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한국인
예민희 서기관의 물음에 발레라는 대답하기를 잠시 주춤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원래 국수의 맛도 알고 계시지 않으셨나요?”
강제 이주가 된 당사자였다면 어릴 적 먹었던 국수의 맛을 분명 기억하고 있을 터.
예민희 서기관은 발레라의 기분을 살피며 대화를 이어 갔다.
“이 국시도 충분히 맛있지만 발레라 씨도 원래 한국 국수의 맛을 알고 계신가 해서요.”
음식을 남긴 걸로 봐서 그리 만족스러운 식사는 분명 아니었지만 예민희 서기관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이 음식들을 알려 주시면서 습관처럼 한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본래 한식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맛이 있고, 훌륭한 음식이다. 그것을 지금 맛보여 줄 수 없어 아쉽다. 하지만 맛도 없고 사용한 재료도 다른 이 음식도 분명 한식이니깐 기억하라구요.”
발레라는 할아버지가 앞에 서 있는 듯이 자신 있게 말을 이어 갔다.
“한국인들이 이 음식을 맛보면 맛이 없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혹시나 얘기할 기회가 있으면 꼭 알려 주라고 했어요.”
“뭘요?”
“우리는 이 먼 타국에서 어떻게든 우리의 문화를 이어 가려고 최선을 다했다. 이 음식들은 아픈 역사의 일부분이니 맛이 없다고 해서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요.”
그 말을 끝으로 우린 한동안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곤 얼굴이 붉어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우린 국시의 맛이 없다며 장난스레 말을 했고, 애처럼 투정을 부렸으니.
“그럼 그 후로도 할아버지가 진짜 한국 음식을 알려 주신 적은 없나요?”
그렇게 한식을 보존하길 원했다면 정통 방식으로 만든 한식도 한 번쯤은 보여 주지 않았을까.
예민희 서기관의 물음에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발레라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알려 줬습니다. 하지만 말로만 알려 줬을 뿐 직접 맛을 보진 못했어요. 지금이야 한국 식당도 생기고, 마트도 생겨서 간장이나 된장 등을 쉽게 구하지만 할아버지가 계실 땐 아니었어요.”
설령 그때 재료를 구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구매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저는 결국 할아버지의 국수 맛을 보지 못했을 거예요. 이런 마트나 식당이 있었어도 저희 형편엔 사 먹을 수 없었을 거거든요. 이 국시는 파나르에서 구하기도 쉽고, 값싼 재료를 사용했고, 육수는커녕 그냥 맛을 흉내만 정도로 알고 있어요.”
“그러면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한식을 한번 만들어 팔아 봐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셨어요?”
“그러니까요. 지금은 된장이나 간장 같은 걸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잖아요.”
우리의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젓는 발레라였다.
“지금 파나르에 남아 있는 고려인들은 대개 3세나 4세들이에요. 저희 식당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당연히 그렇구요. 이게 한국인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우리들에게는 이 맛이 집밥의 맛이고, 추억의 음식들이에요.”
“아….”
“그리고 저도 할아버지께 말로만 들었지 직접 맛본 적은 없어서 흉내를 낼 수도 없습니다. 이 맛이 맞는 건지 아닌 건지 구분할 수도 없구요. 파나르에 한국 식당이 생겼다는 말에 한번 가 보려 했는데 가게를 하루도 비울 수 없고, 제 식당을 찾는 분들은 지금 이 음식의 맛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던 거죠.”
평생을 타국에서 살아오고, 어릴 적부터 이 음식들을 먹고 자란 사람들에겐 아무리 재료가 부족하고, 본래의 맛과 완전히 달라도 이 맛이 소울 푸드고, 집밥의 추억이었다.
원래 음식의 맛이 이게 아니니, 원래의 맛을 찾아서 보존하라며 억지를 부릴 순 없었다.
“발레라 씨 할아버지께서는 고향이 어디십니까?”
“서울입니다. 뉴스에 서울이 나올 때면 자기가 살 때랑 완전히 다른 도시라며 기뻐하셨거든요.”
“그랬군요. 덕분에 좋은 이야기 듣고 좋은 음식 잘 먹었습니다.”
