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87화 (188/202)
  • 187. 선물

    “잠깐만요 두 분.”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김용수 대사였다. 이벤트에는 참여하지 않고 멀리서 지켜만 보던 김용수 대사가 앞장섰다.

    “당신은 누굽니까?”

    “상관없는 사람은 끼어들지 마세요.”

    두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다는 듯 여전히 불꽃을 뿜어냈다. 김용수 대사는 그런 두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주파나르 한국 대사 김용수입니다.”

    “한국 대사요…?”

    “크음….”

    대사라는 말에 두 사람의 기세가 조금은 꺾이는 듯했다. 예전이었다면 파나르에서의 한국 대사는 그리 존재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 대통령이 다녀간 후 입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한국 대사님이 끼어들 자리는 아닙니다.”

    “마… 맞아요. 이건 당신과 관련 없는 일입니다.”

    두 사람은 끝까지 알렉스를 찾아갈 기세였다.

    그러자 김용수 대사는 두 사람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다. 그리곤 근처에 있던 샤샤에게 다가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셨어요 샤샤?”

    “덕분이죠. 샤샤가 아니었다면 파나르에서 이렇게 오래 지내지 못했을 겁니다.”

    오래된 고향 친구를 오랜만에 조우하듯 두 사람은 기쁘면서도 애틋한 표정으로 반가움을 나눴다.

    샤샤와 김용수 대사를 지켜본 두 사람의 목소리가 점차 사그라들더니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준비한 디저트까지 드시고, 답안지를 제출하겠습니다.”

    무슨 말을 했길래 갑자기 잠잠해졌는지 모르겠지만 이벤트는 순조롭게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와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

    “너무 집중하면서 먹어서 그런가 머리가 아프네요.”

    “오늘 알렉스를 만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빨리 만나러 가야겠네요.”

    “저도요.”

    준비된 음식이 전부 끝이 나자 사람들은 하나둘 알렉스를 찾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아직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 조금 더 시간을 끌어 보려는 찰나 마이크를 통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고들 많았습니다 여러분. 제가 준비해 본 이벤트가 어떠셨습니까?”

    알렉스였다.

    언제 왔는지도 몰랐는데, 어느새 별장으로 들어와 무대에까지 올라와 있었다.

    싱긋 웃는 알렉스를 보자 테오와 나는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휴우 수고했어요 테오.”

    “미스터 장 덕분이죠. 이런 아이디어를 낸 것도 미스터 장이니.”

    누구의 공이 큰지 측정할 수 없었다. 그냥 지금은 배가 조금 고파졌을 뿐이다.

    “장 셰프.”

    “대사님!”

    가벼운 주전부리로 배를 채우던 차에 김용수 대사가 다가왔다. 오늘처럼 그 얼굴이 반가운 적이 없었다.

    “고생 많았어요. 작년에만 좀 고생하면 될 줄 알았는데, 역시 쉬운 일이 없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슈퍼스타는 원래 힘든 법이라네요. 감내해야죠.”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해 멀뚱멀뚱한 테오를 한번 쳐다봐 준 뒤 스윽 미소를 지었다.

    “근데 아까 두 사람은 어떻게 중재시키신 거예요? 덕분에 시간 맞춰서 잘 끝낼 수 있었습니다. 대사님 아니었다면 난리가 났을 거예요.”

    “허허 다행입니다.”

    “원래 알던 분이신 건가요?”

    “아니요. 그냥 샤샤의 직업이 뭔지 알려 줬더니 잠잠해지더라구요.”

    “샤샤요?”

    “그리고 다음에 우리 관저에도 한번 부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알렉스의 파티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빈번하게 거절당하는 직업이 바로 기자이다.

    고위층의 사람들이 주변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식욕이라는 본능에 집중할 수 있는 파티였으니까.

    물론 100% 정신을 놓고 놀지는 않지만 평소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줄 수도 있었다.

    “샤샤가 기자란 걸 믿던가요?”

    “내 부임식 때, 관저 초대했을 때, 그리고 얼마 전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사진을 보여 주니 할 말이 없죠.”

    “하하 기자가 무섭긴 무서운가 봅니다.”

