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76화 (177/202)
  • 176. 명분

    파나르 대통령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다들 영문도 모른 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멀뚱히 서 있던 조근배 요리사 팀원들도 갑자기 조금 불편한 상황이 되어 버렸고.

    “오늘 만찬을 준비한 요리사들은 여기 계신 분들이 전부인가요?”

    “네? 청와대 요리사 팀은 여기 있는 저희가 전부입니다.”

    공식적으로 보고된 청와대 요리사들의 명단에는 내가 없었다. 그렇기에 대통령의 부름에도 나는 빠지고, 배탈이 났던 요리사가 함께했다.

    “장덕수 셰프는 이번 만찬에 같이하지 않았나요?”

    “장덕수 셰프요?”

    파나르 대통령의 입에서 직접 내 이름이 거론되자 다들 놀란 눈치였다. 파나르 대통령은 김채훈 대통령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어 갔다.

    “김채훈 대통령님, 파나르 대사관 요리사가 우리 파나르를 아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네? 요리사가요?”

    김채훈 대통령도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당황했지만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장덕수 셰프는 요리 실력뿐만 아니라 파나르 문화를 아주 꿰뚫고 있는 정도라 제가 깜짝 놀랐었습니다.”

    “하하 이젠 명예 파나르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죠. 적응력이나 그 명성으로 봐서는요.”

    “그렇습니까?”

    바누스 장관 또한 옆에서 신이 나서 대통령의 말을 거들었다.

    대통령과 바누스 장관은 얼마 전 대통령실에서 우릴 만났던 일과 티브이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내용, 그리고 카차이 지역 축제 때의 일까지 자랑하듯 김채훈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오늘 그래서 이 설야멱에서 익숙한 삭사울 향이 나고, 웨이터들의 표정이 아주 진지해 보여서 분명 장덕수 셰프가 만찬을 지휘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군요.”

    파나르 대통령의 표정에서 만족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약간의 아쉬움이 묻어났다.

    “저… 사실은 장덕수 셰프도 이번 만찬에 참여했습니다.”

    “정말요? 역시 그렇죠? 제가 청와대 셰프의 실력을 폄하하는 게 아니라 이런 사소한 것들은 파나르 사람이거나 파나르에 오래 산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는 것들이거든요.”

    알게 모르게 이번 만찬 음식에는 내 영향력이 조금씩 담겨 있었다.

    육류를 좋아하는 파나르인들을 위해 설야멱의 크기를 좀 더 크게 재단한다거나, 비빔밥의 고명에도 고기를 좀 더 추가하는 등등.

    그리고 식사 마지막에는 반드시 따뜻한 차를 내 줘야 한다는 내 고집으로 시원한 수정과와 녹차를 함께 내는 걸로 만찬을 마무리했다.

    “그럼 빨리 가서 장덕수 셰프도 불러오세요.”

    파나르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나를 찾는 바람에 얼굴도 못 보고 끝날 뻔했던 이번 만찬에서 두 대통령의 코앞에 설 수 있었다.

    “얼마 전에 보고 또 뵙네요 장덕수 셰프.”

    “네 대통령님. 저번엔 제가 잘 대접받았습니다. 오늘 대통령님께서는 맛있게 드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장덕수 셰프의 음식을 맛볼 수 있어서 참 기뻤습니다. 우리 파나르를 진심으로 사랑해 줘서 고마워요.”

    파나르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직접 악수를 건넸다.

    주변의 경호원들과 수행원들의 대열이 흐트러졌지만 대통령의 손짓 한 번에 정리가 되었다.

    “그리고 김채훈 대통령님.”

    “네 대통령님.”

    “이렇게 훌륭하고, 능력 있는 분들을 우리 파나르 대사로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앞으로 한국에 파견될 대사나 총영사에 좀 더 신경 쓰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파나르 한국 대사관 관저에서의 만찬은 티끌같이 사소한 문제 하나 없이 잘 마무리가 되었다.

