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82화 (183/202)
  • 182. 두 번째 알렉스의 생일 (2)

    알렉스의 별장.

    올해엔 파나르어도 많이 늘었고, 테오라는 동지도 생겨 윤아는 함께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년과 상황은 비슷했다.

    “여기 무슨 군대예요? 웬 경비가 이렇게 살벌해요?”

    “프랑스 대사관보단 낫죠.”

    한국 요리사들의 근무 환경을 놀린 테오에게 소심한 복수로 돌려주었다. 철장이 빼곡한 프랑스 대사관보단 여기가 덜 살벌했으니까.

    “이런 별장을 개인이 가지고 있다니, 놀랍네요.”

    “아직 놀라긴 일러요.”

    알렉스의 별장은 외관도 훌륭할 뿐 아니라, 요리사들에게 제공하는 방의 상태들도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테오와 나처럼 요리사들에게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주방이었다.

    “와아… 이게 다 주방…?”

    “여기 있어 보세요.”

    멍해진 테오를 두고 주방 끝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짧게 소리치자 내 목소리가 메아리 되어 주방 안을 멤돌았다.

    “관리도 엄청 잘되었네요.”

    “그렇죠? 알렉스라는 사람이 음식에 진심이거든요.”

    “그런가 봅니다. 이 주방은 크기만 큰 게 아니라 동선도 꽤 고심한 흔적이 보여요.”

    역시 테오도 그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다.

    여건이 되어도 업장의 주방을 이처럼 크게 만들지 않는 이유는 동선 때문이기도 했다. 최대한 효율적이고, 적게 움직여야 빠른 테이블 회전을 유도할 수 있을 테니까.

    “자칫하면 다 꼬일 만큼 큰 주방인데, 아주 좋아요.”

    “이것 말고도 또 볼거리가 있어요.”

    “또요?”

    마치 여기가 내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이 나서 테오를 끌고 다녔다. 작년의 나처럼 너무 당황하지 않도록.

    작년에 난 작전을 잘 세워서 결과가 좋았던 거지 이렇게 큰 주방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요리를 즐겨 하는 테오에겐 주방을 빠삭하게 꿰고 있는 것이 중요했다.

    “짜잔.”

    “이거 설마 다 워크인?”

    “네 맞아요. 그리고 생선이나 해산물류 전부 여기에 있어요.”

    “도대체 알렉스라는 사람 뭐 하는 사람이에요?”

    테오의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이번 생일 파티를 괴짜 부자의 사치 정도로 생각했었다는 테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알렉스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함부로 그런 소릴 못 한다.

    “테오. 이번 기회를 꼭 잡으세요.”

    “기회라뇨? 어떤 기회요?”

    높은 일당이나 이곳에 초대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이 생일 파티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주인공인 알렉스였다. 적어도 파나르에서 요리사로 일을 하면 알렉스만큼 좋은 인맥도 없었다.

    “알렉스랑 친해지면 좋은 일이 많을 거예요. 구하기 힘든 식재료도 대부분 구할 수 있구요.”

    “정말요?”

    “저번에 기억나요? 테오가 나한테 처음 부탁했던 날요?”

    “일본 요리 말하는 거예요?”

    “네 맞아요. 그때 장어로 요리했었잖아요.”

    “맞아요. 그 미스터 장의 스승 덕분에 살았죠. 아니었으면 전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을지도 몰라요.”

    “에이.”

    테오의 말은 물론 거짓말이지만 그때 나와 주방장님은 귀한 식재료와 화려한 기술로 일본 대사를 놀라게 했다.

    정작 나는 요리사보다 해결사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때 그 민물장어를 구해 준 게 알렉스였어요.”

    “그래요? 그 사람이 이 사람이었구나.”

    “알렉스도 조금 구하기 힘들었지만 결국 구할 수 있었죠.”

    테오도 분명 느꼈을 것이다.

    파나르 시장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없는 식재료가 많다는 것을. 종류가 다양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프랑스와 파나르에서 주로 먹는 식재료가 달랐기 때문에 어쩔 주 없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들은 1년 내내 김치를 먹기 때문에 흔히 생각하는 배추를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유럽이나 파나르에서는 그런 배추보다 양배추를 훨씬 많이 먹기 때문에 일반 배추를 구하기가 어렵다.

