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88화 (189/202)
  • 188. 소원

    알렉스가 준비한 선물은 세계 곳곳에서 구할 수 있는 명품 소금이었다. 오스트리아 할슈타트의 광산에서 캐낸 소금, 프랑스의 게랑드 소금, 그 외에도 볼리비아, 하와이, 인도 등등 수많은 종류의 소금이 담겨 있었다.

    그중에는 반가운 글씨도 찾아볼 수 있었다.

    신안 천일염.

    명품 소금을 거론할 때 항상 빼놓을 수 없는 한국의 자랑거리이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저는 식재료 본연의 맛을 즐기고 싶어 합니다. 별다른 소스 없이 약간의 소금 몇 톨과 함께.”

    알렉스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 알렉스는 자타공인 명실상부 미식가였으니까.

    이곳에선 그의 말이 진리처럼 통했다.

    “그렇게 음식을 즐기다 보니 소금의 맛에 따라서도 음식의 맛이 확 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나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나눴었다. 아나가 그 시골에 박혀 요리 연구를 하는 이유도 그런 이유와 비슷했다. 식재료 본연의 맛을 더 깊이 파고들기 위해.

    아나의 표정만 봐도 선물이 마음에 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소금은 제가 몇 년에 걸쳐서 구한 것들입니다. 저의 생일 파티를 채워 주시고, 박식한 지식으로 가르침을 준 아나 씨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알렉스의 말을 끝으로 커다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갑작스럽게 계획된 이벤트는 테오와 나, 김용수 대사와 아나의 합작으로 별 탈 없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 * *

    알렉스의 방.

    알렉스의 직원들은 마치 귀빈을 모시듯이 우리를 맞이했다. 알렉스의 목에 단단히 매어져 있던 넥타이도 헐렁해져 있었다.

    “두 사람 정말 고마워요.”

    “마음이 조금 쫄리긴 했지만 재밌었습니다.”

    “저도 끝나고 나니 재밌었던 것 같네요.”

    우린 가볍게 술 한잔을 털어 내며 시원하게 웃을 수 있었다.

    “약속대로 두 분의 소원을 들어 드릴 테니 말씀해 보세요.”

    소원이라는 말에 나는 테오의 등을 먼저 떠밀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소원에 대해 마땅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테오는 명확했으니까.

    “정말 아무거나 말해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이요?”

    그럼 그렇지. 하늘의 별도 따 줄 수 있을 것처럼 말하더니, 막상 이 상황이 되니 조건을 달겠다는 건가.

    알렉스의 배포에 조금 실망하던 참이었다.

    “기왕이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거면 좋겠습니다.”

    “네?”

    잘못 들은 건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거?

    “제가 요즘 좀 바빠서 시간이나 마음을 쏟는 부탁은 들어 드리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요. 돈이 얼마나 들어도 좋으니 기왕이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소원을 말해 주세요.”

    “정말이죠?”

    “근데 현금을 달라는 건 안 됩니다.”

    “그건 걱정 마세요.”

    멋있다 이 사람.

    알렉스에게 돈보다 더 소중한 건 시간과 마음이었구나.

    다른 사람에겐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더 좋은 상황이었다. 특히 레스토랑을 차려 달라고 할 예정인 테오에게는 더.

    내가 더 신이나 테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럼 저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테오 셰프님 말씀해 보세요.”

    “저는 파나르에 좀 더 오래 남고 싶습니다.”

    “네?”

    “네?”

    알렉스와 나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원래 계획한 건 그게 아니었잖아. 프랑스에다가 근사한 레스토랑을 투자받아 오픈해 자기 요리를 하고 싶다는 게 소원 아니었어?

    갑자기 파나르에 레스토랑을 열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은 건가?

    “파나르에 좀 더 남고 싶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프랑스 대사관에서 좀 더 오래 근무를 할 수 있게 도와주시는 게 저의 소원입니다.”

    프랑스 대사관 요리사 역시 우리나라처럼 계약직의 신분이다. 대신 다른 게 있다면 계약직이라도 정규직과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것.

    재계약만 계속할 수 있다면 정규직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변수가 하나 있었다.

    “테오 정도면 원하는 만큼 머무를 수 있지 않나요? 실력이나 명성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그러고 싶지만 저희 대사님이 워낙 변덕이 심해서요.”

