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실수
어눌한 발음으로 봐선 파나르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이제 알렉스밖에 없는데 그의 목소린 아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누구… 세요?”
역시나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상대방 역시 긴가민가한 표정.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덕수 맞죠?”
“네. 제가 장덕수입니다. 저를 아시나요?”
상대방은 내 신분을 확인하자마자 입꼬리를 올리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맞군요! 팬입니다.”
“팬…? 이라뇨?”
“티브이에서 봤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덕수를 응원했어요.”
남자는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내 정체를 소문냈다. 그러자 음식에만 홀려 있던 사람들이 내 주변으로 슬슬 몰려들기 시작했다.
“와아 알렉스의 파티는 역시 뭔가 달라도 다르네.”
“오늘 저희도 김타코를 먹을 수 있는 건가요?”
“이 쿠므스도 이분이 도와줬다던데.”
“아! 나는 작년에 먹어 봤어요. 한국의 막걸리를 만들어 왔었죠?”
갑자기 몰린 사람들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람들에게 밀려 사진도 찍고, 사인까지 해 주었다.
관심을 보여 주는 건 고마웠지만 조금 부담스러웠던 말들이 몇 가지 들려왔다.
“덕수! 작년 음식들은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올해는 얼마나 대단한 걸 준비했어요?”
“나는 작년에 머루 와인을 맛보지 못했어요. 올해도 한국 술을 준비했나요? 그럼 지금부터 줄 서 있을게요.”
“아… 저.”
작년 알렉스의 생일에서 아무것도 없었던 내가 선택했던 방법은 사람들을 안달 나게 하는 것이었다.
온갖 진귀한 음식과 술이 모여 있는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존재감을 나타내려면 그 방법뿐이었다.
일부러 적은 양의 술만 만들어 공개했고, 그 술이 궁금했던 사람들은 덩달아 내 음식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올해엔 나도 테오처럼 칼 한 자루만 갖고 온 터라 작년처럼 숨겨 놓은 술 같은 건 없었다.
“나는 덕수의 음식을 또 맛볼 수 있을까 해서 1년 내내 기대했어요.”
“나도요. 근데 갑자기 티브이에 나오길래 얼마나 반가웠다구요.”
올해는 작년처럼 애쓰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샤샤가 말했던 게 이런 의미였나.
이런 식이면 내가 일을 하는 날에도 사람들을 응대하느라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올해 처음 초대받은 김용수 대사 역시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대사님!”
“아아 장 셰프. 오늘은 일 안 하는 날이에요?”
“네 제 차례는 마지막 날입니다. 바빠 보이시네요.”
“허허 그러게요. 날 알아보고 말을 걸어 주는 사람이 제법 많네요. 나도 말 걸고 싶은 사람이 많고.”
“저희의 위상이 작년과 많이 달라졌나 봅니다. 하하하.”
“나보단 장 셰프의 위상이 달라졌겠죠. 아까 보니깐 거의 팬 서비스 수준이던데.”
쑥스러움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여튼 나는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니 가 볼게요. 내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요. 3일 내내 올 생각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대사님.”
김용수 대사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용수 대사가 자리를 떠나고 사람들의 관심이 잠시 줄어들었을 때쯤 테오와 샤샤를 다시 마주쳤다.
“미스터 장, 날 두고 어딜 갔다 온 거예요. 찾았잖아요.”
“정말 날 찾았어요?”
“어… 그게… 당연히 찾았었죠.”
뻔한 테오의 거짓말에 나는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테오를 바라보는 샤샤의 눈빛은 달콤했다.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돌고 있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맘 편히 파티를 즐기기엔 할 일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테오. 미안해요. 저는 오늘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아서요.”
“괜찮아요 샤샤.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요.”
“나중에 연락할게요.”
아쉬워하는 테오의 손을 끌어 잡았다. 안 그랬다간 샤샤를 향해 돌아선 채로 굳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
“테오. 우리는 알렉스를 만나러 가요.”
“…….”
“테오!”
멍때리는 테오를 향해 소리를 쳤다.
“미안해요. 어딜 간다구요?”
“알렉스를 만나러 간다구요. 약속한 시간에만 만날 수 있어요.”
“아아 알렉스. 그래요. 날 초대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죠. 샤샤라는 여자도 만나게 해 줬으니.”