    그런 것들이 쌓이면 메뉴를 구상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안 그래도 좀 답답한 게 있었는데 앞으론 알렉스를 통해서 구하면 되겠군요.”

    “하하 그치만 알렉스의 눈에 띄려면 보통 음식으론 안 될걸요?”

    “그래요? 미스터 장 혹시 내 실력 무시하는 거예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여기에 테오만큼 경력이 있는 요리사들은 많거든요. 그 사이에서 알렉스의 눈에 띄려면 뭔가 무기가 필요할 거예요.”

    작년에 트럭을 동반해 수제 막걸리를 가지고 온 나와는 달리 테오는 자신의 칼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별장으로 들어왔다.

    “무기는 무슨 무기요? 다 준비되어 있으니 몸만 오라던데요? 저는 제 칼 아니면 안 돼서 칼만 가지고 온 건데.”

    “보시다시피 있을 건 다 있고, 없을 것도 있어요. 근데 이것들이 모든 요리사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거죠.”

    나는 작년에 준비했던 걸 테오에게 읇어 주었다. 대사님까지 동원해 막걸리와 산머루 와인을 만들고, 그게 눈에 띄어 알렉스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것을.

    “와아… 미스터 장.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도 미리 말해 줬어야죠. 나도 와인 만들 줄 아는데.”

    “하하 죄송해요. 뭔가 따로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았죠.”

    속으로 아무리 수제 와인이라고 한들 여기 오는 손님들의 관심을 받을 순 없었을 거다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여기 오는 사람들은 단순히 비싸고, 고급스러운 것에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역시 미스터 장은 나와 근본이 달라요.”

    “근본이라뇨. 저보다 훨씬 훌륭한 요리사의 길을 걸어오셨으면서.”

    “그건 그냥 경력일 뿐이죠. 미스터 장은 나와 생각하는 것 자체가 달라요. 나는 절대 그런 생각까진 못했을 거예요.”

    테오가 날 부러워하는 부분은 단순히 요리 실력이 아니었다.

    상대방의 심리를 이용하는 마음.

    어떻게 하면 상대방이 내 음식을 기억해 줄 수 있을까라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방법을 생각해 내는 것을 부러워했다.

    “그런 건 타고나야 해요.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전생에도 요리사였다면 또 모를까.”

    “하하하 전생이요?”

    “그 정도는 돼야 이런 걸 생각해 낼 수 있다는 말이에요.”

    테오는 빈 웃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선 전혀 실망하거나 안타까운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테오는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언제 어디서나 배울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자격지심이 없는 사람.

    그러니까 한참 어린 나와도 이렇게 편한 대화를 할 수 있는 거겠지.

    “여튼 저는 아무런 준비도 해 오지 않았으니 오직 실력만으로 승부를 봐야겠군요.”

    “그걸로도 충분하죠.”

    “만약 내가 이 칼 한 자루만으로 알렉스의 눈에 띈다면 나도 타고난 천재라고 할 수 있겠죠? 미스터 장도 못 했던 거니까.”

    “당연하죠! 그리고 천재 아니라니까요.”

    우리 둘은 그 후로도 주방과 식재료 창고 곳곳을 훑어본 후 숙소로 돌아갔다.

    칼 한 자루만 들고 온 사람은 테오뿐만 아니라 나도 그랬으니까.

    올해는 힘을 빼고 즐겁게 임할 생각이었다. 원래 목표였던 김용수 대사의 초대도 이끌어 냈으니.

    알렉스와도 충분히 친분을 쌓았고, 이 파티에서 내가 최선을 다해야 할 명분은 빚진 것 하나뿐이었다.

    * * *

    생일 파티가 시작되자 많은 사람들이 주인공인 알렉스를 찾았다. 다들 즐기러 온 파티지만 제각각 목적을 하나씩 가지고 온 사람들이었다.

    오늘은 나와 테오가 요리를 하는 날이 아니었다. 테오는 3일 내내 일을 하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자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세상에! 이런 알바가 어딨어요. 3일 내내 일하는 줄 알았는데 딱 하루만 하면 된다니요. 게다가 급여는 3일 치를?”

