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84화 (185/202)
  • 184. 미각 훈련

    이번엔 테오가 날 끌고 알렉스의 방을 빠져나왔다.

    무슨 꿍꿍이인 건지….

    테오는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이건 주방에서 보던 프로의 눈빛. 말투까지 변한 테오였다.

    “미스터 장. 우리가 저거 해 봅시다.”

    “네? 우리가요?”

    “네.”

    테오는 굳게 다문 입술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알렉스에게 도움받은 게 많아서 도와주고 싶지만 쉽지 않다는 거 잘 알잖아요.”

    “쉽지 않죠. 그렇지만 이건 엄청난 기회예요.”

    테오는 나완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난 알렉스를 그저 좋은 식재료를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테오의 생각은 그 이상이었다.

    “나는 로베르토와 함께 공부했지만 시작이 달랐어요.”

    “갑자기 로베르토요?”

    테오의 입에서 뜬금없이 로베르토의 이름이 나왔다.

    두 사람은 함께 주방에서 고군분투한 사이라고 알고 있었다.

    “저는 로베르토처럼 부잣집 아들이 아니라 제 레스토랑을 직접 가질 수 없었어요.”

    “아….”

    친구였지만 로베르토는 일찌감치 베네치아에 자기 레스토랑을 열고 자리 잡았다. 하고 싶은 요리를 실컷 하며, 세계의 여러 요리사들도 데려와서 함께 일을 했다.

    오픈 초기엔 로베르토의 음식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많지 않아 돈을 많이 못 벌었지만 그 기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넉넉하게 지원해 주는 집안 때문이었다.

    “나는 죽기 살기로 20시간 동안 일을 하면서 이 자리까지 왔어요. 미슐랭 스타를 달고, 셰프가 되었지만 온전히 내 음식을 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

    “여기 파나르에 와서 처음으로 내 음식을 해 본 거나 다름없어요.”

    월급 받는 셰프의 숙명은 그런 거지. 어느 정도 선택권은 있겠지만 사장이 원하는 대로, 또는 잘 팔리는 메뉴 위주로 요리를 해야 하니 요리사로서의 갈증은 완전히 해소하긴 어려웠다.

    “그래도 테오 정도의 명성이면 여태 모은 돈으로 작은 레스토랑 정도는 차릴 수 있지 않았어요?”

    아무리 그래도 테오는 꽤 유명한 요리사다. 프랑스에서뿐 아니라 그 범위를 유럽 전체로 넓혀도.

    보통 사람들보단 훨씬 많은 월급을 받을 게 분명했다.

    “작은 레스토랑? 그런 거야 억지로 하면 열 수 있겠죠. 하지만 그걸로 돈을 벌 수 없어요. 촌구석에서 여유롭게 수프나 끓이며 세월을 보낼 정도로 나이가 든 것도 아니구요.”

    “그렇긴 하죠.”

    “나도 내 이름을 단 레스토랑이 세계 구석구석에 알려지는 게 꿈이에요. 그러려면 적어도 이름 있는 도시엔 있어야 해요.”

    파리, 로마, 베네치아, 런던 등등.

    이름 있고, 규모가 조금 큰 도시에서 그럴싸한 레스토랑을 차리려면 엄청난 돈이 든다. 일반인 월급으론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 아무리 테오라 하더라도 쉽지 않았다.

    “오늘 기회가 눈앞에 온 것 같아요.”

    “설마…?”

    “네. 알렉스의 부탁을 들어주고, 제 레스토랑을 열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할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무리 알렉스가 급하다 해도 조금은 무모한 부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테오의 눈에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에요. 알렉스는 분명 흔쾌히 받아들일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돈이 많아서 그 정도는 거뜬할 것 같아서요?”

    나의 물음에 테오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물론 알렉스가 엄청나게 돈이 많다는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에요. 레스토랑 하나쯤은 가볍게 투자할 수 있을 정도니까요.”

    “그럼 다른 이유는요?”

    “알렉스는 진정으로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부가적인 설명이 없어서 그 말은 단번에 수긍할 수 있었다.

