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80화 (181/202)
  • 180. 앞풀이

    “그럼 제가 요리 한번 해 드릴게요.”

    “네? 요리를요? 대회에서 상 받으면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그렇게까지는 안 해 주셔도 돼요. 그리고 진짜 상을 받은 후에 보상을 해 줘야 팀원들도 열심히 할 거 같은데….”

    놀라며 미안해하는 캡틴을 향해 손을 저었다.

    이건 엄밀히 말해서 요리라고 할 수 없었다. 일종의 간식이라고 할까?

    “다음 주에는 경기 전에 모여서 맛있는 것도 먹고, 술도 한잔해요.”

    “경기 전에요? 너무 이른 시간인데 문을 연 식당이 있을까요?”

    “그 시간에 문을 연 식당은 없죠.”

    “그럼요?”

    “운동장에서 할 겁니다.”

    “운동장에서요? 우리 경기하는 곳에요? 거기서도 요리를 할 수 있나요?”

    사실 내가 뒤풀이보다 좀 더 좋아하는 건 앞풀이(?)였다.

    조기 축구는 대개 새벽부터 축구를 시작하기에 밥을 챙겨 먹을 시간도 없고, 오전 내내 운동장에만 있기 때문에 경기 전 뭔가를 먹으며 하자는 생각에서 발전한 게 앞풀이였다.

    근데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의 문화가 되어 버려서 문제지. 이젠 아예 경기 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음식을 만들어 술과 함께 먹는 문화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뒤풀이와 달리 경기 후 시간이 되는 사람들만 모이지 않고, 팀원들 전부 함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겨울엔 어묵탕이라고 따뜻한 국물 요리를 잔뜩 끓여 와서 먹으면서 축구를 해요. 여름에는 과일 화채나 간단한 것들을 만들어서 먹구요.”

    “허허허 운동장에서요? 축구하러 오는 게 아니라 먹으러 오는 거 같은데요?”

    “맞아요 사실. 조금 과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한번 그 맛을 보면 빠져나오기가 힘들어요. 재미도 있고.”

    이번에도 캡틴은 잠시 의아해했지만 이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에 대한 신뢰도는 굉장했다. 게다가 대사관 요리사인 내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럼 한번 해 보시죠. 저는 뭘 도와 드리면 될까요?”

    “일단 처음이니깐 제 식대로 한번 준비해 볼게요. 팀원들 반응이 괜찮으면 그 후엔 캡틴이 준비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고마워요.”

    이걸 전파시켜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한국식 축구 동호회의 모습을 퍼트릴 준비를 서서히 하고 있었다.

    한국의 여느 조기 축구회처럼 이곳 사람들도 중년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고, 그들에게 축구는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거다.

    축구 외에도 즐겁게 뭔가를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의미론 앞풀이 문화도 충분히 좋아할 거라 확신했다.

    * * *

    파나르 한국 대사관 관저.

    김용수 대사는 최근 활기가 도는 내 모습을 보며 신기해했다.

    조금은 피곤해하거나 똑같은 일상에 지루할 법도 한데 대통령이 다녀오기 전보다 나는 더 활기가 넘쳤다.

    “장 셰프. 요즘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표정이 밝아졌네요.”

    “그런가요? 티가 나나 보네요.”

    “그럼요. 무슨 일인데요?”

    “대사님 조언을 좀 새겨들었거든요.”

    “제 조언이라뇨?”

    김용수 대사의 말을 듣고, 파나르에서 요리 말고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해 보고 돌아가겠다는 생각으로 축구 동회회에 가입한 것을 말해 줬다.

    그리고 금세 친해져 한국식 문화도 많이 전파했다는 것과 캡틴을 위해 뒤풀이 문화와 앞풀이 문화까지 알려 줬다는 것도.

    “그래요? 완전 외교관 업무를 하셨네요? 근데 나한테 왜 아무런 보고도 안 했나요.”

    “네? 이제 말씀드리는 거죠. 저도 너무 오랜만에 축구를 하는 거라 지금도 재미가 있을지도 모르고, 한국이랑 분위기가 어떨지 몰라서요. 적당히 자리 좀 잡으면 말씀드리려고 했죠.”

