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98화 (199/202)
  • 198. 가장 중요한 재료

    이번 채용에서는 반가운 얼굴이 몇 명 보였다.

    함께 호텔에서 근무를 하던 동료들도 구경을 하기 위해 찾아왔고, 무사히 적응하고 있단 소식만 들었지 그 후론 만난 적 없었던 파키스탄 요리사 승재의 얼굴도 볼 수 있었다.

    “형님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하하 잘 지냈는지 모르겠다. 나는 대사관 요리사로서 일할 운명은 아닌가 보다.”

    “왜요? 또 대사님이 힘들게 합니까?”

    저번 대회처럼 내내 시무룩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또 생겼나 보다.

    파키스탄 대사도 정신을 차리고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단 말도 들었던 것 같은데.

    본성은 숨기지 못했던 걸까?

    “그때 그 대사님은 한참 전에 한국으로 들어가셨어.”

    “에? 왜요? 잘하고 계신 것 같더니.”

    “직원들한테 고발당했어.”

    “고발이라뇨? 무슨 잘못이라도 하셨어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 보다.

    뜬금없이 고발이라니.

    오히려 파라과이 대사 쪽에서 들려와야 할 소식이 파키스탄에서 들려왔다.

    “파나르에서 돌아가고 한동안은 으쌰으쌰 열심히 했었어. 만찬이 너무 많아서 힘들 정도로 열심히 했었는데 그걸 이해해 주는 직원들이 없는 게 문제였지.”

    “아….”

    대충 뭐 때문인지 느낌이 왔다.

    요리사들 채팅방에서도 만찬이 많지만 즐겁다며 행복한 고민을 털어놓던 승재였다.

    “사무실 직원들한테도 밤낮없이 주말 없이 일을 시키니깐 버텨 내질 못하더라. 너야 잘 알겠지만 우리 요리사들은 하루에 12시간 이상 근무하는 게 일상이잖아.”

    “그렇기야 하죠.”

    “근데 공무원들한텐 그게 쉽지 않지. 어렵게 합격한 시험이니 일을 그만둘 수도 없는 거고.”

    “그래서 대사님을 고발한 거예요?”

    승재는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기를 다 못 채우고 대사가 교체되었는데, 새로 오신 분도 얼마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셨어. 전임 대사를 고발한 직원들을 100% 신뢰하기 어려웠겠지.”

    “악순환이었네요.”

    “맞아. 지금 대사님이 벌써 3번째인데, 이분도 간당간당해. 그래서 나도 내 살길을 찾아야 하니 양해를 구하고 여기 지원하게 됐지.”

    그 말을 끝으로 승재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파키스탄에서 자기 이름을 날려 보겠다고 다짐을 하던 그 얼굴이 떠올라서 더욱 안타까웠다.

    “정들 만하면 바뀌어서 손발 맞춰 볼 기회도 없었어.”

    “허허 다른 대사관과는 정반대네요. 다른 곳은 요리사를 계속 갈아 치우기 바쁜데.”

    “그러게 말이다.”

    생각처럼 일이 술술 풀린 건 아니었지만 덕분에 승재의 의욕은 더욱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뭔가를 만회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여튼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고 지금 이거에나 집중하시죠. 형님.”

    “그래야지. 덕수 넌 준비 많이 했어?”

    “네 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했습니다.”

    “휴우. 내가 널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겸손하시네요. 실력은 저보다 좋으시면서.”

    “후후.”

    나도 겸손이었지만 승재의 실력은 확실히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누가 더 우위라는 건 가릴 수 없었고,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서 승부가 날 수 있는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의 실력은 모르겠지만 승재가 가장 강력한 경쟁자 중 한 명이란 건 확실했다.

    “지원자분들은 이곳으로 모여 주세요.”

    진행자의 안내에 따라 1차 서류를 통과한 지원자들이 한곳으로 모였다.

    얼핏 둘러보니 대략 15명 정도.

    생각보단 제법 많은 인원이었다.

    15대 1의 경쟁률이라.

