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공개된 과제
이번이 파나르에 와서 가장 뿌듯했던 일이 아니었나 싶다.
앞으로는 고려인들의 눈빛에서 느껴지던 공허함이 완전히 사라지길 바랄 뿐이었다.
발레라는 내가 알려 준 국수와 불고기 등의 레시피를 평생 기억하겠다고 했다. 나 역시 발레라가 알려 준 국시와 고려인 음식들의 레시피가 흥미로웠다. 훗날 분명히 도움이 될 거라 확신했다.
“고려인들 음식은 어때? 전통 방식이랑 비슷한 게 있어?
“아니. 거의 다른 음식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야.”
“그 정도야?”
“응 육수라고 할 것도 없고 그냥 소금, 설탕, 조미료, 물이더라.”
“그래서 맛이 조금 부족했구나.”
“응 어쩔 수 없지. 그땐 재료가 없었을 테니까.”
조미료도 그나마 최근에 추가된 재료이지 그 전엔 더욱 간단한 레시피였다.
그래도 나름 오래 고민하고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레시피였기에 소중히 가방 안에 넣어 두었다.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오랜만에 파나르의 유일한 친구였던 윤아와 잡담을 나눌 수 있었다.
“덕수 너도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았네.”
“그러게 말이야. 시간 참 빠르다.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다니.”
“맞아. 나도 파나르에 온 지 거의 10년째야.”
“와아.”
두 번째 삶이라 해도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건 똑같았다. 오히려 더 빨리 지나가는 느낌이랄까.
윤아도 어느새 인생의 1/3을 파나르에서 살고 있었다.
“윤아 넌 한국에 가고 싶지 않아?”
“나?”
한국에 가고 싶지 않냐는 물음에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는 윤아였다. 무언가 생각이 많아진 거겠지.
내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한 이유가 있었다.
나만의 착각이었을지는 몰라도 고려인들을 향한 윤아의 눈빛에서도 약간의 공허함이 느껴졌었다.
“음… 그래 보여?”
“솔직히 말해?”
다시 입을 연 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번에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전했다.
“이번엔 조금 그래 보이더라.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고려인들 표정하고 조금 비슷하다고 할까?”
“하하 정말? 난 가고 싶으면 언제든 갈 수 있어. 그리고 종종 한국에 갔다 오기도 했고.”
“알지 알지. 저 사람들이랑 똑같다는 게 아니라 뭐랄까… 아 몰라. 그냥 조금 허전해 보여.”
고려인들과 애써 선을 그어 보려 했지만 그들과 비슷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윤아도 한국에서 아픈 기억을 안고 떠나온 사람이었으니까.
그들에게도 윤아에게도 한국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허전해 보인다라….”
“너무 신경 쓰지 마. 내 착각일 수도 있어. 그냥 피곤한 표정인데 내가 그렇게 느끼는 걸 수도 있고.”
“…….”
“너는 파나르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살고 있잖아.”
혹시나 조금이라도 기분이 상했을까 봐 서둘러 윤아를 위로했다. 다행히도 윤아의 표정은 그리 찡그려지지 않았다.
“그렇긴 하지. 내 능력에 비해 과한 인정을 받으며 살고 있지.”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없으면 대사관 업무가 마비될 텐데.”
“나 아니고 그 누가 빠져도 똑같아. 나는 능력 좋은 팀원들 덕분에 덩달아 인정받은 케이스지.”
장난스럽게 말을 하고 있지만 윤아의 생각은 진심이었다. 그렇지만 스스로 깎아내릴 만큼 평소 윤아의 공이 적진 않았다.
“사실 이번에 고려인들을 보고 내 미래는 어떨까 생각하게 되더라.”
“너의 미래?”
윤아는 속에 담긴 말을 이제야 꺼내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대사관 직원이고, 나이도 어리니깐 괜찮지만 내가 파나르에서 대사관을 빼고 제대로 된 직장이나 구할 수 있을까?”
“…….”
“통역 공부를 한 전문 통역사도 아니고, 영주권을 가진 외국인 신분인데.”
“그… 그래도 직장 하나쯤은 충분히 구할 수 있지.”