    계획한 대로 척척 진행된 건 아니었지만 오히려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훈훈한 분위기로 끝이 났다.

    나 역시 공식적으로 이번 회담과 만찬에 요리사로서 이름을 올리진 못했지만 떡하니 사진 속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작지만 역사의 한 장면을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김용수 대사님. 잠시 얘기 좀 나눌까요?”

    “네 대통령님.”

    파나르 대통령 측의 인원들이 전부 물러나고 난 후 김채훈 대통령과 김용수 대사는 한자리에서 마주 앉았다.

    “파나르에서의 정상 회담은 처음이라 힘들었을 텐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보단 외교부 본부나 청와대에서 더 고생하셨죠.”

    대통령이 움직이는 것 자체가 직원들에겐 힘든 일이고, 신경 쓸 게 많은 일이지만 이번 출장은 유독 어려웠던 게 사실이었다.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았고, 얻어 내야 할 것도 많았기 때문에.

    김채훈 대통령 역시 출장의 마지막 일정이었던 관저 만찬이 끝이 나자 한숨 돌린 표정이었다.

    “이번에 파나르 대사관 직원들이 일을 하는 것 보니 왜 파나르 대사관에서 최우수 공관을 놓치지 않는지 알 것 같더군요.”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니 좋은 결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하 겸손은 여전하시네요. 직원들도 훌륭하지만 대사님 역시 비범하신 분인 건 확실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다 해도 이제 이빨 빠진 늙은이일 뿐입니다.”

    김용수 대사의 실적이 다른 공관들에 비해 압도적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김용수 대사가 커리어 말년에 마지막 불꽃을 뜨겁게 내뿜고 있는 덕분이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혹시 공관장으로 좀 더 일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저 말씀이십니까? 하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두 번은 힘들 것 같습니다. 이제 이 나이에 해외 생활을 하는 것도 쉽지 않구요.”

    “그렇습니까….”

    “장 셰프가 나이에 맞지 않게 저랑 말동무도 잘해 주고, 같이 식사도 하면서 절 챙겨 주니 하는 거지 더 이상은 힘들 것 같습니다. 원래 계획대로 3년만 채우도록 하겠습니다.”

    김채훈 대통령의 제안에 김용수 대사는 정중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 이 정도까지 해 준 것만 사실 기적이었다.

    일을 떠나서 김용수 대사는 이젠 해외에서 근무한다는 게 체력적인 부담으로 다가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 장덕수 셰프도 함께 연장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대통령님께도 한번 말한 적 있다고 하던데, 장 셰프의 최종 목표는 대사관 요리사로 끝나는 게 아닌 건 알고 계십니까?”

    김채훈 대통령은 파나르와의 관계를 좀 더 견고하게 하고 싶어 했다. 김용수 대사와 마찬가지로 임기가 일 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에 의미 있는 업적에도 좀 더 욕심을 낼 수밖에 없었다. 파나르는 그런 의미로 최적이었다.

    내 계약 연장까지 들먹이며 김용수 대사를 설득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장덕수 셰프는 청와대 요리사가 되는 게 목표인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이곳에서 같이 일해 본 바로 저와 계속 일하기엔 아까운 인재입니다. 좀 더 큰물에 가서 헤엄쳐야 할 사람입니다.”

    김채훈 대통령 역시 그 말에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만찬만 봐도 장덕수 셰프의 이름이 우리 조근배 셰프 이름보다 많이 불린 걸 보니 분명 범상치 않은 사람인 건 분명한 것 같네요.”

    “네 대통령님께서 장덕수 셰프의 꿈을 이룰 수 있게 작은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려면 적어도 이 파나르에 계속 머무르게 할 순 없습니다.”

    김채훈 대통령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멀찍이서 대기하고 있던 조근배 요리사를 불러냈다.

    “셰프님.”

    “네 대통령님.”

    “장덕수 셰프의 실력이 어떻습니까?”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오늘 같이 일해 보니 어떻던가요?”

