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78화 (179/202)
  • 178. 한국의 문화

    오랜만에 그라운드를 누비니 힘은 들었지만 상쾌했다. 예상대로 몸도 가볍고 몇 년간 아팠던 무릎 통증도 전혀 느껴지지 않아 공격이며, 수비며 말 그대도 종횡무진이었다.

    “장! 실력이 진짜 용병인데요?”

    “너무 잘해요. 좋아요.”

    “감사합니다.”

    팀원들 역시 기대 이상이었던 실력 덕에 금세 경계를 풀고 하나둘 나에게 다가왔다.

    경기 중엔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가, 거기 멈춰 등 간단한 단어만 사용할 뿐이었지만, 중간중간 잠시 쉬는 시간에도 팀원들은 온갖 몸짓을 이용해 나에게 말을 걸고 싶어 했다.

    역시 들어오길 잘했어. 땀을 흘려 기분도 좋고, 걱정했던 텃세 같은 것도 없었다.

    나도 최대한 그들의 궁금증에 대해 대답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캡틴! 어디서 이런 훌륭한 선수를 데리고 왔어?”

    “너희들 이 사람 몰라?”

    “장? 설마 한국에서 축구 선수였어?”

    캡틴의 말에 날 축구 선수로까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선수로 의심받을 정도로 잘한 것은 아니었다.

    팀의 주장 겸 회장인 사람 역시 피식하며 내 정체를 소개했다.

    “얼마 전 그 티브이에 나왔잖아. 푸드 트럭에서 김타코 팔았던 사람 기억 안 나?”

    “그 사람? 당연히 알지 근데 그 사람이 왜?”

    “설마? 그 사람이 이 장이랑 같은 사람이야?”

    팀원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캡틴은 흐뭇한 표정으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와아! 어디서 봤다 싶었는데 그 사람이었구나. 나 그거 너무 재밌게 봤어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나 살면서 파나르 문화에 대해서 관심 가지는 외국인을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장이 꼭 1등 하길 바랐었거든요.”

    “나도 나도.”

    “근데 그 사람이 내 눈앞에 있을 줄이야.”

    역시 음식보다 독특한 파나르 문화에 집중했던 게 시청자들에게도 각인이 된 모양이었다.

    “그럼 아직도 파나르 대사관 요리사로 일해요?”

    “당연하죠.”

    “와아 그것도 대단하다.”

    “네? 왜요?”

    “그 방송 나가고 스카우트 제의 엄청 왔을 것 같은데 그걸 다 거절하고 우리 파나르에 남아 있는 거잖아요.”

    “아… 뭐 그렇긴 하죠. 하하….”

    멋쩍게 그리고 빠르게 웃어넘겼다. 스카우트 제의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달랑 하나뿐. 그것도 넌지시 던져 본 말이 전부였다.

    여튼 내 가벼운 몸 상태와 캡틴의 바람잡이 덕분에 나는 하루 만에 축구 동호회 스타가 되었다.

    “오늘 너무 고생 많았어요. 이제 매주 만나요 장.”

    “네 당연하죠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기회되면 우리도 한국 문화 좀 알려 줘요. 우리도 파나르 문화를 더 알려 줄 테니.”

    다음에? 기회 되면?

    왜 지금이 아니고?

    나는 첫날 가장 많은 골을 넣었고, 팀원들과도 꽤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 분위기를 그대로 뒤풀이 장소로 끌고 가면 이것만큼 좋은 학원도 없을 텐데.

    캡틴은 물론이고, 팀원들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각자 갈 길을 갔다.

    “저 캡틴.”

    “네 장.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요?”

    “혹시 경기 끝나고 같이 밥이나 술 같은 건 안 마시나요?”

    팀원들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빠르게 돌아갔고, 마지막까지 남아 용품 정리를 하던 캡틴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하지만 캡틴은 내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왜 밥이나 술을 먹어요?”

    “아….”

    한국에서는 축구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경기 후 또는 경기 전에 함께하는 시간도 제법 길었다.

    땀을 잔뜩 흘리고 먹는 삼겹살에 소주 한잔이나 든든한 국밥 한 그릇.

    그런 것들이 동호회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그냥 축구하고 나면 배도 고프고 그러니까요.”

    “배고프긴 하죠. 그럼 장은 밥 먹고 들어가요. 다음 주에 봐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구구절절 설명해 봤자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일단은 첫날이니 이 정도 친해진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잠깐만요!”

    “네?”

    아쉬운 맘에 돌아서려는 찰나 캡틴이 다시 나를 붙잡았다.