    “허허 장 셰프가 축구에 관심이 있는지는 몰랐네.”

    “그냥 예전에 조금씩 한 게 전부입니다. 잘하는 건 아니구요.”

    김용수 대사는 내가 자기 말을 참고해 요리 말고 다른 것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축구 동호회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도 잘해 주고요?”

    “네 저한테는 아주 잘해 줍니다. 저번 주에는 같이 한식당에서 뒤풀이까지 했습니다.”

    “좋네요. 근데 장 셰프.”

    “네 대사님.”

    “혹시 괜찮으면 나도 한번 같이 가면 안 됩니까?”

    “네? 어디를요? 저희 축구 동호회를요?”

    김용수 대사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베테랑의 향기가 느껴지는 기분이랄까?

    자신의 말을 새겨들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았던 게 아니라 그냥 축구 얘기가 즐거웠던 김용수 대사였다.

    “나도 소싯적에 축구 좀 즐겨 했었거든요. 사내 체육 대회 하면 선수로도 꼭 뽑히고 했었어요.”

    “정말요? 그 정도로요?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나도 김용수 대사와 똑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 말하잖아요. 우리가 서로 이런 주제로 얘기 나눌 기회가 있었나요.”

    “그… 그러게요.”

    아침밥을 겸상하며 수많은 얘기를 나눴지만 축구 얘기는 웬일인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나도 나이가 들어 흥미를 잃었었고, 김용수 대사 역시 축구화를 벗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났었다.

    “괜찮으면 나도 한번 같이 가요. 오랜만에 공 한번 차고 싶네요.”

    “저야 좋죠!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그 기왕이면 어묵탕 끓일 때 같이 갑시다. 공 차기 전에 그거 먹는 걸 좋아하거든요.”

    “어묵탕이요? 하하 대사님 조기 축구회 짬밥이 제법 되시나 봅니다.”

    김용수 대사 역시 경기 전에 뜨끈한 국물로 몸을 녹이고, 축구하는 것을 즐겨한다고 했다.

    여름에도 뜨거운 차를 꼭 마시는 파나르 사람들에게도 시원한 화채보단 뜨끈한 국물이 있는 어묵탕이 더 적합할 것 같았다.

    그렇게 다음 주 앞풀이 메뉴는 결정이 되었다. 그리고 용병 한 명이 더 갈 거라는 소식과 함께 팀원들에게 아침밥을 굶고 오라는 공지가 전달되었다.

    * * *

    학교 운동장 앞.

    동호회 사람들은 평소보다 좀 더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아마도 내 음식과 또 다른 용병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겠지.

    나도 김용수 대사의 차까지 빌려 버너며, 냄비며, 이것저것 많은 것을 트렁크에 한가득 실었다.

    예전부터 축구하는 날 축구화보다 주방에서 챙기는 게 더 많은 나였다.

    “와우 장! 아예 주방을 가지고 왔네요?”

    “아니 축구랑 관련된 건 축구화랑 양말이 전부면서 이것들은 다 뭐예요.”

    “팀원들한테 맛있는 것 좀 해 드리려다 보니 욕심을 좀 부렸나 봐요.”

    우리 팀원들뿐만 아니라 상대방 사람들도 낯선 광경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말씀드린 용병도 한 분 데리고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이라고 불러 주세요.”

    김용수 대사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팀원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자신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앞에 있으니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파나르에도 한국의 장유유서처럼 웃어른을 공경하는 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었다.

    “귀한 몸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 한국 대사님이라고 들었는데.”

    “다치지 않도록 제가 알아서 조절해서 하겠습니다.”

    김용수 대사 역시 아직은 어설픈 파나르어로 대답을 했지만 팀원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냥 외국인들의 입에서 파나르어로 된 인사만 튀어나와도 대단한 사람인 양 떠받들어 줬다. 근데 나와 김용수 대사는 최대한 문장을 만들어 말을 하려고 노력했으니깐 이들의 눈엔 그저 좋아 보일 수밖에.

    타악-

    나는 일단 축구화를 갈아 신고 버너에 불을 올렸다.

