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96화 (197/202)
  • 196. 귀국 준비

    일흔이 넘은 김용수 대사의 건강 검진 결과에는 뭐가 적혀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게다가 3년간 밤낮없이 뛰어다녔으니까.

    그래도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말을 직접 듣고 싶진 않았다.

    함께 지내는 동안 정이 많이 들었는데….

    “결과가 어떻게 나오셨습니까, 대사님.”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긴장된 맘을 부여잡고 침을 꿀꺽 삼켰다.

    “회춘했답니다.”

    “네?”

    “더 젊어졌답니다. 몸 상태가 거꾸로 가고 있대요.”

    “정말요?”

    예상과는 다르게 김용수 대사의 몸 상태는 오히려 좋아지고 있었다.

    과로와 불규칙한 수면 패턴 등으로 몸이 망가졌을 줄 알았는데.

    “혈당도 거의 정상 수준으로 내려왔고, 혈압은 물론이고, 피부 결도 오히려 좋아졌다고 의사가 아주 칭찬을 하던데요?”

    “정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게 다 장 셰프 덕분이죠.”

    알렉스와 제스는 김용수 대사의 말을 듣고는 서둘러 양파주스를 한 컵 더 삼켰다. 그리곤 눈치를 보며 또다시 컵을 들이밀었다.

    “하하하. 많이 있으니깐 천천히 드세요.”

    “대사님의 말을 듣고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어요. 한 잔 더 주세요 미스터 장.”

    “돈 주고 사 먹는 한이 있더라도 많이 마시고 가야겠습니다.”

    두 사람의 넉살 덕에 식탁은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정말 다행입니다. 대사님. 타지에서 원하는 것도 실컷 못 드시고,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하셔서 많이 걱정했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허허 끼니를 못 챙겨 먹다니요. 타지에서 원하는 것을 못 먹고 지냈다니요! 그건 장 셰프의 업적을 너무 폄하하는 것 아닙니까?”

    먹고 싶은 건 최대한 먹을 수 있도록 식사에 신경을 썼었다. 뭐가 먹고 싶다고 직접 말한 적은 거의 없었지만 최대한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 주려고 노력을 했었다.

    “대통령님께서 처음에 하셨던 약속을 제대로 지킨 것 같아요.”

    “대통령님께서요?”

    “파나르라는 나라가 힘들 텐데, 먹는 거라도 잘 먹을 수 있게 해 준다고 약속하셨거든요.”

    “…아.”

    “그래서 장 셰프를 나에게 보내 주셨나 봅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김용수 대사의 건강이 좋아졌다는 건 요리사로서도 아주 반가운 소식이었다.

    덕분에 내 몸 상태도 더 좋아졌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고.

    “3년 동안 날 위해 최선을 다해 줬으니깐 나도 이제 장 셰프를 보내 줘야겠죠.”

    김용수 대사는 말끝을 흐리며 양파주스 한 잔을 더 삼켰다. 아쉬움을 애써 삼키는 듯한 표정이었다.

    “자 그럼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볼까요?”

    “덕분에 너무 잘 먹었습니다. 미스터 장, 그리고 대사님.”

    “저희가 두 분의 도움을 받은 거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죠.”

    “아닙니다. 마냥 도움만 받은 건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쇼. 저희 둘 다 미스터 장 덕분에 큰 걸 얻었습니다.”

    만찬을 끝낸 두 사람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체질에 맞는 음식을 먹어서인지 이 만찬 자리가 부담 없고 즐거워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오늘 이 식사가 아주 만족스러웠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 없이 확실했다.

    “미스터 장.”

    “미스터 장.”

    알렉스와 제스는 동시에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양손을 내밀어 두 사람의 손을 잡았다.

    “미스터 장 덕분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어요. 쿠므스 사업도 완전히 안정을 찾았고, 얼마 전 성사된 사업도 아주 잘되고 있습니다. 다 미스터 장의 도움 덕분입니다.”

    알렉스는 쿠므스 사업을 정상 궤도로 올려놓은 뒤 정부에게 전부 넘겨주었다. 자신이 운영을 하면 큰돈을 벌 수 있겠지만 이건 국가 차원에서 진행하는 것이 옳다며 깔끔하게 손을 털었다.

    애국심 하나는 끝내주는 사람이었다.