    “두 사람이 난리 친 사실이 새어 나가면 알렉스가 곤란해지는 건 물론이고, 이런 생일 파티는 아예 없어질 수도 있다고 말하니 질겁을 하더라구요.”

    그만큼 알렉스의 생일 파티는 미식가로서도 포기하기 어려운 연례 행사였다. 자기들 때문에 이 파티가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파나르에서 입지가 줄어들 것은 뻔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저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가 우리 대사관 요리사니깐 관저에도 한번 초대하기로 했어요.”

    “그래요?”

    “사실 진짜 초대할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장 셰프의 음식을 따로 맛보게 해 준다니깐 조용해지더라구요. 장 셰프 이름을 좀 팔아먹었어도 괜찮죠?”

    “아유 물론이죠.”

    김용수 대사도 역시 공관장으로서의 능력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에는 상대방의 태도에 따라 휘둘리기도 했었는데 이젠 직접 나서서 중재를 하기까지.

    든든했다.

    파티 중엔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지냈었는데 가장 중요할 때 나서 준 김용수 대사였다.

    “뭐든 무난한 게 최고죠. 이제 장 셰프도 한국 돌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무리하지 마요. 이런 일은 잘해야 본전이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알렉스에게 진 신세는 따로 갚으면 돼요. 혼자 책임지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김용수 대사의 위로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테오, 미스터 장!”

    알렉스의 등장으로 흥분한 사람들을 겨우 가라앉힌 후 우리는 마주했다.

    두 손을 잡고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 건지.

    큰절이라도 할 기세였다.

    “미팅은 어떻게 됐어요? 잘 끝났어요?”

    “네 100% 만족스러운 협상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해요. 전부 두 사람이 시간을 벌어 준 덕분입니다.”

    다행히도 알렉스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다.

    “좀만 늦었으면 들통날 뻔했어요.”

    “안 그래도 얘기 들었습니다. 김용수 대사님이 또 실력 발휘를 해 주셨다구요?”

    “네 저희 대사님입니다. 그분이.”

    김용수 대사를 자랑스러워하는 날 보자 테오가 심술이 났는지 괜히 쥴리앙 대사의 이름을 꺼냈다.

    “우리 쥴리앙 대사님도 여기에 초대되었다면 나서서 해결했을 거예요.”

    “뭐예요 테오. 질투하는 거예요?”

    “질투는 아니고, 쥴리앙 대사님의 심정이 이해가 돼서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테오가 허탈하다는 듯 웃음소리를 뱉어 낸 뒤 말을 이어 갔다.

    “저는 살면서 요리로 누구한테 밀린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렇겠지. 프랑스의 천재 요리사 중 한 명이었으니까.

    “로베르토에게도 가진 재산은 밀려도 실력적으론 절대 안 밀릴 거라 자부해요.”

    “그건 동의해요. 로베르토와 비교해서 절대 실력이 밀리진 않아요.”

    테오는 시선이 나와 김용수 대사를 번갈아 가며 향했다.

    “근데 미스터 장은 뭐랄까… 나보다 레벨이 조금 위에 있다는 느낌이에요.”

    “에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 한참 모자라죠.”

    겸손이긴 했지만 정정당당하게 겨룬다 해도 내가 테오를 실력으로 꺾을 수 있을진 의문이었다. 물론 분야가 달라 정확한 경쟁이 될 수 없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서로 감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의 레벨이 나를 능가하는지 아닌지.

    “미스터 장은 나보다 한참 어리잖아요. 난 그 나이 때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테오는 내가 자신을 능가하는 사람이란 걸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난 그렇지 않았다. 배울 게 많고, 대단한 사람인 줄은 알겠지만 내가 가진 노하우나 경험치가 더 많다는 걸 감으로 알 수 있었다.

    “쥴리앙 대사님도 저랑 비슷한 감정이었을 겁니다.”

    “…….”

    쥴리앙 대사는 파나르에서 확고부동한 1등의 자리에 있었다. 영향력이며, 기간이며, 인맥의 넓이까지.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김용수 대사가 자신이 못 한 일들을 척척 해내니 묘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대사님이나 저나 아무리 어른이라 해도 본능은 숨길 수 없는 거거든요. 질투가 나는 속마음까지 숨기진 못했을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이유 없이 시비를 걸었던 걸까.