애써 희망적인 말을 건네려 해 봤지만 윤아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내가 대사관 직원이 아니고, 나중에 나이가 들면 파나르에서 날 신경이나 써 줄까? 고려인들처럼 이도 저도 아닌 느낌의 사람이 되진 않을까라는 걱정이 되더라.”
“너무 과한 생각 아니야?”
“과하지 않아.”
“파나르에 있는 고려인들은 그 수가 너무 소수고, 여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던 거지 다른 나라의 고려인들은 협회도 구성해서 서로를 돕고, 장관까지도 하는 고려인이 있을 정도잖아.”
“그건 다른 나라 얘기지. 그 사람들도 결국 살아남으려고 자기들끼리 뭉친 거잖아. 그리고 장관 얘기는 너무 극소수라 그걸 보고 희망이 있다고 할 순 없지.”
윤아는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나도 특별히 반박할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냥 나도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서 일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한국에 돌아가고 싶구나?”
다시 한번 윤아의 생각을 물었다.
이번엔 금방 고개를 끄덕이는 윤아였다.
“어릴 땐 학교나 친구들이 인생에 전부였는데 그걸 잃어버리니까 전부를 잃은 것 같았거든.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어린 생각이었던 것 같아.”
“그래 그땐 실제로도 어렸으니까.”
“직원들 덕분이긴 하지만 좋은 성과도 내고, 관계도 좋다 보니 자신감이 생기네.”
“직원들 덕분 아니야. 너도 충분히 제 역할을 했어.”
내 말을 듣기나 하는지 자기 말을 이어 가는 윤아였다.
“나도 기회가 되면 나중에 한국에서 일해 보고 싶어. 거기서도 내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 내가 잘 섞여 들 수 있을지 궁금해.”
당연히 그럴 수 있지.
윤아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큼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다.
타국에서 서로 외로우니 대사관 직원들끼리는 뭉쳐야 한다. 파나르어는 희귀 언어이니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냥 채용해라 등등.
이런 인식들 때문에 윤아가 여태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스스로 능력을 증명했고, 직원들과 관계에선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정도였다.
한국에 취직을 하더라도 얼마든지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 저번에 약속한 대로 전문 통역사가 되어서 한국에서 만나자.”
“진짜 그랬으면 좋겠다.”
윤아의 눈에 보이던 공허함이 조금은 채워진 것 같았다.
* * *
다음 날 파나르 한국 대사관 관저.
“장 셰프.”
“네 대사님.”
“이것 좀 보세요.”
보통은 할 말이 있어도 아침 식사를 모두 끝낸 후에 말을 꺼내는 김용수 대사였다. 아무리 급한 일이라고 해도 대개는 그랬다. 하지만 오늘은 뭐가 그리 급한지 숟가락을 들기도 전에 나를 불러 식탁에 앉혔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번과 같은 하얀 종이였다.
공문이 다시 내려왔다는 걸 감으로 알 수 있었다.
“공문이 왔어요. 이번 청와대 요리사 공개 채용에 대한 공문이요.”
“정말요?”
예상대로 구체적인 일정과 내용이 적힌 공문이었다.
청와대도 많은 고민을 한 것인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청와대 요리사(한식 부문) 채용의 건]
“뭐라고 적혀 있어요 장 셰프? 먼저 열어 보게 하고 싶어서 나는 확인도 안 했어요.”
“……!”
옆에서 재촉하는 김용수 대사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공문에 집중했다. 몇 줄을 읽어 내려가자 나는 소리를 내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박….”
“왜요? 과제가 너무 말도 안 되나요?”
당장 전화라도 걸고 싶은 마음이었다.
예민희 서기관에게.
“와아 진짜 족집게네요.”
“누가요?”
“예민희 서기관이요.”
공문에는 얼마 전 예민희 서기관의 입에서 나온 말을 고스란히 글로 옮겨 놓은 것처럼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한국인들의 음식 문화를 재해석해 요리를 하시오.’라는 게 이번 과제네요.”
“예민희 서기관이 예상한 거죠? 이번 고려인 식당도 그렇고?”