    “우리 파나르의 문화도 한국의 문화처럼 널리 퍼질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런 날이 오면 미스터 장의 역할이 컸다고 내가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겠습니다.”

    “풉 감사합니다. 저 역시 알렉스 덕분에 재밌었습니다. 한국이었으면 만나 보지도 못했을 거물급들과 밀당도 해 보고, 그런 근사한 주방에서 요리도 해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언제든 오세요. 미스터 장이라면 언제든 그 주방을 내어 주겠습니다.”

    알렉스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미스터 장. 나도 고맙다는 말밖에 할 게 없네요. 미스터 장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J&J 분식이 파나르에 퍼져 나가는 걸 보여 주고 싶었는데, 하나만으로도 너무 벅차네요.”

    “그 가게를 지날 때마다 얼마나 뿌듯한지 모릅니다. 내 이름을 단 레스토랑을 열어 보고 싶단 생각을 해 본 적 없었는데, 제스 덕분에 그 기분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어요.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가게입니다.”

    J&J 분식을 만들 때 나는 메뉴를 조금 도와준 게 전부였다. 기획에서부터 브랜딩까지 모든 것을 제스가 도맡아서 진행을 했고, 아주 근사한 레스토랑이 탄생하게 되었다.

    도움의 크기에 비해 너무 과분한 보상이었다.

    “이 J&J 간판이 어디서든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 열심히 대통령 요리를 하다가 놀러 와요.”

    “에이 아직 대통령 요리사가 된 것도 아닌데요.”

    “나와 알렉스는 무조건 믿습니다. 그렇죠 알렉스?”

    “당연하지. 미스터 장은 대한민국의 대통령 요리사가 될 거라 확신합니다. 내가 보장할게요.”

    마치 든든한 동네 형들의 응원을 받는 것 같았다. 편안하면서도 그 말들이 진짜가 될 것 같은 느낌.

    반드시 해내고 말 거라 또 한 번 다짐했다.

    “이제 관저에 초대할 만한 사람들은 거의 다 초대했죠?”

    “네. 다른 분들은 제가 따로 만나면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알렉스와 제스의 만찬이 끝이 나자 진짜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맘 같아선 인연이 되었던 모든 사람들을 한 명씩 불러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지만 욕심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직접 찾아가 인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기억나는 모두에게 인사를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힘이 닿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내 두 번째 인생의 소중한 인맥들에게.

    * * *

    늦은 밤 정확하게 이 시간이면 휴대폰이 울려 댄다.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온 한샘이었다.

    원래도 거의 매일 통화를 했지만 이탈리아에 가고 나서는 더 자주 통화를 했다.

    “그래서 오늘은 발표 잘했어?”

    “응 유럽도 별거 없네! 한국에서 하는 서비스 방식을 알려 주니깐 오히려 놀라더라. 자기네들은 이렇게까지는 안 한다고.”

    “정말? 오히려 우리가 더 잘하고 있는 거였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유럽 애들은 너무 자신을 낮추면서까지 서비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더라. 친절하고 상냥한 말투를 쓰지만 안 되는 건 확실히 안 된다 하고, 되는 건 최대한 나서서 도와주는 편이야.”

    “아아 우리보단 좀 유연하구나.”

    “그런 것 같애. 그나저나 덕수 넌 이제 인사 다 했어?”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 티켓을 구매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김용수 대사의 배려로 한동안 만찬이 잡히지 않았고, 나는 상율이며, 상섭이며, 테오 등등 기억에 남는 모든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파나르를 헤집고 다녔다.

    “아직은 몇 명 남았어.”

    “아이고 무슨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냐? 거기 요리하러 간 거야 정치하러 간 거야?”

    “외교부 소속이니깐 외교를 한 거지 뭐.”

    “핑계 좋네. 그냥 사람 만나는 게 좋다고 솔직히 말해도 돼. 나도 그런 건 좋으니까.”

    “…맞아.”

    이전 인생과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사람에 대한 욕심이 더욱 강해졌다는 것이다.

    회귀하기 전에도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리는 것을 즐겼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남들이 보기엔 잠깐 스쳐 간 인연 같아 보이겠지만 한 사람 한 사람 기억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파나르에서의 인연들은 유난히 특별했다.

    “인사해야 한다고 한 일 년 더 있는다고 해 봐.”

