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계획대로
사실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다.
당장 내일이 만찬인 상황에서 준비했던 계획을 바꾸는 것.
게다가 국가 원수끼리의 만남에서는 더더욱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조금 아쉬워도 계획대로 진행해 리스크를 없애는 것이 좀 더 중요했다.
“셰프님 갑자기 숯을 바꿔도 괜찮으시겠어요?”
“덕수 씨도 먹어 봐서 알잖아요. 이 정도면 오히려 우리가 가져온 참숯보다 좋은데요? 파나르 대통령님도 분명 이 삭사울이란 향을 알아챌 수 있을 거구요.”
“그야 그렇지만….”
조근배 요리사는 흔쾌히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맛도 맛이지만 설야멱에 담을 수 있는 의미에 좀 더 중점을 둔 선택이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 정도의 변화는 내 선에서 충분히 가능해요. 우리가 몰랐던 부분들을 알려 줘서 오히려 고마워요.”
그럼 진작에 팀원으로 끼워 주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도로 밀어 넣었다.
이것으로 모든 리허설은 끝이 났다.
갑작스러운 변화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만찬의 완성도는 높은 편이었다.
내 아이디어까지 첨가된 음식이라 그런지 심장이 더욱 요동치고 있었다.
* * *
다음 날 파나르 한국 대사관 관저.
이른 아침부터 관저의 주변은 통제되기 시작했다. 내가 일하던 관저는 큰 길가에 위치해 있지 않아 경호원들이나 많은 차들이 들락거리기가 쉬운 곳은 아니었다.
덕분에 조용하던 동네는 순식간에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자 그럼 오늘은 네가 주방에서 설거지랑 뒤처리 담당하는 거다?”
“예… 알겠습니다.”
어제 배달이 난 보조 요리사가 돌아왔지만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래서 보조 요리사는 자처해서 싱크대 앞에 섰다. 덕분에 나는 공식적이진 않지만 청와대 요리사 팀에 합류하여 만찬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보겠습니다. 오늘도 파이팅합니다!”
“파이팅!”
“파이팅!”
조근배 요리사는 파이팅 넘치는 목소리로 팀원들의 기세를 북돋워 주었다.
나 역시 그의 말을 따라 외치며 팔뚝에 닭살이 돋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통령님 입장하십니다.”
김용수 대사와 수행원들의 안내를 받아 대통령 두 분이 관저로 입장했다.
매일 일을 하던 곳에 한 나라의 국가 원수, 그것도 두 명이나 동시에 입장을 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바로 자리에 앉으시죠.”
“네 그러시죠.”
며칠간의 동행으로 인해 많이 가까워진 두 사람은 잡설 없이 바로 식탁으로 향했다.
스탠바이하고 있던 웨이터들 역시 주방에다 이 사실을 알렸다.
“첫 번째 음식 나갑니다. 5가지 부각과 웰컴주 한 잔씩 서빙해 주세요.”
여러 가지 재료에 찹쌀풀을 발라 말린 뒤 튀겨 내는 음식인 부각을 첫 번째 음식으로 결정했다.
김부각 위에는 씻은 김치와 토마토, 양파 등으로 만든 한국식 살사소스를 살짝 곁들였고, 더덕 부각, 단호박 부각, 연근 부각 등 파나르에선 보기 어려운 식재료들을 이용해 부각을 준비했다.
조금 생소한 식재료가 낯설 수 있지만 말리고, 튀기는 과정을 거치면 고소하고 누구나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된다.
“자자, 웨이터들 잠시 모여 주세요.”
본격적으로 음식이 서빙되기 전에 조근배 요리사는 웨이터들을 불러 모아 간단한 음식 설명을 했다.
“여기서 연근부터 마지막 김부각 순으로 먹을 수 있게 꼭 설명해 드리고, 나가기 전에 얼굴 긴장 좀 푸는 연습 합시다. 자 빠르게 다섯 번씩 미소 짓고 나갈게요.”
맛이 약한 연근 부각부터 다소 강한 맛의 소스가 올려진 김부각 순으로 먹을 수 있도록 메뉴 교육을 시킨 뒤 표정 관리까지 신경 쓰는 조근배 요리사였다.
“자 주방에서부터 스마일~ 한 상태로 출발하세요.”
“저기 잠깐만요.”
양팔에 접시 하나씩을 올려 둔 웨이터들은 양쪽 입꼬리까지 올린 채 주방을 나서기 직전이었다. 그런 그들을 빠르게 돌려세웠다.
