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97화 (198/202)
  • 197. 경험에서 나오는 바이브

    파나르 국제공항.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대사관의 모든 직원이 공항까지 배웅을 나와 주었다. 김준우 서기관의 가족들까지.

    진짜 가족처럼 지냈던 사람들이었는데, 떠나려니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주말인데도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나와야죠.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그러니까요. 요리사님 덕분에 즐겁게 일했었습니다.”

    아빠의 신호에 맞춰 진우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그리고 조심스레 팔을 벌리며 나에게 안겼다.

    “삼촌 조심히 가요. 다음에 만나면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 주세요.”

    “그래 진우야. 삼촌 까먹으면 안 돼.”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진우.

    저번에 만났을 때보다 묵직해진 진우를 안자 새삼 시간이 빠르다는 걸 실감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종종 안부 좀 전해 줘요. 장 셰프.”

    “물론입니다. 자주 연락드리겠습니다. 귀찮아하시지나 마시죠.”

    “허허 내가 귀찮아할 리가 있겠어요? 가족이라곤 여기 직원들이 전부인데.”

    농담처럼 내뱉었지만 씁쓸함이 묻어 나왔다.

    김용수 대사는 얼마 전 공식적인 인사 발령이 있었다.

    주파나르 한국 대사로 3년을 더 근무하기로.

    날 대신해 새로운 요리사도 올 것이고, 대사관 직원들 역시 도중에 물갈이가 되겠지만 김용수 대사의 아래에선 모두가 제 역할을 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대사님 덕분에 많이 성장했습니다. 반드시 좋은 소식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래요. 내년 공관장 회의 땐 거기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랄게요.”

    아쉬움에 마지막까지 입국장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꼭 다시 한번 모이는 날이 오기를 속으로 기도했다.

    김용수 대사, 안지용 참사관, 김준우, 예민희 서기관 그리고 윤아와 카리나까지.

    내 파나르 가족들의 이름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입국장으로 들어섰다.

    -나는 이제 비행기 탔어 한샘아. 너도 곧 출발이지? 조심히 오고 한국에서 보자! 여기 의자 장난 아니다.

    비행기가 뜨기 전 한샘에게 퍼스트 클래스 자리를 자랑하며 아까의 아쉬움을 달래는 중이었다.

    한샘 역시 몇 시간 후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 * *

    서울의 한 부동산.

    3년 만에 돌아온 한국의 공기는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중간에 몇 번 방문을 했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잠시였지만 고향에 돌아온 반가움보다는 불안함이 앞섰다.

    그만큼 파나르가 편했다는 의미겠지.

    청와대에 입성을 하든 못하든 이제는 한국에서 살아야 했기에 집을 찾으러 부동산엘 방문했다.

    “혼자 살 집 찾으시는 거예요?”

    “음… 두 명이 살 것 같습니다.”

    “친구랑 살 집 찾으시는구나. 월세? 전세?”

    “매매로 알아봐 주세요.”

    “아 매매요? 그럼 결혼하셨어요?”

    중개사의 눈에도 아직은 내가 앳돼 보이는지 매매라는 말에 눈이 터질 듯 커졌다.

    3년간 일만 하며 모은 것과 알렉스 덕에 적지만 매매를 알아볼 수 있는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집이라도 있어야 한샘에게 좀 더 당당할 수 있을 테니까.

    회귀 전에 전세는커녕 월셋집을 가지고 대뜸 같이 살자고 했으니, 얼마나 불안했을지 짐작이 갔다.

    그런 날 믿고 결혼해 준 한샘이 새삼 대단하다 느껴졌다.

    내가 아니라 자기를 믿고 결혼한 거라 항상 말했었지만.

    여하튼 그때보단 더 상황이 좋은 건 확실했다.

    “특별히 원하는 거라도 있으세요? 화장실이 좀 넓다든지, 거실이 작아도 안방이 크다든지 뭐 이런 거요.”

    “음….”

    중개사의 질문에 잠시 생각을 하다가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 입을 열었다.

    “주방이 크고 넓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건 필요 없어요.”

    “주방이요? 알겠습니다.”

    어렵지 않은 요구 사항 덕분인지 금세 마음에 드는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조금은 오래되었지만 호텔과 가까웠고, 청와대로 가는 길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샘은 다시 호텔로 복직할 거고, 나는 청와대로 들어갈 거란 기대를 하며 구한 집이었다.

    * * *

    -여보세요?

    -헬로우?