    지금은 아무런 감정이 남아 있진 않지만 김용수 대사는 쥴리앙 대사의 도발에 꽤 분노했었다.

    “근데 저는 대사님과 다른 방식을 택해 보려 합니다.”

    “다른 방식이라뇨?”

    “미스터 장을 완전히 인정하고, 최대한 많은 것을 배워 보려 합니다. 대사관 요리사 선배님.”

    테오는 마치 사무라이들이 인사를 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건 우리나라 아니거든요.”

    “아! 죄송합니다.”

    그런 테오를 보며 우리는 소리 내어 웃을 수 있었다.

    “얘기 다 끝나셨어요?”

    “미안합니다 알렉스. 우리 대화가 좀 길었죠?”

    옆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알렉스가 우리에게 뭔가를 건넸다. 고급스러운 종이 가방 안에는 검은색 박스가 담겨 있었다.

    “이게 뭐예요?”

    “선물입니다.”

    “선물이요? 뭘 이런 거까지… 소원도 들어주신다 해 놓고.”

    “아… 아니요. 그 이벤트에서 1등을 한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요.”

    “아….”

    머쓱해진 손을 올려 목덜미를 긁어 댔다.

    “새로 산 건 아니고, 내가 원래 수집하던 게 있어요. 그걸 조금씩 담았어요.”

    열어 보진 않았지만 비범한 선물인 것은 분명했다. 값이 엄청나게 비싸진 않더라도 분명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

    나도 그 상자를 열어 보고 싶었다.

    “1등이 누군지는 정해졌죠?”

    “네 아직 체크 중인데 거의 끝났습니다.”

    별장 직원들이 답안지 확인을 도와줘서 금세 끝낼 수 있었다. 알렉스와 테오, 그리고 나는 선물과 1등 수상자의 이름을 들고 다시 무대로 향했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결과가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파나르와 프랑스가 가까운 사이인 건 맞나 봅니다. 테오의 요리를 맞히신 분들은 많았는데 장덕수 셰프의 한식에서 결과가 나눠졌습니다.”

    역시나 한식은 아직 파나르 사람들에게 낯선 음식이었다. 이런 재료가 들어갔을 거라 추측조차도 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을 거다.

    1등을 한 사람은 테오의 프랑스 요리는 하나도 빠짐없이 맞혔고, 내가 만든 한식도 거의 만점에 가까웠다.

    정말 절대 미각의 소유자라 할 수 있었다.

    “영광의 1등은 바로 참가 번호 27번입니다.”

    사람들은 질투가 나면서도 진심으로 박수를 보냈다. 1등은 단 한 명이었고, 오답지는 공개되지 않았으니까.

    모두의 자존심은 지켜진 셈이나 다름없었다.

    “어?”

    역시나 무대 위로 걸어오는 사람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나. 축하해요.”

    “고마워요. 덕수 덕분에 1등을 할 수 있었네요.”

    “제가 뭘 했다고요 또.”

    “그때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덕수가 김치에 대해서 많은 걸 알려 줬잖아요.”

    “그랬나요?”

    정확히 말하자면 김치찌개였지.

    요리의 본질론에 대해 토론을 하다 김치 얘기까지 번졌던 걸로 기억한다.

    “그날 이후 김치에 대해서 많이 공부를 했었어요. 덕분에 그 보쌈김치의 속 재료도 꽤 쉽게 맞힐 수 있었어요.”

    “아나가 공부해서 알게 된 걸 자꾸 내 덕이라 하지 마요. 고생했어요.”

    싱긋 웃는 아나에게 알렉스가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여기저기서 큰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고, 아나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상자를 열어 보았다.

    “선물이 뭐야?”

    “다이아몬드?”

    “아니면 현금인가?”

    “트러플이나 샤프란 같은 걸지도.”

    저마다 궁금해하며 예상한 선물 목록을 외쳤다.

    아나의 손에 열린 검은 박스 안에는 15개의 작은 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통 안에는 색색깔의 가루가 담겨 있었고.

    아나는 그중 하나를 열어 당연하다는 듯이 입으로 가져갔다.

    “소금… 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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