“얼굴은 웃지 않으셔도 됩니다. 입꼬리 내리세요. 무표정한 상태로 나가세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덕수 씨. 서비스의 기본은 친절한 표정인데.”
“적어도 파나르에서는 아닙니다. 설명할 시간이 길지 않은데, 저만 믿으세요. 표정은 정색하시고 일단 나가세요.”
나는 막무가내로 웨이터들을 주방으로 내보냈다.
조근배 요리사는 그런 나의 태도에 강한 불쾌함을 느낀 것 같았다.
“장덕수 씨.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오늘 그쪽은 어쩔 수 없이 섭외된 대타일 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선을 넘는 건 더 이상 허용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이거 한번 봐 주세요.”
나는 이곳에서 일하는 2년 동안 파나르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한식이 먹히는지는 아직 100% 파악하지 못했다.
아무리 만찬을 여러 번 진행했어도 사람들의 식성에 따라 선호도가 달라졌으니까.
하지만 어떤 태도를 보여 줘야 하는지 100% 알고 있었다. 조근배 요리사에게 내가 출연했던 방송의 한 장면을 보여 줬다.
“이분들이 절 선택한 이유가 웃지 않아서였대요. 웃지 않는 진지한 표정 때문에 제 음식에 신뢰를 가지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판단해서 어리지만 절 선택한 겁니다. 국경일 행사 때도 이런 문화를 잘 써먹었구요.”
“크흐흐흠.”
증거 자료를 보여 줘도 조근배 요리사는 탐탁지 않아 보였다. 사전에 조율되지 상황이 발생되는 걸 매우 불편해하는 듯했다.
“이런 게 있었으면 어제, 아니 몇 시간 전이라도 미리 말해 줬어야죠. 당장 음식이 나가기 직전에 말을 하는 사람이 어딨습니다.”
“죄송합니다. 셰프님이 웨이터들 표정까지 관리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호텔에서는 주방장은 주방에서 음식과 관련된 일만 관리하면 된다. 나머지 서비스나 웨이터들의 표정 관리는 담당 지배인의 몫.
하지만 규모가 크지 않은 청와대에서는 조근배 요리사가 모든 걸 관여하고 있었다.
“앞으로는 조심합시다. 어제 삭사울처럼 하루 전에 계획을 바꾸는 경우도 굉장히 이례적인 일인데,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조심하겠습니다.”
비록 혼이 났지만 오히려 내 마음은 편했다.
파나르 대통령과 손님들은 웃는 웨이터들을 보면 분명 문화 차이라는 것을 이해하겠지만, 괜히 기분이 오묘해지는 감정까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진지한 표정으로 음식을 서빙하는 웨이터들을 보며 전혀 이질감 없는 만찬을 즐길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이번엔 메인 요리다. 고기는 준비 다 됐지?”
“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구워 나가면 됩니다.”
삭사울에 구웠다 찬물에 식히기를 여러 번.
메인 요리로 준비한 설야멱은 이미 부드러운 식감의 음식으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삭사울의 향이 주방을 지나 식탁에까지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한우 설야멱과 비빔밥입니다.”
“역시 비빔밥이 빠질 수 없죠.”
바누스 장관은 반가운 표정으로 비빔밥을 반겼다.
바누스 장관은 이미 여러 번 먹어 본 음식이었지만 대통령에겐 낯선 음식이었다.
그 맛도 그 의미도.
“비빔밥은 여러 가지 재료들을 한데 섞어 비벼 먹는 음식인데, 한국과 파나르가 앞으로 잘 화합하고 교류하자는 의미로 준비한 음식입니다.”
“오호 그런 의미가 있었군요.”
김채훈 대통령은 이미 익숙하다는 듯 비빔밥에 대한 설명을 술술 이어 갔다.
그리고 이번에 준비한 설야멱에 대해서는 잠시 머릿속을 정리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음식은 설야멱이라고 하는데, 혹시 과거 한국에도 이슬람 교인들이 많았단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한국에도요?”
파나르 대통령은 처음 듣는 얘기에 꽤나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바누스 장관은 달랐다.
“고려 시대에 아랍의 상인들과 제법 많은 교류가 있었던 걸로 압니다. 그렇죠?”
“장관님은 그런 것까지 알고 계십니까?”
“하하 제가 괜히 이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게 아니죠.”
조선 시대는 물론이고, 고려 시대의 한국까지 꿰고 있는 바누스 장관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이 설야멱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김채훈 대통령이 조근배 요리사에게 들은 내용을 전달하자 파나르 대통령과 바누스 장관의 표정이 아주 밝아졌다.