    단순히 진귀하고 비싼 식재료만 고집하는 게 아니라 편안하고 넓은 주방, 요리사들이 일하기 쉽도록 온갖 도구나 기계들을 구비해 놓은 알렉스의 별장이었다.

    그건 알렉스가 ‘음식’이 아니라 ‘요리’에 진심이란 증거였다.

    “그래서 어떻게 손님들의 시선을 끌 건데요? 적어도 3시간은 잡아 둬야 할 텐데?”

    “하하 그건 이제 고민해 봐야죠. 우리 둘이서.”

    “하….”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주방에서는 한없이 프로답다가도 샤샤처럼 이상형 앞에선 한도 끝도 없이 무너지는 테오였다. 또 평소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도.

    “미스터 장이 손님들의 성향을 잘 알고 있으니깐 아이디어를 한번 내 봐요.”

    “나는 특별히 원하는 소원도 없는데, 이건 테오를 위한 일이잖아요. 테오가 아이디어를 내야지 그럼….”

    투정을 부려 봤지만 테오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돈이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이 미스터 장의 호텔에 왔을 때 어땠는지 생각해 봐요. 어떤 음식이나 술에 정신이 팔렸는지. 꼭 음식이 아니라도 어떤 상황에서 정신이 팔리는지.”

    테오와 나는 여태까지 머릿속에 모아 둔 데이터베이스를 전부 훑기 시작했다. 테오는 내가 호텔에서 2년 남짓만 일을 한 줄 알겠지만 실제론 그 10배가 넘는다.

    “비싼 와인보다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와인이나 술, 음식도 마찬가지고….”

    “프랑스도 비슷해요.”

    “그렇지만 그 방법은 이미 작년에 써먹은 거라서요. 또 써먹어도 되지만 올해는 준비해 온 게 없어요.”

    한참 동안 머리를 맞대 봤지만 별다른 수가 나오질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혼신의 힘을 다해 요리를 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일까.

    “그럼 손님들이 한눈을 팔거나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집중했던 적은 없어요?”

    “집중이라….”

    주변에서 뭐라고 하는지 신경도 안 쓸 정도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다면 그건 대개 ‘공포’나 ‘분노’처럼 부정적인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악성 컴플레인이라도 걸린 날이면 그 손님은 주변 사람들 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짜증을 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유독 기억에 남는 블랙 컨슈머 하나가 떠올랐다.

    “완전 미친 사람처럼 날뛰던 손님은 있었는데. 주위 사람들은 물론이고, 직원들한테 화를 내는 데만 집중해 가지고.”

    “허허 그럼 알렉스의 손님들 화를 일부러 돋워서 시선을 돌리자? 우리를 향한 분노가 알렉스를 향한 분노보다 더 강하게?”

    “아… 그런 건 아니구요.”

    물론 효과는 있을 것 같았지만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방법을 쓸 생각은 아니었다. 파티가 끝난 후 후유증도 장난 아닐 테고.

    “근데 그 손님은 왜 그렇게 화를 냈대요?”

    “그 손님요? 완전 어이가 없어요. 자기가 카레를 싫어하는데 음식에서 카레 향이 난다고 그 난리를 쳤어요.”

    “정말 카레가 안 들어갔어요?”

    “당연하죠. 잡내를 없애기 위해 생강이랑 향신료 몇 가지가 들어갔는데 그걸 카레로 착각해서 그 난리를 친 거죠. 자기는 미식가라 절대 틀리지 않는다구요.”

    “하하 근데 그럴 수 있겠네요. 카레 가루는 향신료 모음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때를 생각하면 저절로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카레 가루가 여러 향신료를 섞어 만든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미식가.

    헛똑똑이들이 많았다.

    “우리 레스토랑에도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남자 4명이었는데 생선을 굽기 전에 후추를 뿌렸는지, 후추를 먼저 뿌린 후 생선을 구웠는지 내기를 했대요. 그걸 일반인들이 어떻게 알 수 있다고….”

    “하하 그러게요. 그 정도로 예민한 혀를 가지려면 미각 훈련을 몇 년이나 해야 할 텐데.”

    “그러니까요. 미스터 장도 미각 훈련해 봤어요?”

    “저요? 당연하죠.”