    바로 대사의 변심이었다.

    아무리 마음에 드는 요리사가 있더라도 2~3년 정도 근무하고 나면 별다른 이유 없이 요리사를 바꾸곤 한다. 테오라고 해도 변덕을 피할 수 없었다.

    “요즘 대사님이 제 요리에 익숙해졌는지 조금 티를 내시네요.”

    “허허 참. 테오 같은 요리사를 보내고 얼마나 대단한 요리사를 뽑으려고 그러나.”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국이나 프랑스나 별반 다를 게 없구나. 테오 같은 요리사도 대사의 변덕 한 번에 잘릴 수도 있다니.

    물론 테오를 자르는 게 쉽진 않겠지만 명분이야 만들면 그만.

    “저는 파나르가 좋습니다. 쥴리앙 대사님의 임기가 끝나도 계속 이곳에 머물고 싶습니다. 제 마음이 변할 때까지요.”

    “흠….”

    테오의 옆구리를 다시 한번 찔렀다.

    왜 그때 말했던 소원을 말하지 않았냐고.

    하지만 테오의 표정은 확신에 차 있었다.

    “어려운 소원이네요. 쥴리앙 대사와는 친분이 있어서 어렵지 않겠지만 그다음 대사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하겠어요.”

    어렵지만 안 된다곤 하지 않는 알렉스였다.

    아까 말했듯이 본업이 바빠 신경을 못 쓸 뿐 맘만 먹으면 안 될 것도 없어 보였다.

    “근데 왜 그런 소원을 말하는지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갑자기 몸을 배배 꼬며 쑥스러워하는 테오였다. 그 모습을 보니 뭐 때문에 소원을 바꾼 건지 눈치챌 수 있었다.

    “설마 샤샤 때문이에요?”

    “샤샤요? 그 기자 말하는 거예요?”

    테오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불꽃이 튄 게 아니었어? 샤샤 때문에 레스토랑을 포기할 정도로 진심이었던 거야?

    “샤샤랑 서로 아는 사이였어요?”

    “아뇨. 어제 처음 만났어요. 서로를 마음에 들어 하는 줄 알았지만 이 정도로 진심일 줄 몰랐네요. 레스토랑을 포기할 정도로.”

    “레스토랑은 또 무슨 말이에요 미스터 장?”

    궁금해하는 알렉스에게 테오가 알렉스의 제안을 먼저 수락했고, 그 대가로 자신의 레스토랑에 투자해 달라고 할 예정이었단 걸 알려 주었다.

    “와우. 꽤 큰 소원을 계획했었네요.”

    “하하 처음엔 진심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너무 과한 걸 요구하는 거 같기도 하고, 제 첫 레스토랑은 제 돈으로 해 보고 싶단 생각도 들어서요.”

    “그래도 테오 정도 셰프의 제안이었다면 흔쾌히 수락했을 겁니다. 프랑스에 가서 맘 편히 갈 레스토랑이 있다는 건 나한테도 좋을 테니까요.”

    조금 무리한 부탁이었겠지만 알렉스라면 충분히 소원을 들어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테오는 파나르에 남는 걸 선택했다.

    “갑자기는 아니고, 예전부터 미스터 장을 보면서 세상은 참 넓구나라고 생각했어요. 프랑스 요리에선 내가 상위권에 있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냥 요리를 하는 사람들 중엔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요.”

    “하하 겸손도 적당히.”

    “아니에요. 미스터 장과 요리하면서 많은 걸 배우고, 재밌는 시간을 많이 보냈어요. 난 아직 내 레스토랑을 열기엔 부족한 것 같아요.”

    스스로에 대한 점수를 과감히 깎아 버리는 테오.

    샤샤에 대한 마음을 합리화하려는 의도는 분명 아니었다.

    “그리고 솔직히 샤샤에게 첫눈에 반한 게 맞아요.”

    “오오.”

    “와우.”

    용기 있는 고백에 절로 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렇지만 갑자기 불타오르고 꺼져 버리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진 않아요. 그녀의 나라에 남아서 오래오래 천천히 진심으로 다가갈 거예요.”