    김채훈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근배 요리사 역시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대통령님도 아시다시피 장덕수 씨는 재외 공관 요리사 대회에서 1등도 하고, 파나르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으니 실력은 의심할 필요 없는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실력은 충분하고… 그럼 조근배 요리사님 밑으로 장덕수 셰프가 들어가 같이 일하는 건 어떻습니까?”

    주방에서 몰래 두 사람의 말을 훔쳐 듣고 있던 나는 김채훈 대통령의 말에 깜짝 놀랐다.

    이건 대놓고 나를 청와대 요리사 중 한 명으로 끼워 넣으라는 말 아닌가.

    대통령이 코앞에서 이런 지시를 하는데 그 누가 쉽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조근배 요리사가 어떤 대답을 내어놓을지 기대가 되었다.

    “죄송합니다만 그건 안 됩니다 대통령님.”

    “안 된다고요?”

    “네 장덕수 씨가 이번 만찬으로 인해 청와대에 들어오는 건 반대입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답변에 모두가 벙쪄 버렸다.

    내가 이번 만찬에 너무 나댔던 걸까.

    회귀를 해서 시간도 많은데 좀 더 천천히 다가갔어야 하는 걸까.

    조근배 요리사가 계획했던 요리에 너무 많은 의견을 보탠 건 아닐까.

    조근배 요리사에게 밉보였단 생각에 수십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왜죠?”

    김채훈 대통령 역시 이 상황은 예상치 못했다는 듯 조근배 요리사에게 되물었다.

    “장덕수 씨는 요리사로서 분명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인 건 분명합니다. 20대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고, 주방을 지휘할 수 있는 리더십까지 갖췄습니다. 이번 만찬 땐 저도 모르게 장덕수 씨의 지시를 따랐을 정도로 리더십은 훌륭했습니다.”

    조근배 요리사의 대답은 전부 나를 인정하고 있는 내용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청와대 요리사가 될 수 없는지 이유를 알려 주었다.

    “그렇지만 장덕수 씨는 그 명분이 부족합니다.”

    “명분이라뇨?”

    “실력은 뛰어나지만 아직 요리사로 일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타고난 리더십을 갖추고 있지만 실제로 주방을 지휘해 본 경험은 없습니다.”

    “…….”

    “물론 실력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는 건 맞지만 청와대 요리사는 단순히 훌륭한 음식만 제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끔은 이해하기 힘든 요구를 들어주기도 해야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요리를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조근배 요리사는 마치 자신이 겪었던 울분을 해소하기라도 하는 듯 청와대 요리사의 단점에 대해서 쏟아 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업무량이 밀려올 때도 있고, 밤이고 낮이고, 주말도 없이 항상 대기를 하고 있어야 할 때도 많구요. 그래서 아직은 어린 장덕수 씨가 이 많은 걸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음….”

    “그리고 결정적으로 청와대 요리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항상 눈에 불을 켜고, 자리가 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밤낮으로 실력을 갈고닦으면서요.”

    조근배 요리사가 말하는 수많은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마지막 말이었다.

    “지금 장덕수 씨를 청와대 요리사로 채용을 하는 건 가장 공정해야 할 청와대에서 가장 불공정한 채용에 앞장서는 게 되지 않을까 우려가 됩니다.”

    조근배 요리사의 말에 김채훈 대통령은 물론이고, 모두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청와대 요리사는 많은 요리사들이 마지막 커리어로 꿈을 꾸는 곳이기도 했다.

    그들의 경력이 그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존중받을 필요는 없지만 반대로 그들의 시간을 이유 없이 무시할 수도 없는 법이었다.

    물론 나도 오랜 시간을 거친 요리사지만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셰프님의 말도 일리가 있네요.”

    김용수 대사도 조근배 요리사의 말에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고집을 부리는 건 비리 채용을 조장하는 꼴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김용수 대사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럼 장 셰프에게 명분을 만들 기회를 주는 건 어떻습니까?”

    “명분이요?”

    “그러면 저도 파나르 대사를 좀 더 연장하는 걸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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