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89화 (190/202)
  • 189. 국시

    청와대실.

    김채훈 대통령은 조근배 요리사를 불러 뭔가를 상의하는 중이었다.

    “셰프님. 저번에 말한 대로 이번 채용은 완전 공개로 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네 저희는 대통령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따르겠습니다.”

    조근배 요리사는 대통령의 말을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었다. 다른 직원들에겐 모르겠지만 적어도 요리사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오랜 시간 일을 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꼭 장덕수 셰프 때문만이 아니라 공개 채용으로 하는 게 더욱 공정할 것 같아서요.”

    “저도 얘기를 듣고 나니 지금까지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요한 자리인 만큼 더 철저한 기준으로 뽑는 게 맞습니다.”

    처음엔 덕수에게 기회를 주려고 나온 말이었지만 오히려 장벽이 더욱 높아진 느낌이었다.

    조근배 요리사는 이 방식을 통해 더 좋은 인재를 추려 내리라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그럼 진행 방식을 직원들하고 상의한 뒤에 공지하도록 하시죠.”

    “네 알겠습니다.”

    * * *

    파나르 한국 대사관 관저.

    김용수 대사의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피곤함이 잔뜩 묻어 있는 숨소리였다.

    “피곤하십니까 대사님.”

    “허허 마지막 몇 달은 좀 편하게 지내 보려고 했는데 쉽지 않네요.”

    “일정이 많나 봅니다.”

    “알렉스의 생일에 가지 말 걸 그랬나 봐요.”

    “왜요?”

    오히려 나보다 알렉스 생일을 더 기대했던 사람이 김용수 대사였다. 파티 기간 동안에도 충분히 즐기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 것 같았는데.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너무 많은 약속이 잡혔어요.”

    “정말요?”

    “거절할까도 했는데 다음 후임자를 생각하면 또 이럴 때 인맥을 쌓아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알렉스의 생일은 인맥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에겐 뷔페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고급 호텔의 최고급 뷔페.

    파나르에서 조금이라도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초대되었을 테고, 그 파티에 초대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명함이 되고, 명분이 된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대사님도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하하 제가 돌아갈 수 있을까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애초에 계획했던 3년의 기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하지만 김용수 대사는 아직 멀었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기억 안 나요? 저번에 대통령님이 했던 말?”

    “어떤… 말씀 말인가요?”

    “청와대 요리사를 뽑는 과정을 공개로 전환하면 파나르 대사로 좀 더 근무하겠다는 약속이요.”

    맞다.

    그런 약속을 했었구나.

    김용수 대사는 날 위해 그런 공약까지 내걸었었다.

    이미 체력적으로도 한계에 다다랐지만 부하 직원을 위해 이런 일까지 해 주는 김용수 대사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대사님. 꼭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번에 말씀하신 대로 저는 아직 어리고, 기회가 많습니다. 꼭 이번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지금의 나이답지 않게 나도 너무 서둘렀던 것 같았다. 몸이 젊어지니 피가 끓어오르는 것도 자제하기 어려웠는데, 내 이득만을 위해 남의 희생을 못 본 체할 수 없었다.

    “아닙니다. 나도 생각해 보니 힘들게 얻은 기회인데 딱 3년만 하고 끝내기엔 아까운 것 같아요. 어차피 한국 돌아가 봤자 가족도 없고, 할 일도 없을 텐데요.”

    “좋아하시는 책이나 읽으시면서 사시면 되죠.”

    “내가 죽을 날이 아직은 30년 가까이나 남았는데 계속 그럴까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칠순이 넘는 나이지만 은퇴를 하기엔 너무나 멀쩡했다. 체력이 조금 달리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젊은 공관장들도 마찬가지. 좀 더 회복 시간이 길 뿐 누구에게나 힘든 일정인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처음 3년 동안 모든 걸 쏟아부었으니 다음 3년 동안은 좀 수월하지 않을까요? 이제 베이스가 좀 다져진 느낌인데요.”