    “진짜 그래 볼까?”

    “그러기만 해. 너 딱 일 년 후에 한국 돌아온다고 해서 나도 여기 온 거니까.”

    그래 그랬지.

    거의 같은 시기에 한국으로 돌아가자는 약속을 하고 한샘은 이탈리아로 떠난 것이었다. 만약 내가 파나르에 좀 더 남겠다고 선언을 한다면 우리의 인연은 끝이 날지도 모른다.

    파나르에서의 인연도 중요했지만 가장 중요한 인연을 등질 순 없었다. 한샘과의 인연은 단순히 우리 둘만 얽혀 있는 인연은 아니었으니까.

    “그럼 우리 한국 가면 같이 살까?”

    “뭐어? 갑자기?”

    “이제 서로 떨어질 리 없으니깐 그래도 되지 않을까?”

    “…….”

    보이지 않았지만 뻘개진 한샘의 얼굴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내 삶은 이전과 180도 달라질지 몰라도 한샘만은 반드시 잡아야 했다. 그래야지 내 그리운 딸과 손자 녀석을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진짜 정식 프러포즈는 나중에 제대로 할 테니깐 걱정 마.”

    “누가 받아 주기나 한대?”

    “그럼 내가 선물 하나 줄게. 그건 받아 줄래?”

    “선물? 무슨 선물인데?”

    선물이라는 말에 목소리가 변하는 한샘이었다.

    역시 선물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이번에 준비한 선물은 꽤나 그럴싸한 선물이었다.

    “내가 널 위해 아주 근사한 걸 준비했어.”

    “뭔데 뭔데? 괜히 실망시키지 말고 그냥 말해 봐.”

    “절대 실망 안 할걸?”

    “무슨 자신감이냐?”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나와는 근본부터 다른 부자 알렉스가 준비해 준 선물이니까.

    분명 놀랄 수밖에 없을 거다.

    “한샘이 너는 한국에 돌아갈 티켓 이미 샀지?”

    “응 나는 비자 때문에 올 때 돌아갈 티켓도 미리 사 놨었지.”

    “그럼 나도 그 날짜로 예약하면 되겠다.”

    “에이 뭐야. 그게 근사한 선물이야? 같은 날 입국하는 게?”

    그런 시시한 선물일 리가 없지.

    같은 날 입국하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경험이 되겠지만 알렉스가 준 티켓은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는 선물이었다.

    “입국하는 날 티켓을 바꿔 줄게.”

    “바꿔? 날짜를?”

    “아니. 퍼스트 클래스로 바꿔 줄게.”

    “…? 내 좌석을?”

    “응!”

    선물의 정체를 알고도 한참이나 대답을 하지 못하는 한샘이었다. 대답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알렉스의 생일 파티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그 대가로 퍼스트 클래스 비행기 티켓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자 전화기에선 찢어질 듯한 환호성이 들려왔다.

    캬악!

    “아이 놀라라. 귀 아프잖아.”

    “미안. 옆방에서도 놀래서 찾아왔네. 근데 정말이야?”

    “응 정말이야. 저번에도 말했지? 알렉스는 돈으로 못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구?”

    “와아 정말이었네. 나는 솔직히 그 사람이랑 친하다는 말이 거짓말인 줄 알았거든.”

    “뭐냐? 남자 친구 말도 못 믿냐?”

    “우리 같은 사람이 어디서 그런 재벌을 만나겠냐?”

    한샘의 말이 백번이고 맞았다.

    회귀를 했고, 외국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알렉스와 인연이 생겼을 수도 있다. 파나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와 사적으로 만남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솔직히 경험해 보기 힘든 일이었다.

    회귀하기 전 20대의 나였다면 알렉스와 제스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냥 그들의 크기에 눌려 덜덜 떨기만 하다 기회를 놓쳤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내 능력으로 그들을 도와줄 수도 있고, 떳떳하게 보상도 받아 낼 수 있었다.

    “그래 네 남자 친구 이런 사람이란 거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다.”

    “제법이네 장덕수. 덕분에 한국은 편하게 가겠다. 10시간 넘게 다리 한번 못 펴고 죽는 줄 알았는데.”

    “돌아올 때 꿀잠 자면서 올 수 있을 거야.”

    한샘과 나는 밤새도록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서야 한국으로 돌아가는 티켓을 예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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