“천만입니다. 이런 얘기를 가족 외엔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우리 고려인들에게 관심을 보여 주고, 먼저 말 걸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번에 만난 엘레나 씨도 그렇고, 오늘 이 식당의 발레라도 그렇고 고려인들에겐 기본적으로 외로움이 느껴졌다. 이곳에서 가정을 꾸리고 뿌리를 내리며 살고는 있지만 알 수 없는 공허감이 느껴졌다.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배웅하는 발레라의 얼굴에선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느껴졌다.
“예민희 서기관님 덕분에 중요한 걸 알게 된 것 같네요.”
“그렇죠? 발레라 씨도 마찬가지고 아직도 세계 곳곳에는 힘들게 살아가는 고려인들이 많아요. 고려인뿐만 아니라 다른 재외 동포들도요.”
“우리가 몰랐던 부분이 많은 것 같네요.”
가까이는 일본에 남아 정착한 재일 교포들.
멀리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일하다 독일에 남아 뿌리를 내린 사람들 그리고 더 나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쿠바로 떠난 한국인 노동자들까지.
한인들의 이민사는 대부분 아픔이 섞여 있었다.
“요리사님.”
“네 서기관님.”
“혹시 느껴지는 거 없으세요?”
“네? 뭐가요?”
“제가 이 고려인 식당을 그냥 오자고 했을 거 같아요?”
예민희 서기관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느껴지는 거라면 발레라 씨에게 제대로 된 한식을 맛보여 줘야겠다는 사명감이 발동했다는 것 정도.
하지만 이건 예민희 서기관이 원하는 대답이 아닌 것 같았다.
“각종 한국의 시험과 테스트를 통달한 저로서 팍 느낌이 온 게 있는데 팁을 좀 드려도 될까요?”
“팁이요? 물론이죠. 말씀하세요.”
“방금 그 고려인들 사연 있잖아요. 청와대 요리사 테스트 주제로 나오기에 딱 좋지 않아요?”
“네?”
“우리 재외 동포들의 아픔이 담긴 음식. 딱 공개 채용의 주제로 하기에 좋은 것 같은데. 완전 감이 팍 옵니다.”
예민희 서기관의 표정엔 확신이 차 있었다.
“얼마 전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으로 봉환되었잖아요. 그런 큰 이슈들은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으로서 꼭 챙겨 봐야 하는 포인트예요.”
일타강사 흉내를 내며 장난처럼 말을 하고 있었지만 전부 일리가 있었다.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우선 그보다 더 맘이 가는 것이 있었다.
“예민희 서기관님.”
“네 요리사님.”
“재외 동포들을 위한 일이라면 아까 고려인분들과 관련된 일도 포함인 거죠?”
“물론이죠. 그건 왜요?”
“부탁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뭔데요?”
파나르에서 재외 동포 관련 인프라를 담당하고 있는 예민희 서기관이었다.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가지며 살고 있지만 한 번도 한국에 가 보지도, 제대로 된 한국 음식을 맛보지도 못한 발레라를 위해 뭔가 해 주고 싶었다.
“파나르에 있는 고려인들을 전부 모아 주실 수 있을까요?”
“음…. 전부라고 해 봤자 30명 남짓인데요.”
“그것밖에 안 되나요? 그럼 오히려 더 좋죠 뭐.”
인근의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러시아 등등.
중앙아시아의 몇몇 나라에는 대규모의 고려인 협회가 있을 정도로 많은 고려인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파나르에선 겨우 30명 남짓한 사람들뿐.
그들에게 연락을 하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고려인들을 돕는 일이라면 무조건 찬성이죠.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나의 부탁에 예민희 서기관과 윤아는 흔쾌히 나서서 팔을 걷어붙였다. 김용수 대사 역시 좋은 취지라며 적극 지원해 줬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인회 김상율 회장까지 섭외가 끝이 났다.
* * *
며칠 후 고려인 식당.
다시 방문한 고려인 식당에는 하나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 크진 않았지만 오늘 부른 손님들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식당이었다.
나는 오전부터 이곳에 도착해서 발레라와 함께 육수를 끓이고, 깍두기를 담그고 있었다.
“원래 국시의 육수엔 이렇게 많은 재료가 들어가는군요.”
“보통은 마른 멸치, 무, 대파, 양파, 마늘, 다시마 등이 기본으로 들어가고, 집마다 디포리나 북어, 고추 정도를 추가하기도 해요.”
“와아….”
“근데 서울식 육수는 깔끔하게 만드는 편이라 멸치도 머리와 내장을 전부 제거하고, 적당히 우러나면 건져 내는 편이에요. 너무 오래 끓이진 않아요.”