    미슐랭 출신 셰프에게도 30,000유로는 큰돈이었다.

    발걸음이 가벼운 테오와 함께 파티장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있었다.

    “미스터 장!”

    먼저 고군분투하고 있는 요리사들을 보고 있으니 뒤통수에서 날 부르는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지만 금방 그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샤샤!”

    “미스터 장.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죠?”

    “저는 얼마 전 대통령 행사 때 샤샤를 봤어요.”

    “정말요? 인사하지 그랬어요.”

    “너무 바빠 보이길래요.”

    샤샤는 파나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자인 만큼 김채훈 대통령의 방문 때도 공식 초청된 기자였다. 다만 너무 바빠 말도 제대로 걸지 못했을 뿐.

    대화를 나눈 건 그때 관저에 왔다 간 이후 처음이었다. 반가운 맘에 샤샤에게 다가가 가벼운 포옹을 건넸다.

    “나 살 좀 쪘죠?”

    “샤샤요? 모르겠네요. 그때 워낙 말랐어서. 아직도 채식해요?”

    “어우. 진작에 그만뒀죠. 그래서 살 좀 찐 거죠.”

    여전히 채식을 하냐는 물음에 샤샤는 두 손을 저어 거부감을 표현했다. 그땐 다크서클이며, 깡마른 몸이며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였는데.

    지금 샤샤의 모습은 멋있는 커리어 우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근데 미스터 장은 파나르어가 많이 늘었네요?”

    “정말요? 티가 나나요?”

    샤샤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정식으로 초대받아서 온 거예요?”

    “그럼요. 작년에 한 번 놓쳤던 게 얼마나 억울하던지….”

    “하하 올해는 원없이 먹고 가세요.”

    샤샤는 이미 제대로 작정을 하고 온 듯했다. 분신과도 같은 카메라도 내려 두고 파티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근데 미스터 장도 올해는 손님으로 온 거예요?”

    “아니요. 올해도 일하러 왔습니다.”

    작년과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땐 청탁을 통해 들어온 거고, 올핸 알렉스의 부탁으로 들어온 거다.

    대우는 같았지만 마음가짐이 작년보단 여유로웠다.

    “내 생각에 미스터 장은 제대로 일 못 할 거 같은데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근데 옆에 계신 분은 누구예요? 소개 좀 해 주세요.”

    마냥 신이 나 두리번거리던 테오를 샤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이쪽은 프랑스 대사관 요리사 테오예요. 테오, 여기는 파나르에서 가장 힘 있는 기자 샤샤예요.”

    “힘은 무슨….”

    테오는 샤샤를 보며 갑자기 프랑스식 인사를 건넸다. 가벼운 포옹과 볼맞춤. 샤샤 역시 익숙하게 테오의 인사를 받아들였다.

    “미슐랭 레스토랑 출신 셰프시죠? 소식 많이 들었습니다.”

    “오우 아름다운 여인께서 저를 알고 계시다구요?”

    방금까진 천진난만하던 테오의 몸집과 표정이 어느새 변해 있었다. 매너 있고, 중후한 매력을 풍기는 프랑스 남자가 되어 있었다.

    “작년에 미스터 장의 이름이 많이 들렸다면, 올핸 당신의 이름이 익숙하네요.”

    “하하 그쪽에게만 익숙한 이름이었으면 하는데.”

    “호호호. 그것도 좋죠.”

    갑작스럽게 변한 두 사람의 태도에 당황스러웠다.

    비슷한 또래의 남녀가 관심을 가진다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특히 샤샤는 요리를 즐겨 하고, 음식을 사랑하는 여자였다. 테오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테오는 누가 봐도 멋있는 유럽 남자였고.

    두 사람을 위해 슬며시 빠져 주기로 했다. 눈치 빠른 내가 움직여야지.

    “테오, 샤샤.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네.”

    “알았어요.”

    두 사람은 내가 어딜 가든 전혀 상관없는 듯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풋풋하구만.

    내 눈엔 샤샤와 테오도 풋풋한 커플일 뿐이었다.

    두 사람을 피해 별장의 마당으로 나왔다. 화장실은 당연히 핑계였고, 이참에 혼자 여유를 즐겨 볼 요량으로.

    북적북적한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때였다.

    “덕…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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