    “양파주스요?”

    “하하 역시. 고마워요, 장 셰프.”

    짙은 갈색의 양파주스가 가득 담긴 컵을 마지막 음식으로 가지고 나왔다.

    처음 보는 음식이라 조금은 경계심을 가지고 쳐다보는 최동원 대통령과 신이 난 표정으로 곧바로 양파주스를 들이켜는 김용수 대사.

    “이렇게 좋은 게 있으면서 왜 나한테는 여태 만들어 주지 않았습니까.”

    “죄송합니다. 청와대엔 워낙 좋은 재료들이 많아서요.”

    “이거 아주 맛있네요. 나도 종종 먹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예전 파나르의 김용수 대사님처럼 저도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요?”

    최동원 대통령의 농담 덕에 청와대 관저에서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 * *

    인천 국제공항.

    한국 대통령의 파나르 방문이 최초로 있고 난 후 몇 년 뒤 파나르 대통령의 방한 일정 또한 최초로 계획되었다.

    김용수 외교부 장관은 파나르 대사였을 때의 친분으로 직접 공항으로 나가 파나르 대통령을 맞이했다.

    전용기가 착륙하고, 익숙한 얼굴의 파나르 대통령이 역사상 최초로 한국 땅을 밟았다.

    “어서 오세요 바누스 대통령님. 한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하하하 몇 년 만인가요. 김용수 대사, 아니 장관님. 잘 지내셨습니까?”

    두 노장은 오랜만에 만난 전우처럼 진하게 포옹을 했다.

    김용수 장관은 아무런 힘이 없던 파나르 대사 첫해, 바누스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 그땐 파나르 외교부 장관이었던 바누스가 이제는 파나르의 대통령이 되어 한국을 찾아왔다.

    “혹시 그때 요리사로 일하던 미스터 장의 소식은 알고 있습니까?”

    두 사람은 옛 추억들을 공유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러던 중 장덕수 셰프의 이름까지 나오게 되었다.

    “미스터 장의 음식이 참 맛있었는데… 저와 장관님이 가까워진 것도 어찌 보면 미스터 장의 음식 덕분이 아니겠습니다.”

    “장덕수 셰프를 아직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하하 물론이죠. 그때 먹은 음식이 아직도 종종 생각이 날 정도인데요.”

    “그럼 그 음식 이번에 다시 맛보게 해 드리겠습니다.”

    김용수 장관은 바누스 대통령과 함께 장덕수 셰프가 만찬을 준비하고 있는 청와대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또 다른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대통령님. 이번 만찬의 통역을 담당하게 된 임윤아라고 합니다.”

    “어? 우리 초면 아니죠? 반가워요.”

    윤아는 파나르어로 인사를 건넨 뒤 자신을 기억해 주는 바누스 대통령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5년 전 바누스 대통령 앞에서 꼼짝도 못 하던 김용수 장관과 장덕수 셰프, 그리고 임윤아 통역사 이 세 사람은 청와대에서 다시 한번 뭉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별말이 없이도 척척 손발을 맞춰 가며 만찬을 진행했다.

    * * *

    몇 년 후.

    “여보. 오늘은 당신이 등원시키는 날인 거 알지? 다시 잠들지 말고 잘 보내. 알았지?”

    “응 걱정 말고 잘 갔다 와.”

    한샘은 덕수가 차려 놓은 아침밥을 서둘러 삼킨 후 호텔로 향했다. 한샘의 당부에도 덕수는 현관이 닫히자마자 딸을 끌어안고 침대 속 이불로 들어갔다.

    “우리 딸 유치원 가고 싶어? 아니면 아빠랑 놀고 싶어?”

    “아빠랑 놀고 싶어.”

    “어? 정말? 아빠도 우리 딸이랑 놀고 싶은데. 그러면 엄마한테는 유치원 갔다 왔다고 말해야 해. 알았지?”

    덕수의 어린 딸은 신이 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딸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덕수 또한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 날씨 좋네.”

    커다란 베란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을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덕수는 이제 자신이 회귀자인지 아닌지도 까먹어 버렸다.

    사랑하는 아내는 이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한샘이었고, 옆에서 티브이를 보며 종알거리는 딸의 얼굴도 자신이 알고있는 그대로였다.

    호텔에서 청와대로 장소만 바뀌었을 뿐 가장 좋아하는 요리를 하고 있다는 것도 그대로이고.

    젊어진 나이도 이제는 익숙했다.

    낯설기만 했던 두 번째 삶도 어느덧 진짜 삶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아빠는 조금만 더 잘게.”

    아직 한참이나 남은 두 번째 인생에서 또 어떤 행복이 찾아올지 기대가 되는 하루였다.

    덕수는 한샘을 쏙 빼닮은 딸의 얼굴을 보며 달콤한 낮잠에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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