    “정말요? 벌써요? 그 나이 땐 그 훈련에 필요성을 잘 못 느낄 텐데, 역시 대단하네요.”

    미각 훈련은 보통 셰프들이 절대 미각을 가지기 위해 하는 훈련이다. 소스나 각종 향신료 등을 반복해서 맛을 보고, 그 양을 줄여 가며 맛에 대한 민감도를 늘리는 훈련이다.

    한식은 손맛이니 눈대중이니 하면서 이런 훈련을 등한시하기도 하지만 난 최선을 다해 훈련에 임했었다.

    “우리 이렇게 잡담할 시간이 없어요. 알렉스에게 우리 의견을 말해 줘야죠. 그래야 대책을 세우든지 포기하든지 할 테니까요.”

    “그렇죠. 기회라 생각해서 질러 봤는데 마땅한 수가 안 떠오르네요.”

    나도 이번엔 테오의 말에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할 거라면 지금부터라도 메뉴를 구상해야 했다. 원래 하려고 했던 음식들론 부족할 것 같았으니까.

    후우 부자들.

    예민함.

    허세.

    희귀함.

    고급스러움.

    미각.

    레스토랑.

    블랙 컨슈머.

    답답한 마음에 생각나는 단어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어울릴 법한 단어들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

    아!

    한참을 생각하다가 본능적으로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테오가 놀라서 물었다.

    “왜요? 뭐 좋은 아이디어라도 생각났어요?”

    “잘하면 시간을 끌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어떻게요? 뭔데요 생각해 낸 방법이?”

    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것들.

    비싸기보단 귀한 것.

    이쁜 것보단 적은 것.

    편한 것보단 아무도 쓸 수 없는 것.

    그만큼 나만 가지고, 나만 알고 있다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이었다. 그것이 음식이라고 다를까?

    나만 가지고 있는 절대 미각, 나만 먹어 본 음식 등등.

    이런 것들은 여기 모인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미각 훈련을 해 봅시다!”

    “미각 훈련을요? 우리가?”

    “아니요. 여기 모인 손님들을 모아 두고요.”

    확신이 든 나는 테오의 손목을 잡고 알렉스의 방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알렉스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들어선 날 보며 표정이 밝아졌다.

    “미스터 장! 방법을 찾아낸 거죠? 그렇죠?”

    “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요? 어떻게요?”

    “그래요 어떻게요? 나도 제대로 설명해 줘요.”

    테오는 손님들을 상대로 미각 훈련을 하자는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알렉스와 마찬가지로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저와 테오가 번갈아 가면서 음식을 만들 겁니다. 최대한 재료나 소스를 많이 쓴 복합적인 음식으로요.”

    “그리구요?”

    “채소류도 최대한 다양하게 쓸 생각입니다.”

    알렉스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은 것 같았지만 테오는 이제 감을 잡은 것 같았다.

    “보통 사람들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소량의 재료들을 쓰겠다는 말이죠?”

    “맞습니다. 음식 하나가 완성될 때마다 손님들에게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묻는 겁니다.”

    알렉스는 얘기를 들을수록 표정이 밝아지고 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습성을 잘 이해한 듯한 사람의 발상이었다.

    “자기가 대단한 미식가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기를 쓰고 어떤 재료들이 들어갔는지 맞히려고 할 겁니다.”

    “아마 자존심 때문에라도 맞히려고 할 겁니다. 주변에 보는 눈이 많을 테니까요.”

    “맞습니다. 게다가 맛을 음미하면서 먹기 위해 식사 시간도 더 느릴 테구요. 그리고 코스가 끝나고, 최고로 많은 숫자의 재료를 맞춘 사람이 1등을 하는 겁니다.”

    알렉스는 내 얘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곧바로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진행합시다.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해 줄 테니 그거 한번 해 봅시다.”

    “정말이십니까?”

    “네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들의 심리를 제대로 파고든 것 같아요. 이건 사업가인 내가 보장합니다. 두 분이 음식만 잘 만들어 준다면 저들은 반응할 겁니다.”

    파나르 최고의 사업가 중 한 명인 알렉스가 확신을 하니 나 역시 자신감이 생겼다.

    “대신 알렉스가 준비해 줘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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