    높기는 했지만 불가능한 수치는 아니었다.

    파밧 파밧-

    지원자들이 한곳에 모이자 여기저기서 셔터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송국에서까지는 아니었지만 제법 많은 기자들이 현장에 모여 있었다.

    “까다로운 서류 전형을 통과하신 분들께 먼저 축하의 말씀을 전합니다.”

    뒤이어 짧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2차 실력 테스트를 통해 총 3명을 추려 내고, 마지막 면접을 통해 최종 합격자를 결정할 예정입니다.”

    곳곳에서 긴장이 섞인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번 테스트의 과제는 사전에 공개되었던 대로 약식 동원을 기반으로 한 한식과 재외 동포들의 음식을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미리 알고 있었지만 과제가 공개되자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준비한 레시피를 빠르게 훑었다.

    여러 번 연습을 한 탓인지 하나도 막힘없이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선공개된 두 가지 과제 외에 지금 이 자리에서 또 하나의 과제를 공개하려 합니다.”

    “네? 지금이요? 과제가 또 있습니까?”

    “갑자기 그런 게 어딨습니까?”

    “사전에 고지도 없이 그런 게 어딨습니까?”

    갑작스러운 과제 공개에 지원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꽤 강한 어투로 항의가 이어졌다.

    한참 동안 불만을 쏟아 낸 뒤 지원자들은 잠잠해졌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놀란 이유가 조금 달랐다.

    갑자기 과제가 공개된 것보다 김상현 주방장님의 통찰력에 놀랐다. 심사 위원으로 경험이 많은 사람이 과제 예상도 잘하는구나.

    “청와대에서는 외부에 공개되지 않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일들이 자주 발생하곤 합니다. 일정이 변경될 수도 있고, 단순히 변심일 수도 있고, 급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

    “사전에 과제가 공개되고 지원자분들 연습 많이 하셨죠?”

    당연한 질문에 지원자들은 당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수십 번씩은 연습을 했겠지.

    원래도 기본기가 좋은 이들이 수십 번 연습을 거쳐 만들어 낸 음식은 얼마나 완성도가 높을지 안 봐도 뻔한 상황이었다.

    “꼼꼼히 준비하고 계획한 만찬은 여기 계신 모두가 잘 해낼 수준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조금이라도 차이를 발견하기 위해 과제 하나를 더 준비했습니다. 모두가 같은 상황이니 본인만의 방식으로 변수에 대응해 주시면 됩니다.”

    “그래서 그 과제가 뭡니까?”

    “빨리 공개해 주세요. 조금이라도 더 생각해야 하니까요.”

    지원자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판단되었는지 태도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진행자는 곧바로 준비한 과제를 공개했다.

    “세 번째 과제는 김채훈 현 대통령의 생일상을 준비해 주시면 됩니다.”

    “생일상이요?”

    “청와대 요리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물론 만찬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중요하고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게 대통령님의 일상식입니다.”

    대사관 요리사도 똑같았다.

    오, 만찬 행사 진행이 주 업무지만 공관장의 일상식에 좀 더 신경을 쏟고 시간을 투자한다. 공관장의 입맛과 건강을 파악하기 위해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것도 일이었다.

    “본인들이 알고 있는 김채훈 대통령의 식성이나 취향 등을 고려해서 생일상을 만들어 주세요. 평가는 대통령님이 직접 하실 겁니다.”

    “네? 직접이요?”

    대통령이 직접 나설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 진행하는 공개 채용인 만큼 좀 더 신경이 쓰이는 모양.

    임기 말년임에도 이런 행사까지 직접 나서 주는 김채훈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이 생일상 과제의 배점이 3개의 과제 중에서 가장 큽니다. 신중히 생각하고 요리를 해 주시길 바랍니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미리 공개된 과제만 주야장천 연습했을 테니까.

    예상하지 못한 일을 맞닥뜨리면 특히 당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 역시 예전엔 비슷한 성향이었다. 그렇기에 호텔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는지도 모른다.