“네 맞습니다.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때문에 이런 내용의 과제가 나올 거라 예상했다 하더라구요.”
“허허 신통방통하네요.”
김용수 대사도 예민희 서기관의 능력에 감탄했다. 자기 때는 무식하게 외우기만 하면 됐는데, 요즘은 공부와 시험에도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다며 박수 쳐 댔다.
“일단 그것만으로도 유리한 상황이네요.”
“그런가요…?”
이런 상황을 미리 겪었다고 꼭 유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고려인들의 음식을 그대로 경연에 내기엔 완성도가 많이 떨어졌으니까.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제대로 된 레시피가 필요했다.
“과제는 그게 전부인가요?”
“아니요. 하나 더 있습니다.”
“뭔데요?”
하나는 고려인들과 관련된 과제라 이해하면 되고, 주어진 과제는 그것 말고도 또 하나가 있었다.
[예로부터 한식은 약식 동원의 정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들이 건강하게 임기를 마칠 수 있도록 약이 되는 음식을 만드시오.]
약식 동원이라.
꽤나 오랜만에 듣는 단어였다.
약과 음식의 근원은 하나라는 의미로 음식도 체질에 맞게 잘 골라 먹으면 약과 같은 효과를 낸다는 말이었다.
“장 셰프, 약식 동원이 뭔지 알아요?”
“네. 당연히 알죠.”
김용수 대사의 질문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내가 그 정도도 모를까 봐.
“그냥 요즘 젊은이들 한자나 이런 고사성어 같은 말들 잘 모르잖아요.”
“아아. 저는 한식을 공부해서 그런지 들어 봤습니다.”
“역시 다르네요, 장 셰프는.”
다르지. 달라도 한참 다르지.
또래들과 나이가 다르다.
이쁘고 자극적인 맛을 가진 음식들이 인기를 많이 끄는 바람에 약식 동원이란 말은 거의 쓰질 않고 있었다.
건강식이나 웰빙, 채식 등 건강하게 먹는 것이 유행이긴 했지만 조금은 결이 다른 의미였다.
“약식 동원이라… 이것도 장 셰프에게 유리한 과제 아닙니까?”
“네?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개념 자체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호텔에서 일할 때도 크게 신경 써 본 적 없는 단어였다. 그저 메뉴를 구성할 때 육류와 채소의 구성을 좀 더 균형 있게 짜는 것 정도?
근데 약식 동원도 나에게 유리한 과제라 말하는 김용수 대사였다.
“이게 바로 약식 동원의 좋은 예 아닙니까?”
“…아.”
김용수 대사는 갈색 액체가 담긴 물잔을 들어 올렸다. 여기에 오고 난 후부터 하루도 빼먹지 않고 아침상에 올렸던 것.
“날 위해 만들어 준 양파주스가 좋은 예잖아요.”
“하하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그리고 나이가 많은 날 위해 차려 준 밥상이 전부 약식 동원의 정신을 가지고 만든 요리들 아닙니까?”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전부 다 맞는 말이었다. 양파주스는 물론이고, 김용수 대사의 입에 들어가는 모든 음식들은 염도와 당도까지 고려하며 만든 음식들이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고기와 생선, 채소를 번갈아 가며 식단 구성을 했고.
“듣고 보니 맞는 말 같네요.”
“하하. 나이 많은 것도 도움이 될 때가 있네요.”
“에이 그거 아니라도 많이 도움이 되십니다.”
조금 억지를 부려서 공개된 두 개의 과제가 전부 나에게 유리한 것은 맞는 것 같았다. 서류만 무사히 통과한다면 청와대에 입성하는 것도 꿈만은 아니었다.
“그러면 장 셰프.”
“네 대사님.”
“연습 한번 안 해도 됩니까?”
“연습이요?”
“약식 동원을 주제로 만찬 한번 해 보는 게 어때요?”
“그러면 저야 너무 좋죠. 계획된 약속이 있으십니까?”
“물론이죠.”
김용수 대사는 약식 동원의 밥상 차림을 연습해 볼 만찬을 계획했다. 그 주인공은 심사 위원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