“그래요? 우리가 몰랐던 교류가 이미 1천 년부터 이뤄지고 있었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그렇습니다. 오래전부터 서로의 음식 문화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활발하게 교류한 조상님들에게 질 순 없죠. 앞으로 파나르와 한국이 그때보다 더욱 협력하는 관계가 되었으면 합니다.”
“바라던 바입니다.”
만찬의 분위기는 절정에 다다랐다. 코스 역시 메인 요리 차례였고, 계획했던 일들이 일사천리로 협의되고 있었다.
파나르 대통령은 호탕하게 웃으며 설야멱을 한 점 입에 넣었다.
“어?”
“왜 그러십니까 대통령님.”
“입맛에 안 맞으십니까?”
설야멱을 한입 먹은 파나르 대통령이 잠깐 멈칫하자 주변 사람들 모두가 긴장을 했다.
혹시나 돌이라도 씹었을까, 대통령 만찬에는 너무 형편없는 수준의 음식이 나온 걸까.
김용수 대사는 짧은 시간 동안 온갖 생각이 들었다.
“이거 맛이 정말 익숙한데, 혹시 삭사울 향 아닌가요?”
“삭사울이요? 설마요.”
바누스 장관은 삭사울이라는 말에 곧바로 설야멱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 정말 삭사울 향이네요.”
“그렇죠 장관님? 내 입이 틀린 게 아니었죠?”
“맞습니다. 분명 삭사울입니다.”
두 사람은 굉장히 반가운 표정으로 식사를 이어 갔다.
설야멱이라는 음식 자체만으로도 두 나라의 교류와 관련해서 의미가 깊은 음식이었는데, 익숙한 삭사울 향까지 느껴지자 파나르 측 손님들은 꽤나 감동한 표정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숯에 구운 고기를 즐겨 먹습니다. 그런데 파나르 사람들도 아주 다양한 고기를 숯에 구워 드신다면서요?”
“네 맞습니다. 샤슬릭은 파나르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는 음식 중 하나입니다.”
“우리 요리사가 일부러 한국에서부터 최고급 숯을 준비해 왔는데, 파나르에 와 보니 더 좋은 품질의 숯이 있더랍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그 숯에 한번 요리를 해 보니 너무 맛있어서 한국 숯을 사용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김채훈 대통령의 약간 과장 섞인 말은 파나르 대통령을 굉장히 만족하게 만들었다.
이 삭사울이라는 숯을 만드는 나무는 한국에선 구하기 힘든 나무였다. 그래서 한우와 파나르의 숯이 만난 이 설야멱은 더욱 의미가 깊은 음식이 되었다.
“마지막 디저트까지 파나르 꿀을 이용한 음식이 나와 아주 놀랐습니다.”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맛있게 먹은 것은 물론이고, 음식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가 깊어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이렇게까지 신경 쓴 만찬을 대접받아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네요.”
수십 년간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었음에도 오늘의 만찬은 파나르 대통령의 기억에 남은 만찬 중 하나였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메뉴나 식재료에 담겨진 의미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았던 만찬이었다.
“음식을 서빙해 주시는 분들의 서비스도 아주 훌륭했고, 칭찬을 하려니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네요.”
“하하 정말 다행입니다. 한국과 파나르 대통령이 만나는 건 처음이라 아무런 자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준비하는 게 조금 힘들었던 건 사실이었습니다.”
김채훈 대통령은 만찬의 분위기가 좋아진 탓에 좀 더 솔직한 대화를 이어 갔다.
“그렇지만 이렇게 대통령님이 만족하시고, 준비해 온 많은 안건들을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희야말로 이렇게까지 준비해 주셔서 감사하죠. 게다가 이 음식들을 파나르에서 준비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너무 잘 먹었습니다.”
“그건 저희 요리사들이 고생한 일이죠. 대통령님께서 직접 감사의 인사를 전해 주시겠습니까?”
“그럴까요? 바라던 바입니다.”
파나르 대통령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청와대 요리사 팀을 불러냈다. 감사의 말을 직접 전하기 위해.
“안녕하십니까 대통령님. 오늘 만찬의 총괄 책임자 조근배 요리사입니다.”
“반갑습니다 셰프님. 오늘 음식 너무 잘 먹었습니다.”
파나르 대통령은 조근배 요리사의 인사를 받은 뒤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뭔가를 찾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