    “방금 말한 그거요.”

    “경기 끝나고 밥 먹는 거요?”

    “네 맞아요 그거. 그걸 하는 이유가 혹시 따로 있을까요?”

    캡틴은 정말 몰라서 그랬던 거였다. 밥이나 술을 먹으며 친해지는 문화가 파나르에선 그리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직장인들에게는 이런 회식 문화가 부담이고, 불편한 자리지만 같은 취미를 가지고 즐기는 사람들끼린 분명 플러스 요인이 된다.

    “우리는 프로 선수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팀워크를 향상 시키는 데 훈련만으론 한계가 있어요. 동기 부여가 없잖아요. 매주 있는 경기에서 항상 죽을 듯이 달려들 수도 없는 거구요.”

    “그렇긴 하죠.”

    “한국 사람들은 경기 후에 밥이나 술을 먹으면서 서로 더 친해지거든요. 그게 경기에서도 나타나구요.”

    캡틴은 가만히 내 이야기에 집중했다. 처음엔 뭔 소리를 하나 싶어 이상하게 쳐다보던 표정은 어느새 고민 상담이 필요한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사실은 제가 얼마 전에 새로 캡틴이 되었어요. 이전에 하시던 분이 워낙 오랫동안 이 팀을 잘 이끌어 주셔서 그분을 따라가려니 조금 벅차네요.”

    “아하 그러셨구나.”

    “제가 캡틴을 맡기 전엔 대회에서 상도 받을 정도로 실력도 좋고, 팀 분위기도 굉장히 좋았어요.”

    “역시 그랬군요. 그래서 그런지 오늘 분위기가 엄청 좋더라구요.”

    캡틴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오늘 팀의 분위기는 굉장히 좋았다. 경기도 대부분 이겼고, 팀원들은 처음 보는 나에게 먼저 다가와 말도 걸어 줬다. 하지만 캡틴은 나의 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듯했다.

    “오늘만 특별히 좋았던 것뿐이에요. 새로 데리고 온 장의 실력이 좋고, 티브이에 나왔던 유명한 사람이라 저에 대한 평가가 조금 달라졌어요. 그런 용병을 섭외해 왔으니까요. 아깐 까먹었지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장 덕분이에요.”

    “저요? 제가 뭘 했다고….”

    “아니에요. 요즘은 팀 전체 분위기도 별로고, 항상 이기던 팀한테도 자꾸 지니깐 저에 대한 불신이 커져 가고 있었거든요.”

    한번 말을 시작하니 숨겨져 있던 고민이 술술 새어 나왔다. 새로운 캡틴 역시 이 팀에 오랜 시간 몸을 담아 애정이 있었지만 자기가 캡틴을 맡은 후부터 급격하게 팀 분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 때문에 팀이 망가지는 것 같아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다.

    “훈련도 열심히 하고, 회비도 반으로 줄여 보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는데 크게 변하는 건 없네요.”

    “그런 고민이 있었군요.”

    “근데 저는 이 팀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해 보려구요. 단순히 축구만 하는 곳이 아니거든요.”

    “잘 알죠. 그게 어떤 의미인지.”

    나 역시 동호회에 오래 몸담았던 이유가 축구뿐만은 아니었다. 같이 몸을 부딪히고 머리를 맞대다 보니 오래된 친구들만큼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었다.

    그 사람들과는 축구가 아닌 무엇을 해도 시간 가는 줄 몰랐고, 힘든 일이 생기면 만사를 재쳐 두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거기까진 아니어도 이 파나르 축구 동호회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기대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장이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제가요? 제가 뭘 어떻게?”

    나는 그저 파나르어를 좀 더 빨리 배우고 싶어 회식을 제안했던 건데 캡틴은 한 차원 더 깊은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같이 땀을 흘리고 마시는 술 한잔과 맛있는 음식은 분명 팀을 끈끈하게 만들 수 있었다.

    내 경험상 그건 확실했다.

    “장은 티브이에서 파나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미지라서 우리 팀원들이 아주 좋아해요. 그리고 실력도 기대했던 것보다 좋아서 오히려 저보다 장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더 많을 거예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저는 처음 본 사람인데….”

    “처음이니깐 더 효과가 있죠. 익숙해지고 나면 환상은 금세 깨져요. 아무리 유명한 연예인이라도 맨날 보면 그냥 똑같은 사람일 뿐이에요.”

    그건 100% 맞는 말이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많았던 나에 대한 관심은 오늘 하루가 끝일 거다. 첫날이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보여 준 예의는 이게 전부.