생일 파티에 초대해 줘서 고맙다는 건지 샤사를 만나게 해 준 걸 고맙다고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테오는 순순히 따라나섰다.
“샤샤는 어떻게 알게 되었어요?”
“샤샤요?”
샤샤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테오를 위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알려 주었다. 최대한 포장까지 곁들여서.
물론 굳이 포장하지 않아도 샤샤가 그 자체로도 멋있는 여자인 건 기정사실이었다.
“와아 역시 멋있어….”
“테오는 샤샤가 맘에 들어요?”
테오는 대답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잘 맞을 거예요. 샤샤는 맛있는 걸 좋아하고, 테오는 그걸 잘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맞아요. 잘 맞을 거예요 우린.”
핑크빛을 잔뜩 뿜어내는 테오를 데리고 알렉스의 방 앞에 도착했다. 알렉스가 생일 파티의 주인공인 만큼 그를 만나려고 하는 사람들은 줄을 섰다.
3일 내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눠도 시간이 모자라는 알렉스였다.
그래서 나와 테오는 특별히 따로 약속 시간을 정해 뒀었다.
똑똑똑.
경호원의 안내를 받아 알렉스의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들어오라는 소리가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원래 시간을 어기지 않으시는 분인데….”
“괜찮습니다. 천천히 하세요.”
우린 급할 게 전혀 없었지만 직원들은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변수를 만난 사람들처럼 웅성거렸다.
“어! 이제 들어오시죠.”
“네 알겠습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약속했던 시간이 훨씬 지나서 알렉스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직원들이 분주한 몸놀림으로 빠져나갔다.
“어서 와요 미스터 장.”
“반가워요 알렉스. 이쪽은 프랑스 대사관 요리사 테오예요.”
“반가워요 알렉스예요.”
알렉스에게 테오를 소개했다. 테오는 여전히 핑크빛 미소를 머금고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테오의 손을 잡는 알렉스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항상 웃고, 긍정적이기만 하던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다.
테오가 맘에 안 들기라도 한 건가?
그러기엔 둘은 오늘 처음 만나는 거다. 테오를 맘에 들어 할 이유도,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
중간에서 괜히 무안해진 내가 알렉스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알렉스? 생일날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아요?”
“아… 아니에요. 별일 아닙니다.”
알렉스도 지금 본인의 표정의 예의에 어긋난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서둘러 미소를 지어 봤지만 어색함을 지울 수 없었다.
“주방이랑 별장은 다 둘러봤어요?”
“그럼요. 테오도 전부 마음에 든다고 하네요.”
“고마워요 알렉스. 이런 곳에서 요리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요.”
“별말씀을요. 제 생일 파티에 와 주셔서 제가 고맙죠.”
굳어 있던 분위기가 조금씩이라도 풀어지려는 찰나 알렉스의 전화가 울렸다.
급한 전화였는지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한번 한 후 돌아서는 알렉스였다.
“여보세요? 어떻게 됐어?”
전화를 받자마자 격양된 목소리로 일관했다. 귀까지 붉어지더니 결국 알렉스는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래서 상황을 잘 설명해 보라 했잖아! 아니면 별장으로 초대를 하든지! 그거 하나를 설득 못 해?”
알렉스를 여러 번 만나 봤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구김살 없고, 긍정적이기만 할 것 같던 알렉스였는데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어휴 이 바보 같은 놈들.”
웃음 가스라도 마신 것처럼 헤벌쭉하던 테오도 차가워진 분위기에 표정이 굳어 버렸다.
“미안합니다. 미스터 장, 그리고 테오 씨.”
“저희는 괜찮지만 큰일 생긴 거 아니에요?”
괜히 캐물었다가 짜증을 더 키울까 봐 겁이 났지만 그냥 나가 버리기에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알렉스는 한숨을 푹 쉬더니 입을 열었다.
“직원 하나가 실수를 했어요.”
“실수요? 무슨 실수요.”
항상 알렉스를 독대하고, 통화도 바로 하다 보니 알렉스가 거대한 회사의 대표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가 책임지고 있는 직원이 수백 명이었다.
“아주 중요한 미팅이 하나 있는데, 원래 생일 파티가 끝난 다음 날로 잡기로 했었거든요.”