    테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의 소원을 듣고 조금은 곤란해하던 알렉스 역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멋있습니다 테오. 남자로서 그런 태도 정말 존경합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책임지고 파나르에서 오래 일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테오의 그 표정을 보니 쉽게 넘어갈 수가 없겠어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테오의 소원은 그렇게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샤사를 찾아 나서는 테오. 이미 샤샤를 향한 발걸음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

    “그럼 이제 미스터 장의 소원을 들어 볼까요?”

    “저요? 음….”

    소원을 빌기 전까지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테오처럼 뭔가 멋있는 선택을 할 수는 없을까?

    금발의 잘생긴 백인 테오는 마치 영화 속 주인공 같았다.

    “미스터 장도 레스토랑을 차려 줄까요? 미스터 장이라면 역시 기꺼이 들어줄 수 있어요.”

    “아닙니다. 레스토랑을 차리는 건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어요.”

    “그러면요?”

    대답을 하기 전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재미로 넘기기엔 아까운 찬스였으니 좀 더 고심을 해야했다.

    “아! 좋은 게 생각났습니다.”

    “뭔가요? 뭐든 들어 드릴게요.”

    “퍼스트 클래스를 사 주세요.”

    “퍼스트 클래스요? 비행기 좌석 말인가요?”

    “네. 꼭 한 번 퍼스트 클래스를 타 보고 싶어서요.”

    “하하하.”

    알렉스가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듯 비즈니스석이나 퍼스트 클래스를 타는 알렉스에겐 아주 하찮아 보이는 소원이겠지.

    하지만 온전히 내 돈을 주고 타기엔 아까웠고, 부담스러웠다.

    “한국에서 파나르에 올 때 너무 힘들더라구요. 좌석이 좁아서.”

    “이코노미는 그렇죠. 오히려 버스보다도 못하니까.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 되더라구요.”

    나도 이해가 안 되지만 한 푼이라도 더 벌려는 항공사의 마음도 대충은 알 것 같았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 보니 미스터 장도 한국에 돌아갈 날이 머지않은 모양이군요.”

    “그래도 아직은 제법 남았습니다.”

    기껏해야 몇 달 남짓.

    파나르에 있는 동안 알렉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우연한 기회로 시작된 인연.

    이 파티는 나와 김용수 대사에게도 아주 중요한 파티였고 기억에 남을 만한 추억이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 관저에 초대해 줄 겁니까? 그러다가 한국 가게 생겼네요.”

    “걱정 마세요. 여기에 저희 대사님도 오셨으니 바로 날 잡으시죠.”

    “좋습니다. 그럼 미스터 장의 한국행 비행기를 퍼스트 클래스로 구매해 주면 되는 겁니까?”

    알렉스는 그 자리에서 비서를 방으로 불렀다.

    “제 거 말고 하나 더 구매를 부탁해도 될까요?”

    “한 장 더요? 대사님 거요? 얼마든지요.”

    “아뇨 대사님 거 말구요.”

    김용수 대사도 조금 맘에 걸렸지만 김용수 대사의 임기는 생각보다 늦게 끝이 날 수도 있었다.

    “사실 제 여자 친구가 유럽에서 공부 중입니다.”

    “그래요? 두 사람이 해외에서 참 열심히 사는군요.”

    “감사합니다. 제가 한국에 들어가는 시기와 여자 친구의 유학이 끝나는 시기가 비슷한데 선물을 하나 해 주고 싶습니다.”

    나도 한샘을 위해 뭔가를 따로 준비를 하겠지만 1년간 혼신의 힘을 쏟아 낸 한샘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금의환향.

    비단옷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고급스러운 퍼스트 클래스 좌석의 가죽을 느껴 보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면 미스터 장과 여자 친구 거까지 두 장?”

    “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뭐.”

    내 입장에선 굉장히 부담스러울 수 있는 결정을 앉은 자리에서 내려 버리는 알렉스였다.

    곧이어 들어온 비서에게 곧바로 내용을 전달했다.

    “언제든 출발할 수 있는 티켓을 구매해서 전달해 줄 테니 예약하시면 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자 친구도 기회가 된다면 직접 고마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알렉스에게 고개를 숙여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이 티켓뿐 아니라 파나르에서의 모든 일들에 대해.

    알렉스 역시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하는지 가벼운 포옹을 건네며 말했다.

    “그럼 이제 가 볼까요?”

    “예? 어디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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