열심히 내 말을 따라 적는 발레라.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즐겨 먹었을 서울식 국수 만드는 방법을 제대로 알려 주고 있는 중이었다.
“예전에는 이런 육수를 낼 재료들이 충분하지 않았으니깐 그냥 흉내만 내서 먹었을 거예요. 그게 전해져서 이렇게 지금의 국시가 된 거구요.”
“맞아요. 특히 시원하게 먹는 국시는 그냥 새콤달콤한 냉국수가 먹고 싶은데, 따로 육수를 낼 수도 없어서 대충 간만 맞춰서 먹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제대로 육수를 낸 잔치국수와 덜 익었지만 함께 먹으면 궁합이 좋은 깍두기, 그리고 전골식 불고기까지 준비했다.
서울이 고향인 발레라의 할아버지가 만들어 준 음식인 것처럼.
“근데 요리사님. 이렇게 저희를 위해서 음식을 만들어 주셔도 되나요? 여태 한 번도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요.”
“에이 무슨 소리세요. 재외 동포들을 챙기는 것도 저희 대사관에서 하는 일인데요. 그리고 이 일도 저한테 다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나중에 식사 끝나고 다른 메뉴들 만드는 법도 알려 주셔야 합니다?”
“저희 식당 음식보다 더 맛있게 만드실 줄 알면서 굳이 왜요.”
한국인들의 한식은 내가 더 잘 만들진 몰라도 고려인들의 한식은 한 수 배워야 하는 입장이니까.
예민희 서기관이 예상한 대로 해외 곳곳에 퍼져 있는 한국 이민자들의 음식을 알아 두면 충분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실제로 중앙아시아의 몇몇 나라에서는 고려인들이 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청와대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고려인들만의 음식도 보존해 둘 필요도 있는 거 같아요. 좋은 역사만 우리들의 역사는 아니잖아요. 아픈 것도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기억하고 있어야죠.”
발레라는 지치지도 않는지 한 번을 앉지도 않고 내 옆에서 일을 거들었다.
한인회 회장 상율 역시 저번 엘레나 씨의 사례를 시작으로 고려인들까지 한인회로 포함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파나르의 고려인들은 아무도 그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어딘가에 소속된 거라며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도 있었다.
“자!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와아.
역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건 즐거운 음악이나 맛있는 음식이 제격이었다.
발레라는 준비한 음식을 전부 내놓은 후에야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고생하셨어요. 그런 의미로 발레라 씨가 제일 먼저 맛을 보셔야지요.”
“요리사님도 고생하셨습니다.”
발레라는 큰 대접을 손에 들고 음식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직 쫄깃함이 살아 있는 소면 한 덩어리를 그릇에 넣고, 호박나물과 부추나물 그리고 계란지단을 듬뿍 올리고, 멸치 육수를 한가득 부어 주었다.
온전히 국수의 맛을 느껴 보겠다고 일을 하면서 간 한번 보지 않은 발레라였다.
“으음…. 처음 맡아 보는 냄새인데 익숙하네요.”
발레라는 배가 고파 보였지만 차마 눈앞에 있는 국수를 입에 넣지 못했다.
한동안 눈을 감아 냄새를 맡고, 추억을 되새긴 후에 젓가락을 다시 잡았다.
후루룩-
첫 번째 젓가락질에 뜨끈하면서 깊은 맛을 내는 육수를 가득 머금은 소면이 입 안에 가득 찼다.
면을 채 삼키기도 전에 그릇을 들어 육수 한 모금을 또다시 입 안에 가득 채워 준다.
오물오물.
그리고 이어지는 감탄, 이 아니라 감동.
국수를 삼키는 발레라의 눈이 반짝였다.
“어떠세요?”
“맛있습니다. 정말 맛있어요. 처음 먹어 보는 맛이지만 익숙한 맛이에요.”
발레라를 시작으로 식당에 모인 고려인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처음 맛보는 국수였지만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그릇을 비워 냈다. 국수는 물론이고, 서울식 불고기와 아직 덜 익은 깍두기까지.
고려인들이 평소 즐겨 먹는 음식들과는 다르지만 그 누구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역시 원조는 달라도 다르네요. 이게 진짜 한국의 맛인가 봅니다.”
“신기하네요. 이런 한식은 처음 먹어 보는 걸 텐데 전부 입맛에 맞나 봅니다.”
발레라는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저희는 한국 사람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