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걸어온 길
원래는 김용수 대사가 직접 연락을 하거나 대사관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일정을 잡지만 이번엔 특별히 내가 나섰다.
공식적으론 김용수 대사와의 만찬이지만 나와의 인연이 좀 더 깊기 때문이었다.
전화를 걸까 하다가 파티 때 확인한 위상을 다시 한번 곱씹은 뒤 직접 가는 게 예의일 것 같아 알렉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똑.
알렉스의 비서가 내가 왔다는 것을 알리자 뒤이어 커다란 문이 열렸다.
“어서 와요, 미스터 장.”
악수를 건네는 알렉스의 손을 잡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니 며칠 새 부쩍 늙어 버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근래 피곤한 일이 많이 겹쳤던 모양이다. 눈도 충혈되어 빨갛게 변해 있었다.
“요즘 일이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조금 피곤해 보이시네요.”
“하하하 티가 납니까? 파티가 끝나면 며칠 푹 쉬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네요. 일도 많구요.”
“먹는 거라도 잘 챙겨 드시면서 하세요.”
“저도 당연히 그러고 싶네요. 근데 시간이 안 나네요. 테오와 미스터 장 덕분에 성사시킨 사업 때문에요.”
어렵게 성사시킨 사업이었지만 계획했던 시간보다 훨씬 앞당겨서 기일을 정했기 때문에 알렉스의 회사는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피곤해서 늙어 보이는 게 아니라, 이제 진짜로도 늙은 것 같아요.”
“에이 아직 한창이시죠.”
일흔이 넘은 김용수 대사도 펄펄하… 진 않지만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그에 비해 알렉스는 늙었다곤 할 수 없었다.
“예전보다 체력이 떨어졌다는 건 이미 한참 전부터 느끼고 있었고, 요샌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느낌이에요.”
“머리가 안 돌아가다뇨. 이 정도 규모의 사업을 경영하는 게 보통 머리로 가능한 게 아니죠.”
“아니에요. 저번 미팅 문제도 예전의 저였으면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을 텐데 전혀 감을 잡지 못했어요.”
“그건… 직원의 잘못이잖아요.”
옆에서 애써 위로해 봤자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알렉스였다. 저런 태도로 일을 했기에 이 정도로 성공할 수 있었던 걸까.
나이가 조금 들었다고 하나 여전히 업계 최고의 능력자인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근데 미스터 장, 뭐 때문에 왔어요?”
“아 저요? 만찬 때문에 왔습니다.”
“맞다! 이것 봐요. 그새 또 까먹었잖아요.”
한심하다는 듯 자신의 머리를 몇 번 두드리는 알렉스였다.
“드디어 미스터 장의 홈그라운드에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 보나요.”
“하하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아무리 노력해도 알렉스의 생일만 한 퀄리티는 안 나올 거예요.”
“겸손도 적당히 하시죠. 미스터 장은 파티에서도 단연 1등이었어요. 그리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마음은 제가 만나 본 요리사들 중 최고였어요.”
엄지를 치켜세우는 알렉스였다.
요리사라면 상대방의 마음을 생각하며 음식을 만드는 게 당연하지만 바쁘다 보면 놓치기 쉬운 부분이었다. 특히 호텔에서 똑같은 일상을 보낼 땐 나도 그런 걸 생각하지 못했다.
어떤 손님이 와도 정해진 메뉴밖에 주문하지 못하니 그 음식에 최선을 다하면 그게 끝이었다.
“대사관 요리사를 하다 보니 그런 습관이 생긴 것 같아 좋더라구요. 매번 달라지는 손님에 맞춰서 메뉴를 구성해야 하니 상대방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호오.”
“다른 곳에 일해도 그건 기본으로 갖춰야 할 소양인데 매번 챙기기가 쉽지 않네요.”
남들이 보면 조금 우스운 광경이라 느낄 수도 있었다. 파나르 최고의 부자이자 사업가인 알렉스는 자신이 늙어서 총명함이 떨어진다 말하고 있고, 대사관에 외교 만찬을 수십 번 치르며 최고의 성과를 내고 있는 난 상대방의 마음을 자주 놓친다 말하고 있었다.