    “그건 그럴 것 같습니다.”

    “근데 다만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건 장 셰프가 없다는 거예요.”

    김용수 대사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말동무도 되어 주고, 할아버지뻘 되는 나와 휴가도 보내 주고, 특히 업무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고 의지했었는데 다른 요리사와 그렇게 할 수 있을진 모르겠네요.”

    “에이 다른 요리사들도 충분히 잘 보좌할 겁니다. 그리고 이런 고민은 공개 채용이 결정되고, 그리고 제가 청와대 요리사로 뽑힌 후에 하시죠. 저도 청와대 요리사에 떨어지면 파나르에 좀 더 있겠습니다.”

    “정말요?”

    한샘을 제외하면 나도 굳이 한국으로 돌아갈 이유는 없었다. 만약 계획대로 안 된다면 파나르에 남아 명성(?)을 더욱 떨치는 데 집중하는 수밖에.

    한샘에게는 내가 좀 더 힘을 쏟아야지….

    “근데 1차전은 이미 통과된 것 같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김용수 대사는 하얀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공문이라는 이름의 종이에 적힌 내용은 청와대 요리사 채용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결정 났답니까?”

    “네 일단 올해는 공개 채용으로 청와대 요리사를 뽑겠다네요. 요리사가 있는 각국 공관들에도 공문이 내려왔고, 일반 채용 사이트에도 채용 공고가 올라올 예정입니다.”

    와아!

    일단은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관문이 해결되었다. 이제 뒷일은 내가 스스로 뚫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방금 했던 생각과 달리 다시 한번 피가 끓어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꼭 합격했으면 좋겠습니다 장 셰프.”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사님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맘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조금은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파나르 대사관 요리사를 택했지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김용수 대사의 몫이 컸다.

    “정말입니다. 1년도 못 채우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요리사들이 많다면서요. 저도 대사님이 아니었다면 그들 중 한 명이 됐을 수도 있습니다.”

    “하하 처음에 내가 심술부린 건 기억도 안 나나 봐요?”

    “그… 그거야 뭐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이죠.”

    차마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땐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으니까.

    처음이야 그렇지 그 후 우리 둘의 케미는 더할 나위 없이 최고였다.

    “지난 일은 다 잊고 앞으로의 일에만 집중하죠.”

    “물론입니다.”

    “근데 따로 연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서류는 내가 알아서 준비하면 되고, 이번 채용에는 분명 실력 테스트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게 뭔지 미리 알 수 있다면 여기에서 연습을 몇 번 해 볼 수 있을 텐데.

    이번 공문엔 채용에 관련된 일정만 공지되었을 뿐 테스트에 대한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곧 공지가 뜨지 않을까요?”

    “그냥 아무런 공지 없이 변수에 대응하는 능력을 볼 수도 있구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여튼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맘 편히 있어요. 공문이 나오면 곧바로 전달해 줄 테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김용수 대사의 말대로 평정심을 유지하고 차분히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혹시나 공지가 뜬다면 관저 만찬을 통해 연습을 하면 될 테니까.

    마음을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나 맛있는 음식이었다. 한동안 가지지 못했던 맛집 친구와의 만남을 계획했다.

    약속을 확정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그럼 이번 주말에 괜찮지?

    -응응 주말은 괜찮은데 혹시 한 명 더 같이 가도 될까?

    -한 명 더? 누구?

    윤아와 친하게 지내던 현지 직원 카리나인가.

    맛있는 음식은 여러 명이 나눠 먹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흔쾌히 수락했다.

    -예민희 서기관님이 같이 가고 싶으시대.

    -오! 정말? 나야 땡큐지. 안 그래도 술이라도 한잔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었거든. 그때 이후로 만난 적이 없어서.

    업무적인 만남을 제외하고 예민희 서기관과는 아무런 교류가 없었다. 딱히 불편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좀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리고 예민희 서기관님이 가 보고 싶은 식당이 있으시대.