    변수라고 해 봤자 거기서 거기였고, 호텔에선 웬만해서 갑자기 뭔가를 만들어 내야 할 일은 드물었다.

    “덕수야.”

    “네 승재 형님.”

    본격적으로 테스트가 시작되기 전 승재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역시 과제가 너무 쉽다고 생각했었는데 숨어 있는 게 있었구만. 어쩌냐? 갑자기 하려니깐 머릿속이 하얗네.”

    승재를 비롯해 대부분의 지원자들은 새로운 과제에 당황하고 있었다. 근데 이상하게 나는 왜 마음이 평온해지는 걸까.

    걱정은커녕 되레 떨리는 심장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뭔가 신선한 아이디어가 떠오른 건 아니었다.

    김채훈 대통령의 생일상이라면 그냥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만 올리면 되는 거 아닌가?

    “그냥 대통령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올리면 되는 거 아니에요?”

    “말이야 쉽지. 티브이에선 자주 봤을지 몰라도 우리가 대통령을 직접 만나 본 적도 없고, 음식을 해 준 적도 없으니 뭘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잖아.”

    “그렇긴 하네요.”

    “덕수 넌 긴장도 안 되나 보네? 무덤덤한 거 보니. 뭔가 준비한 게 따로 있어?”

    나도 나 자신이 이상했다.

    나도 기억 못 하는 뭔가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역시나 별거 없었다.

    “아니요 그런 건 없는데, 이상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생일상을?”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집중을 하고 생각을 하면 정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김채훈 대통령이라면 두 번이나 직접 만난 적이 있었다. 그중 한 번은 만찬에 참가하기도 했었다.

    한 번도 대통령을 대면한 적 없었던 다른 요리사들보단 유리한 상황인 건 확실했다.

    “형님도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으세요?”

    “내가? 왜?”

    대사관 요리사라면 나처럼 손님들과 공관장의 행동이나 습관을 보며 식성을 파악하곤 할 텐데.

    물론 직접적으로 말을 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요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면 자기의 식성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기도 한다.

    특히 평생을 공부만 해 온 공관장들이 더 그렇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공관장들도 그렇고, 다들 외국인 손님들이니깐 눈치 보면서 식성을 파악하고 그러지 않으셨어요?”

    “음….”

    승재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만 하려고 하면 대사님이 바뀌어서 그런 걸 연습할 기회가 없었네. 나는 현지인들하고 친해질 기회도 별로 없었고.”

    “아….”

    “너처럼 손발이 맞는 대사님이랑 일하면 그런 능력도 키울 수 있구나. 몰랐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나는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했었는데.

    이제 난 처음 본 사람들의 걸음걸이만 봐도 식성을 파악하려는 습관이 생겼다.

    “여튼 둘 다 최선을 다해 보자. 대사관 출신 요리사는 너랑 나뿐인 거 같으니까.”

    “네 형님. 최종 3인까지는 올라가 보시죠!”

    어찌 됐든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청와대에서 원하는 정답이 아니어도 압도적인 맛이 있다면 결과는 뒤집힐 수도 있는 거다. 일단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면 첫 번째 과제를 시작하겠습니다. 필요한 재료를 모두 챙겨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지원자들은 필요한 재료들을 리스트로 만들어 사전에 주문을 했다.

    1, 2과제에 대해서는 현장에서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가 없었다. 얼마나 준비를 잘해 왔는지의 싸움이었다.

    분명 모두가 수준급의 음식을 준비해 왔겠지만 여기서도 순위는 갈린다.

    배점이 낮다 해서 대충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장덕수 씨?”

    “네 맞습니다.”

    “신청하신 재료가 민물새우, 당근, 양파, 오이, 소면 그리고 조… 미료? 가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조미료라는 말에 재료를 나눠 주는 사람은 물론이고, 주위 참가자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리고 곳곳에서 들려오는 실소.

    하지만 난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 조미료야말로 내가 준비한 음식에 가장 핵심적인 식재료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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