거만한 소리일 수 있지만 둘 다 자신의 일에선 여전히 최고의 성과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둘 다 겸손은 그만하시죠.”
“하하 그럴까요? 그래도 미스터 장은 요리로 사업을 했어도 잘했을 거예요.”
“제가요? 이상하게 내 가게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많이 해 보진 않은 것 같아요.”
물론 한 번도 안 해 봤다면 거짓말이었다. 근데 다른 요리사들만큼 내 가게에 대한 욕심은 적었던 것 같다.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요리를 할 때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서 음식을 만들면 만족스러운 평가를 받을 수 있죠.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사업은 꼭 긍정적인 평가만 필요한 게 아니에요. 흔히 말하는 노이즈 마케팅이란 단어가 나온 것도 그것 때문이에요. 어떻게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게 중요하거든요.”
“아….”
“그런 의미로 제 파티에서 보여 준 미스터 장의 모습은 사업가로서 꽤 훌륭했죠.”
첫해엔 일부러 적은 양의 술을 준비해서 부자들을 안달 나게 만들었다.
쿠므스라는 파나르 전통주를 이용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또 이번에도 콧대 높은 손님들의 심리를 잘 건드려 알렉스가 원했던 만큼 시간을 끌 수 있었다.
“사실 이번에 테오가 그런 말을 꺼내기 전부터 난 항상 미스터 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어요.”
“저를요? 어떤 걸요?”
“당연히 외식 사업이죠. 일단은 미스터 장이 맘대로 요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 하나를 오픈해 보고 싶었어요.”
“아….”
알렉스의 말이 어느 정도 진심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쯤 상상해 본 일인 건 분명해 보였다.
제스에게 살며시 들은 적이 있었다.
“제스가 J&J 분식 장사가 잘된다고 어찌나 자랑하던지 얄미워 죽겠더라구요.”
“에이. 알렉스의 사업이 훨씬 크고 잘되고 있잖아요.”
제스가 아무리 날고 긴다 하더라도 사업의 규모는 알렉스의 회사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끝이 없나 봐요. 우리 회사 계열사에는 음식과 관련된 회사는 없으니까요. 제가 음식에 관심이 없으면 또 몰라.”
“하하하 그러네요.”
그러고 보면 왜 진작에 외식 사업에 뛰어들지 않았는지 의문이었다. 먹는 게 일이 되면 즐겁지 않을까 봐?
요리사로 두 평생을 살아온 나로선 여전히 음식 하는 게 즐겁고, 행복하다.
괜한 걱정이라 자신 있게 말해 줄 수 있었다.
“그래서 제스처럼 협력 말고 온전히 미스터 장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 하나를 열고 싶었어요. 혹시 지금이라도 생각 없어요? 청와대 요리사보다 훨씬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해질 텐데?”
“음….”
잠시 솔깃하기도 했지만 흘려듣기로 했다. 나는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여기까지 달려왔기 때문이다. 설령 다른 길을 가더라도 첫 번째 목표를 이룬 뒤 방향을 틀고 싶었다.
“레스토랑 말고 일단 저희 관저로 오세요. 언제로 날을 잡을까요?”
“오호 저는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정말이요? 요즘 바쁘시다면서요.”
“아무리 바빠도 미스터 장의 음식이라면 시간을 내야죠. 주말이든 평일이든 상관없이 언제든 가능합니다.”
“하하 참.”
이렇게 쉬운 일이었으면 그냥 전화로 할걸.
그래도 즐거워하는 알렉스의 표정을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근데 미스터 장.”
“네?”
“이번 만찬에는 나 혼자만 초대받는 건가요?”
“네 저희 대사님 말곤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왜요?”
알렉스는 조금 아쉽다는 듯 고개를 몇 번 움직였다.
“혼자서는 조금 아쉬운데….”
“같이 오실 분 있으면 오세요. 저희는 괜찮습니다.”
“동업자는 안 부르실 거예요?”
“동업자라뇨?”