    -헬로우요? 주방님. 핸드폰에 떡하니 제 이름이 뜰 텐데 너무 오버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 덕수냐? 일하는 중이라 확인도 안 하고 받아서 그래. 겨우 헬로우 가지고 오버라니.

    한국에 돌아오면 꼭 보고 싶었던 또 한 사람.

    비록 지금은 한국에서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하고 싶은 말이 많아 전화를 걸었다.

    -거긴 좀 어떠세요? 할 만해요?

    -여기? 너무 좋다. 왜 진작에 나올 생각을 안 했는지 모르겠네.

    -하하 다행이네요. 주방장 타이틀을 빼앗겼는데도 좋아요?

    김상현 주방장은 해외로 발령을 내 주는 대신 직급은 한 단계 강등이 되었었다.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지만.

    -그게 제일 좋아. 모든 걸 책임지지 않아도 되잖아. 뭐 하려고 그렇게 승진에 목매었는지 모르겠다.

    -그러게 말입니다. 별것도 없는데….

    나도 모르게 옛 생각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릴 하냐? 누가 보면 평생 한 호텔에서 주방장 하다가 은퇴라도 한 줄 알겠다.

    -흐흐 그때 되면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앞으로 남은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진 모르겠지만 한 회사에만 매달리는 짓은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이다.

    돈을 벌지 못해도, 유명해지지 않아도, 명예롭지 않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인생을 살 것이다.

    그런 의미로 청와대 입성은 반드시 이루고 싶은 꿈이었다.

    -그나저나 준비는 잘되어 가?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연락드렸어요. 주방장님이라면 뭔가 정보를 줄 것 같아서요.

    지금은 스스로를 내려놓고 해외로 떠났지만 그 전까지 김상현 주방장은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요리사 중 한 명이었다.

    청와대 요리사 총괄을 맡고 있는 조근배 요리사와 비교해도 동급이었다.

    그래서 저번 대회 때도 심사 위원으로 참가했던 거였고.

    그런 사람이라면 뭔가 괜찮은 아이디어를 주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으로 연락을 했다.

    -실력 테스트에서 어떤 주제가 나올지는 이미 공개되었지?

    -네 약식 동원을 주제로 한 요리와 재외 동포들의 음식 문화를 재해석하라는 게 주제입니다.

    -음….

    김상현 주방장은 주제를 듣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미 주제에 대해서는 들어서 알고 있는 듯했지만 뭔가 맘에 걸리는 게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상해.

    -네? 뭐가요?

    -주제 말이야. 조금 독특하긴 하지만 그렇게 난도가 있는 주제는 아니란 말이지.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약식 동원이란 단어가 뭔가 어려워 보이지만 요리사로서 고객의 건강을 신경 써서 음식을 만드는 일은 당연한 것이다.

    특히 만찬처럼 코스로 메뉴를 구성할 땐 육류와 생선 그리고 채소류가 골고루 들어간 음식으로 코스를 짜는 게 당연했고, 알레르기나 지병을 미리 알려 주면 그 식재료는 피해서 요리를 하곤 했다.

    -청와대 요리사에 서류를 통과할 사람들 정도라면 크게 어려운 주제도 아니지. 게다가 한참 전에 공개해서 준비할 시간도 많았을 테고.

    -그렇긴 해도 뭐 난해한 상황을 제시하고 그러지 않을까요?

    -그래 봤자 알레르기나 지병 정도겠지. 우리가 한의사도 아니고, 더 깊이 들어가면 본질을 잃어버릴 수 있거든.

    김상현 주방장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역시 심사 위원으로서 경험이 많은 사람다운 통찰력이었다.

    -그리고 재외 동포 음식은 오히려 더 쉽지.

    -그래요?

    -당연하지. 한번 생각해 봐. 해외에서 사는 재외 동포들이 제대로 재료를 갖춰서 한국 음식을 만들 수 있었겠냐? 김치에 청각이나 젓갈을 입맛대로 넣을 수 있었겠냐 말이야. 그냥 비슷한 재료나 있는 것만 넣어서 만들었겠지.

    고려인들의 국시도 그러했다.

    한국 음식이 미칠 듯이 그립지만 구할 수 있는 재료는 한정적이었다. 조금이라도 냄새와 식감이 비슷하다면 원래 재료 대신 활용하곤 했다. 고려인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재외 동포 음식들이 그러했다.

    -그러니 재외 동포들의 음식들은 오히려 정통 한식보다 훨씬 만들기는 쉽겠지. 사용하는 재료도 훨씬 적을 테니까.

    -듣고 보니 그렇네요.