    -오 좋은 식당을 알고 있으시대?

    한껏 기대한 내 목소리에 당황했는지 윤아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좋은 식당은 아니고… 그때 가 봤던 고려인 식당이야.

    -고려인 식당? 그 국수 팔던 곳?

    -으응….

    윤아의 목소리가 이렇게 작아지는 이유는 그 식당이 맛집 탐방엔 어울리지 않는 식당이기 때문이다.

    딱히 맛이 있는 식당이 아니었으니까.

    -맛없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래도 예민희 서기관이 꼭 한번 가 보고 싶으시대.

    -음… 가 보자! 뭐 어차피 우리 더 이상 갈 곳도 없잖아?

    -그… 그렇긴 하지.

    윤아와 나는 파나르에서 가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식당들을 돌아다녔다. 파나르 음식들은 종류를 불문하고 대부분 마스터를 했고.

    딱히 새로운 맛집이라고 할 만한 곳은 더 이상 없었다.

    -뭔가 궁금한 게 있으신가 보지. 가 보자.

    -너만 괜찮다면 난 상관없어. 그 국수 나한텐 꽤 중독성 있었거든.

    내 기억에 짜지도 달지도 않은 이상한 육수 맛이었지만 묘하게 중독성이 있는 음식이었다. 그 국시라는 음식.

    그것 말고도 다른 메뉴가 있을 테니 예민희 서기관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 * *

    토요일 고려인 식당 앞.

    “안녕하세요 요리사님.”

    “잘 지내셨어요 서기관님?”

    “물론이죠. 이젠 완전히 적응했죠.”

    예민희 서기관은 활기찬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향수병을 이겨 낸 예민희 서기관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일할 때만 화이팅 넘치는 게 아니라 평소에도 장난 아니시네요.”

    “물론이죠.”

    그런 예민희 서기관을 앞장세우고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능숙하게 인사를 건네는 예민희 서기관.

    역시나 엘리트의 언어 습득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근데 서기관님. 갑자기 왜 고려인 식당에 가 보고 싶으셨던 거예요?”

    “저요? 갑자기 아니에요.”

    가져다준 메뉴판을 훑으며 말을 이어 가는 예민희 서기관이었다.

    “저 아주 예전부터 고려인들한테 관심이 많았어요.”

    “정말요?”

    “네. 고려인들 덕분에 외교관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예요.”

    예민희 서기관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고려인들과 관련이 있는 듯했다.

    “한국에 사는 고려인 4세들이 재외 동포로 인정받지 못해 평생 한국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쫓겨날 수도 있다는 뉴스 본 적 있으시죠?”

    “음… 자세한 건 몰라도 얼핏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저두요.”

    한국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인 4세들은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스무 살이 지나면 한국에서 추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법 개정을 위해서 제가 여기저기 좀 나대고 다녔거든요.”

    “나대다니요.”

    예민희 서기관의 과격한 언어 선택 덕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튼 그때 고려인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되고, 이 사람들이 얼마나 한국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어요.”

    “그러셨구나….”

    역시 살아온 길이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꽤 성공한 고려인들도 많지만 대부분 고려인들이 타국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거든요. 파나르에도 고려인들이 있는 걸로 아는데, 그들을 도울 길이 있으면 또다시 나대 보고 싶어요.”

    저번 라마단 기간 때 만났던 엘레나 씨 역시 후자에 속하는 고려인이었다. 타국에서 어떻게든 살아 보려 애쓰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항상 자신들의 조상은 한국인이라며 스스로를 지칭하곤 했다.

    “메뉴는 정하셨어요?”

    “네. 저는 비빔밥을 한번 먹어 볼게요.”

    “그럼 전 불고기요.”

    맛이 어떨진 모르겠지만 비빔밥과 불고기는 이름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었다.

    나와 윤아는 저번과는 다른 메뉴를 골랐다.

    “예민희 서기관님은 뭐 드실 거예요?”

    “음… 저는 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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