“J&J의 제스 말이에요. 제스가 들으면 섭섭해하겠구만.”
소식을 들은 지 오래되었지만 알렉스의 말론 J&J 분식에 가면 항상 볼 수 있다고 했다.
알렉스 못지않게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제 친구도 같이 초대해 줘요. 내가 처음 제스를 소개해 줬잖아요. 끝까지 책임져야죠.”
“물론이죠. 제스라면 당연히 좋죠. 가게로 한번 찾아가려 했는데 오히려 잘됐죠.”
제스에게 많은 영감과 도움을 받았는데 그냥 넘어갈 수 없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대접을 해 줘야겠다.
“그럼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다릴게요.”
* * *
수월하게 만찬 약속을 잡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알렉스와 제스에 대한 기사를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파나르에서 유명인인 만큼 두 사람에 대한 정보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고기와 일을 사랑하는 사업가 알렉스. 최고의 고기를 먹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 말할 정도.]
오래전 기사 내용이었다.
사진 속 알렉스의 모습은 지금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푸짐하고 넉넉한 턱과 뱃살.
기사 제목과 아주 일치하는 사진이었다.
어쩐지 음식을 즐겨 먹는 사람치고는 말랐다고 생각했는데, 다이어트를 한 거였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음식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긴 해도 알렉스는 급하게 먹거나 많이 먹진 않았다.
적당히 거리를 두는 느낌이랄까.
다른 뉴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테크노마트 대표 알렉스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보여.]
뇌출혈이라니.
몇 년 전 알렉스는 뇌출혈로 쓰러진 적이 있었다. 항상 근처에 상주해 있던 주치의의 빠른 대처 덕에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또 불행 중 다행으로 후유증도 그리 심하게 겪지 않았다.
하지만 고혈압과 고지혈증을 줄이기 위해 다이어트는 피할 수 없었다.
머리가 잘 안 돌아간다며 엄살을 피우던 알렉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건강에 예민하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구나.
역시 자수성가한 사업가들은 몸이 성치 않다고 하더니 알렉스도 예외가 없었다. 내가 이래서 사업을 하지 않는 거였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좋아하는 사람들과 살고 싶었으니까.
제스의 기사는 따로 찾을 수 없었지만 그가 앓고 있는 병명쯤은 쉽게 유추해 볼 수 있었다.
과로.
하루에 15시간 이상씩 매장에서 일을 하는 제스의 몸 상태도 말짱할 리가 없었다.
보양식이 필요한 건 안 봐도 뻔했다.
다만 어떤 음식이 몸에 잘 맞는지는 조금 고민을 해 봐야겠지만.
한참 동안 뉴스를 뒤지다 보니 두 사람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더 친근해진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고생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몸까지 망가져 가며 살아왔었구나.
대단한 생각에 존경심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안타깝단 생각도 들었다.
지금까지 모든 손님에게 최선을 다했지만 이번 만찬엔 뭔가 알 수 없는 사명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 * *
만찬 당일 파나르 한국 대사관 관저.
알렉스는 제시간에 도착해 있었지만 아직 제스가 오지 못했다.
괜히 알렉스가 안절부절못해 거듭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대사님. 시간을 어기는 친구가 아닌데.”
“괜찮습니다. 다른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차나 한잔하며 기다리시죠.”
“네. 방금 통화했는데 곧 도착한답니다.”
나 역시 이런 제스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두 사람은 기본에 충실한 만큼 시간 약속에도 철저한 사람이었으니까.
무슨 사정이 있겠다 싶어 차분히 기다렸다.
어차피 음식도 아직 완전히 준비되지 않았으니.
차분히 기다리며 음식을 준비했다.
빵빵.
십 분쯤 흘렀을까?
관저의 대문 밖에서 들리는 경적 소리에 알렉스가 제일 먼저 튀어 나갔다.
버선발로 뛰어나간다는 표현이 딱 맞는 상황이었다.
스르르 대문이 열리고 제스의 자동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엥?”
“저게 뭐야.”
관저로 들어오는 제스의 차를 보고 우린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