    점점 보통 팀원들과 똑같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캡틴의 말대로 차라리 동호회에 들어온 초반이 내 이미지를 사용할 적기였다.

    “뭘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되는데요?”

    “파나르 사람으로서 생각나는 방법은 다 해 봤어요. 더 이상 해 볼 것도 없어요.”

    캡틴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이번엔 그 한국식으로 한번 시도해 보시죠.”

    “음….”

    막상 별것도 아닌 한국 문화를 전파하려니깐 부담이 되었다. 한국과 달리 이런 문화를 싫어하면 스리슬쩍 넘어가서 운동이나 하려고 했는데 이건 달랐다.

    캡틴의 표정을 보니 꼭 성공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이 느껴졌다.

    “캡틴. 제가 알려 주는 방법이 전혀 효과가 없을 수도 있어요.”

    “알아요. 그렇지만 뭐라도 해 봐야죠. 장을 데려올 때 특별한 기대를 한 건 아니었지만 하루 만에 팀 분위기를 올렸잖아요.”

    “그건 그냥 운일 뿐이고, 몇 주만 지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거예요.”

    “괜찮아요. 비록 며칠, 아니 몇 시간 동안이라도 팀 분위기가 올라갈 수 있다면 해 볼 가치가 있는 일이에요.”

    캡틴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어차피 내가 하고 싶었던 것도 다를바 없으니 상관없겠지. 가볍게 한 끼 하는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한번 해 보죠. 저도 파나르에서 처음 들어온 팀 분위기가 좋으면 좋으니까요.”

    “고마워요 장. 일이 잘 풀리면 꼭 보답할게요.”

    “괜찮습니다.”

    잠시 혼란이 있을 뿐이지 저렇게 팀을 사랑하는 캡틴이 이끄는 동호회의 미래는 분명 밝을 게 확실했다. 그 기간을 좀 더 짧게 할 수 있다면 나에게도 좋은 일이었고.

    * * *

    다음 주 운동장.

    파나르 축구 동호회 사람들은 캡틴의 말대로 같이 밥이나 술만 마시지 않을 뿐 경기 전 훈련도 열심히 하고, 서로의 가족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럴수록 캡틴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장 아까 경기 중에 파울하고 나서 먼저 사과하지 마요.”

    “네? 그거 제가 일부러 파울한 거라서요.”

    “알죠. 그래도 먼저 사과하지마요. 우습게 본단 말이에요.”

    “아! 이것도 웃으면 안 된다는 거랑 비슷한 건가요?”

    “맞아요! 그냥 운동하는 게 목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경기 중엔 항상 진지해야 해요. 그렇게 웃고 사과하면 자기들을 무시한다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 정도로요?”

    파나르의 문화는 알면 알수록 신기한 게 많았다.

    팀원들은 축구와 관련된 문화 말고도 버스를 탈 때나 술집에서 술을 주문할 때 유의할 점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꿀팁들을 많이 알려 주었다.

    “장. 그러지 말고 재밌는 한국 문화도 좀 알려 줘요. 나중에 우리도 한국 놀러 가면 당황하지 않게.”

    “하하 한국 문화요?”

    어느 정도 팀원들과 사적인 대화까지 나누다 보니 한국에 대한 궁금증도 자연스레 늘어났다.

    “한국 사람들도 우리처럼 모여서 축구하고 그러죠?”

    “당연하죠. 한국에서는 축구가 제일 인기 있는 스포츠 중 하나예요.”

    “역시! 소니 같은 선수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라니까.”

    “우리 파나르도 축구에 관심을 좀 가지면 좋을 텐데.”

    공통 주제인 축구 얘기만 꺼내면 대화가 술술 이어졌다.

    이렇게 말이 나온 김에 기회를 잡아 보기로 했다.

    “한국의 축구 동호회에서는 좀 특이한 문화가 있어요.”

    “그래요? 그게 뭔데요?”

    “이게 오히려 축구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어요.”

    “축구 동호회에서 축구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 수 있나?”

    “훈련 같은 건가?”

    팀원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한국의 축구 동호회 문화에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일종의 팀워크 훈련이랑 비슷한 거죠.”

    “오 그렇지! 축구에선 팀워크가 가장 중요하니까.”

    “그럼 어떤 식으로 훈련을 하는데요? 그 방식이 괜찮으면 우리도 따라 해 보면 되지 않나? 안 그래도 요즘 자주 져서 좀 짜증 나던 참이었는데.”

    팀원들의 시선이 캡틴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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