    어젯밤까지 신이 나서 준비한 어묵탕 육수를 끓이기 시작했다.

    큼직한 무를 껍질째 씻어서 통째로 넣는다. 대파와 양파 그리고 건어물이 귀한 파나르에서 만찬 때 쓰려고 아껴 둔 마른 멸치를 듬뿍 넣고 끓여 준다.

    갖다 대기만 해도 뭉개질 정도로 무가 익으면 마지막으로 깨끗이 닦아 불순물을 제거한 다시마를 넣고 딱 10분 후 건져 내면 감칠맛 있고 깊은 육수가 완성된다.

    “이건 어묵이라고 하는데 생선으로 만들었어요.”

    “생선이라고? 전혀 생선처럼 안 생겼는데.”

    “한국 사람들은 진짜 여러 가지를 먹는구나.”

    역시나 귀한 어묵을 두 번 접어 나무 젓가락에 꽂아 주었다. 최대한 길거리에서 먹는 어묵의 느낌을 주기 위해 끓는 냄비에 넣고 불었다 싶을 정도로 익혀 주었다.

    “자 이제 다 됐어요.”

    “생선 요리가 참 특이하게 생겼네.”

    커다란 냄비에 어묵 꼬치가 나란히 꽂혀 있으니 불품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푸짐해 보였다.

    몇 년간 같이 축구를 해 온 상대팀 사람들도 낯선 음식 냄새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뭐야? 축구하기 전에 이런 걸 먹어?”

    “캡틴! 저분들도 다 오라고 하세요. 넉넉합니다.”

    상대 팀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히 준비해 왔기에 전부 불러 모았다.

    공짜로 먹을 걸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캡틴이 날 대사관 요리사이고, 티브이에 나왔다며 또 한번 자랑을 해 대니 한 명씩 악수를 건네며 앞풀이에 합류했다.

    “이게 바로 한국식 축구 문화래. 신기하지?”

    “허허 별일이네. 근데 이거 생선으로 만든 거라고요?”

    “맛이 독특하네. 나쁘지 않아.”

    “근데 국물이 뜨근하니 좋구만.”

    우리 팀원들과 상대팀 팀원들은 어묵 국물이 가득 담긴 종이컵 하나씩을 들고 만족스러운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파나르는 일교차가 심해 한여름에도 아침은 꽤 쌀쌀했다. 덕분에 뜨끈한 어묵 국물은 아주 인기가 많았다.

    “든든하게 먹어서 그런가 빨리 축구하고 싶어지네.”

    “나두요. 어서 시작합니다.”

    “그럼 바로 운동장으로 모이겠습니다!”

    움츠려 있던 몸을 따뜻한 국물로 풀어 주고, 위장에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 적당히 포만감을 느끼게 해 주는 어묵은 축구인들에게 딱이었다.

    게다가 다행이도 파나르 사람들의 입맛에도 딱 맞았고.

    “그럼 대사님이 먼저 뛰세요. 저는 배가 불러서 좀 쉴게요.”

    “그럴까요 그럼? 어차피 힘들면 일찍 나올 테니 그때 나랑 교체해요.”

    “알겠습니다.”

    김용수 대사는 뒤뚱거린다는 말이 적합할 정도로 어슬렁거리며 운동장으로 들어갔다.

    한국에서 온 두 번째 고령의 용병 포지션은 최전방 공격수.

    골을 넣어야 이기는 축구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포지션이지만 아마추어 사이에선 버리는 카드를 종종 공격수에 넣기도 한다.

    양팀 통틀어 나이가 가장 많은 김용수 대사에게 골을 바라고 공격수를 맡긴 건 아니었다. 그저 안전하고, 다치지 않도록 경기를 끝내 주란 의미.

    “헤이 킴. 슛.”

    “좋아. 읏챠.”

    하지만 우려와 달리 막상 경기가 시작되니 가장 주목받는 포지션은 최전방 공격수였다.

    분명 거의 뛰지도 않고, 반경 5m이내에서만 움직이는 것 같은데 계속해서 유효 슈팅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해 봤지만 공격수는 여전히 김용수 대사가 맞았다.