    -이런 상황에서도 독특한 아이디어를 내고, 실력이 출중한 사람이 뽑히겠지만 나는 이것 말고도 뭔가 더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더라면 다른 주제 말씀이신가요?

    -응!

    김상현 주방장의 목소리엔 확신에 차 있었다.

    -사실은 내가 조근배 셰프님과 요즘도 종종 연락하거든.

    -정말요?

    -그러면 안 되는 거 알면서도 덕수 네 생각이 나서 이번 채용에 대해서 슬쩍 말을 꺼내 봤어.

    나도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속으로 김상현 주방장을 응원했다.

    알짜배기 정보를 알아냈길 바라며.

    -근데 조근배 요리사님은 이번 공개 채용에 아예 관여를 안 하신대.

    -네? 왜요? 심사 위원도 안 하시구요?

    -응. 심사 위원은 물론이고, 아예 기획에도 참여 안 하셨대.

    내 생각과는 전혀 반대였다.

    오히려 조근배 요리사가 나서서 총괄을 하고, 기획을 할 줄 알았는데.

    완전히 손을 떼 버렸다니. 그 이유가 궁금했다.

    -왜 그러셨대요? 공개 채용이 맘에 안 드셨나?

    -그런 건 아니고, 이번 채용에 서류를 내는 사람들 중에 자기가 사적으로 아는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아서 그러셨대.

    -공정한 평가를 못 할까 봐서요?

    -응. 아무래도 조근배 요리사와 아무런 인연이 없었던 사람이면 불리할 수 있지.

    -아….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은 유리한 상황이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조근배 요리사와 몇 번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함께 일을 해 본 적도 있었으니 그의 성향을 다른 사람들보다는 많이 알고 있다 자신했다.

    -아주 칼 같은 분이셔.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참 멋있는 분이야. 너도 혹시나 청와대 들어가게 되면 조근배 셰프님께 잘 배워라.

    -네 알겠습니다. 그래도 저한테 1등 셰프는 김상현 주방장님이신 거 알죠?

    -하하 요놈 능글맞은 건 여전하네. 나한테도 네가 1등 제자 중 한 명이다.

    -제자들 중 한 명이요? 저는 주방장님 딱 한 명이라고 했는데.

    -나는 너보다 경력이 길잖냐. 한 명만 딱 뽑을 순 없어.

    -이해하겠습니다.

    크게 의미가 없는 대화였지만 이상하게도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든든한 응원을 받은 느낌이랄까?

    -그래 덕수야. 결과가 어찌 될진 모르겠지만 원하는 걸 꼭 이뤘으면 좋겠다. 그리고 혹시나 청와대 요리사가 되더라도 거기서 은퇴할 생각은 하지 말고, 최대한 많은 걸 겪어 봐.

    -그건 제가 주방장님께 해 드린 말 같은데요?

    -맞다. 네 덕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만 세상은 정말 넓고 재밌는 일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넌 아직 젊고 책임질 가족도 없으니 원하는 걸 포기하란 말은 안 할 테니깐 목표를 꼭 이루고, 곧바로 더 큰 꿈을 꾸길 바란다.

    이것보다 더 큰 꿈이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아직 나에게는 시간이 많다. 하나하나 차근히 이루다 보면 또다시 원하는 게 생기지 않을까?

    회귀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결정했던 그때처럼 정신을 놓을 정도로 하고 싶은 일이 또다시 생길지도 모르지.

    그때의 설렘을 또 한 번 느낄 날을 고대하며, 한 발자국을 더 앞으로 내디뎠다.

    * * *

    청와대 관저의 주방.

    일반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은 공간이지만 특별히 서류 통과자들에겐 주방이 공개되었다.

    그리 크지 않고, 오래되었지만 고풍스러움이 느껴지는 주방이었다.

    “최종 합격을 하게 되면 이 주방을 자주 이용하게 될 것입니다. 대통령님의 관저 만찬 및 일상식을 준비하는 공간입니다.”

    자연스럽게 그곳에 서 있는 내 뒷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 짧은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두근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회를 치르기엔 비좁은 공간이라 실력 테스트는 별도의 공간에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지원자들에게 특별히 이곳을 보여 주는 이유는 예비 청와대 요리사로 사명감을 가지라는 의미에서 공개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진행되는 공개 채용인 만큼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청와대였다. 제대로 된 옥석을 골라내지 못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거겠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해서 지원자들의 실력을 끌어내려는 청와대였다.

    “그럼 자리를 옮겨서 실력 테스트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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