뭐 때문에 이리 화가 났는지 단번에 감이 왔다.
“남들은 내가 사치나 부리려고 이렇게 생일 파티를 하는 줄 알지만 나에겐 이 파티가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예요.”
“…….”
알렉스 같은 진짜 사업가들의 세상은 알지 못하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냥 그렇다면 그런 거였다.
“그래서 저는 3일 내내 초대받은 손님들을 전부 만나 대화를 나눕니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요.”
“이 많은 사람들을 전부요?”
“네 이 파티를 시작하고 난 후로 한 번도 빼먹은 적 없어요. 그리고 여기에 오는 손님들도 나와 같은 생각일 거구요.”
나와 테오처럼 요리사가 아닌 이상 모든 손님들은 알렉스를 통해 뭔가를 얻어 낼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알렉스와의 만남을 절대 놓치지 않으려 했다.
알렉스도 그걸 알기에 일일이 사람들을 만나는 거였고.
“근데 그 미팅 날짜가 내일로 정해져 버렸어요.”
“내일이요?”
“네 담당했던 직원한테 책임지고 날짜를 바꾸라고 했지만 실패했어요. 방금 전화가 그 직원이었구요.”
“아….”
속사정을 듣고 나니 알렉스가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이해가 되었다. 이 파티에 적어도 몇 달간은 공을 들이는데 하루를 통째로 날려 버리게 생겼으니.
“그것 하나 설득 못 해서… 참내.”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건가요?”
“네 그렇지만 저로선 둘 중 하나라도 놓치기엔 너무 아쉬워요. 특히 올해 생일 파티엔 새로 초대된 사람도 많거든요.”
김용수 대사도 그중 하나였다.
파나르의 거물급 인사엔 큰 변화가 없지만 매번 새로운 인맥들도 초대하는 알렉스였다. 올해엔 그 숫자가 예년보다 많았고.
“파티의 주인공이 얼굴도 한번 안 비쳤다고 섭섭해할 텐데….”
“그 미팅을 조금 미루면 안 되나요? 밤늦게라도 미룰 수 있다면 좀 낫잖아요. 아니면 빨리 끝내든지요.”
의미 없는 해결책을 몇 가지 제안해 봤지만 알렉스의 한숨은 깊어질 뿐이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 보겠지만 반나절은 족히 상의해야 할 일들이에요. 그 시간 동안 날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겠네요….”
딱히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손님들에게 만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혼을 뺄 정도의 음식을 선보여 시간을 끌어 준다면 또 모를까.
더 이상 방해되지 않게 빨리 자리를 비켜 주는 편이 나았다.
“미스터 장! 테오.”
“네?”
“혹시 시간을 좀 끌 방법이 없을까요?”
“시간이요? 반나절이나요?”
“내가 어떻게든 그것보단 빨리 끝내 볼게요. 그것보다 중요한 건 내가 별장에 없다는 걸 손님들이 알아차리면 안 돼요.”
“손님들이요? 왜요?”
“내가 이 많은 손님들을 두고 별장을 떠났다는 걸 알면 다들 불쾌해할 거예요. 전부 파나르에서 한자리씩 하는 사람들이라 자존심들이 굉장하거든요. 두 사람이 어마어마한 음식으로 시선을 좀 빼앗아 줄 수 없을까요?”
알지 너무나도 잘 알지.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파나르의 정치와 경제를 이끌어 간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들의 고급지고 까다로운 입맛을 음식으로 잡아 두라고?
불가능이었다.
요리는 답이 정해진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산해진미를 갖다 놔도 본인이 맛이 없다 하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맛이 있어도 대단한 미식가인 양 맛이 없다고 할 사람들도 있었다.
“테오는 프랑스 최고의 요리사고, 미스터 장은 파나르에서 증명된 최고의 요리사잖아요. 두 사람이면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안 그래요?”
“아….”
“저….”
테오와 나 둘 다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작년처럼 철저하게 준비라도 해 왔으면 몰라.
자신 없는 일이었다.
“이번 일 잘 넘어가면 내가 두 사람 소원 하나씩 들어 드릴게요.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아니요, 그 소원이 문제가 아니라.”
열정만으로 될 일이 아닌지라 정중히 거절하려는 찰나 테오가 앞장섰다.
“그럼 잠시만 상의할 시간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