    “킴! 진짜 70살 넘는 거 맞아요?”

    “거짓말 아니야?”

    “한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축구를 잘해요?”

    첫 경기에서 몸을 푼 김용수 대사는 다음 경기들을 완전히 지배했다. 얼마 전 내 실력을 보고 놀랐던 팀원들은 온데간데없었다.

    다들 김용수 대사에게 패스를 주기 바빴다. 김용수 대사는 받는 패스를 족족 골로 성공시켰다.

    내가 봐도 보통 실력은 아니었다.

    “하하 장이랑 킴. 두 사람 다 너무 잘하는 거 아니에요?”

    “특히 킴은 우리보다 더 잘 뛰는데?”

    팀원들 모두가 김용수 대사의 효율적인 움직임에 놀란 눈치였다. 덕분에 팀의 사기가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한국인들이 이렇게 축구를 잘하는 건 아까 그런 문화 때문이 아니에요?”

    “네? 그런 문화요?”

    “운동장에서 어묵탕도 끓여 먹고, 경기 후에는 회식도 하고 그러니깐 축구를 다 잘하는 거 아니냐구요. 둘 다 이 정도로 잘해 줄지 몰랐어요.”

    “하하 아마 그럴지도 몰라요. 팀워크에 도움이 되는 건 분명하니까.”

    나도 김용수 대사의 이런 모습은 처음 봤다.

    맨날 책상에 앉아 있던 모습뿐이었는데.

    “대사님 이게 뭐예요. 축구 실력이 장난 아니시잖아요.”

    “허허 이젠 나이가 있어 제대로 뛰질 못하니 이 정도밖에 안 되네요.”

    “이 정도밖에라니요. 혼자 골 다 넣으셨잖아요.”

    김용수 대사의 실력을 보고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거짓말 조금 보태 어릴 적 외교관이 아니라 선수의 길로 갔어도 꽤 성공했을 것 같았다.

    “장 셰프도 만만치 않게 잘하던데요?”

    “저는 아직 젊으니깐…(몸이).”

    나는 넘치는 체력과 건강한 몸상태를 이용해 무조건 많이 뛰는 스타일이었고, 김용수 대사의 몸놀림은 고수 그 자체였다.

    덕분에 우린 그날 모든 경기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몇 개월 만에 맛보는 연승이었다.

    “다들 오늘 고생 많았어요.”

    “재밌었습니다.”

    “늙은이도 같이 끼워 줘서 고맙습니다.”

    “혼자 골 다 넣으시곤 이제 와서 늙었다뇨. 저희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자주 놀러 오세요.”

    팀원들 모두 김용수 대사를 진심으로 대해 주었다. 하지만 김용수 대사의 몸 상태는 매주 축구를 할 정도는 아니었고, 컨디션이 좋을 때 한 번씩 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장 셰프가 축구하러 오기전에 무슨 음식을 준비하는지 보고 특별히 맛있는 걸 만들 때 따라오겠습니다.”

    “하하 그럼 매주 오겠다는 말 아닙니까? 장의 음식은 항상 맛있을 텐데.”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경기에서 이긴 우리 팀도, 진 상대 팀도 분위기는 최상이었다. 경기 전 다 같이 어묵탕을 나눠 먹으며 소통한 결과였다.

    “장, 상대 팀에서도 오늘 너무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해 줘서 고맙대요. 재밌었대요. 종종 이런 시간을 가지자고 합니다.”

    “오 다행이네요. 저야 무조건 좋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번에 말한 대로 다음 주는 제가 한번 준비해 볼게요.”

    “뭘요?”

    “앞풀이요.”

    어눌한 발음으로 앞풀이라 대답하는 캡틴을 보고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흐뭇했다.

    앞풀이는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말도 아니었고, 우리 동호회에서만 사용하던 말이었다.

    파나르 축구팀에게 처음 나온 한국말이 ‘앞풀이’란 게 조금 웃기기도 했지만 목적은 달성했으니 상관없었다.

    주말 아침마다 운동장에 모여 앉아 뭔가를 먹는 모습을 파나르에서도 볼 수 있게 되다니.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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