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화합과 교류
“잠깐만 여기로 와 볼래요?”
“네!”
조근배 요리사의 부름에 들고 있던 고무장갑을 집어 던지다시피 한 뒤 달려갔다.
“이 주방의 원래 주인의 권한을 뺏고 싶지 않아서 쉬라고 한 건데 상황이 좀 어렵게 됐어요.”
“……!”
“우리 요리사 중 한 명이 물갈이를 하는지 배탈이 심하게 났어요. 해외 출장에서 종종 있는 일이지만 스스로 조심하는 것 말곤 특별히 조심할 방법이 없어요.”
맞는 말이다. 물이나 음식을 아예 안 먹을 수도 없는 거고, 생수를 사 먹거나 음식을 아무리 조심해도 탈이 날 수도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헤드 셰프인 조근배 요리사의 상태가 멀쩡하다는 것. 그의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기만 한다면 누가 음식을 해도 충분히 만찬을 치러 낼 수 있었다.
“상태를 보니 오늘 안에 호전될 기미가 안 보이네요. 덕수 씨가 우리 좀 도와줄래요?”
“다… 당연히 됩니다.”
“이곳이 원래 덕수 씨의 주방이지만 오늘은 내 지시를 따라 줬으면 해요. 양해 좀 부탁해요.”
두말하면 잔소리.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만들고 꾸며 놓은 주방이지만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 더군다나 조근배 요리사 정도라면 더더욱.
“내가 내 주방에 대한 애착이 심해서 그런지 다른 사람의 주방에도 최대한 끼어들지 않으려 노력해요. 근데 이 주방, 동선도 아주 훌륭하고 정리도 잘되어 있어요 내 맘에도 쏙 드네요.”
“감사합니다.”
“다음에 나한테도 주방 동선 구성하는 요령 좀 알려 줘요.”
“네? 네 알겠습니다.”
조근배 요리사로선 최고의 칭찬 중 하나였다.
자부심과 자존심이 강한 요리사로서 나 같이 어린 요리사에게 뭔갈 알려 달라는 말은 거의 하지 않을 테니까.
역시 내 실력이 부정당한 건 아니었구나.
자꾸 나를 배제하려고 해 조금 미워 보이기까지 했던 조근배 요리사가 달리 보였다. 이젠 수백 년의 풍파를 견뎌 내고, 웬만한 태풍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고목처럼 든든한 그의 철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덕수 씨가 구해다 준 문어 상태가 아주 좋더군요. 그런 걸 갑자기 어디서 구했습니까? 우리 요리사는 시장을 아무리 뒤져도 찾기 어려웠는데.”
심지어 파나르 정부에도 통문어를 구해 달라 도움을 청해 봤지만 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근무를 하며 알게 된 분이 있습니다. 워낙 미식가고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이런 식재료도 많이 보유하게 계세요.”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상태 좋은 말린 통문어를 상시 비치하고 있다구요?”
“아 상시는 아니고, 마침 시기가… 딱.”
자신의 생일 파티를 위해 이렇게 혼신의 힘을 다한다는 걸 말해 줘 봤자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분도 큰 행사를 앞두고 있어서 이런저런 산해진미를 많이 구하고 있는 중이었답니다.”
“허허 대단한 사람이네요. 혹시나 다음에도 파나르 출장을 오게 되면 그분을 활용해서 식재료를 현지 조달해야겠네요. 상태도 더 좋고 값도 저렴할 테니.”
“네 다음에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렉스의 생일파티 한 번 더 치르면 됩니다.’
조근배 요리사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나에게 미소를 보여 줬다. 그 얼굴은 대회 때 내가 기억하던 인자한 얼굴이었다.
“세세한 건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고, 전체적인 메뉴 구성은 이렇게 해 놨습니다. 한번 살펴봐요. 순서라든지 가니쉬라든지.”
“네 알겠습니다.”
‘대통령님을 위한 만찬’이라 적힌 메뉴판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만찬 때 사용하던 메뉴판과 재질이나 디자인이 동일했지만 거기에 적혀 있는 글자의 무게는 묵직했다.
5가지의 부각
송이버섯죽
모둠 감자전
민어구이
한우 설야멱과 비빔밥
파나르 꿀을 곁들인 개성주악
메뉴명에서부터 고급스러움이 느껴졌다.
특히 디저트로 준비한 개성주악은 조근배 요리사가 사전에 문의했던 내용이었다. 한국에서 만찬을 할 때 지역의 특색이 담긴 꿀을 사용하는데 혹시 파나르에서도 꿀을 많이 먹냐고 물어봤었다.
파나르엔 한국보다 훨씬 많은 종류의 꿀이 유통되고 있었고, 그 품질 또한 우수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주도의 감귤 꿀을 챙겨 온 청와대 요리사 팀이었다.
“뭐 메뉴에 대해 모른다거나 궁금한 건 없으시죠?”
“음식에 대해 모르는 건 없지만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뭔가요?”
조근배 요리사의 두 손은 바삐 움직이면서도 내 질문에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굳이 고기 메뉴로 설야멱을 택한 이유는 뭔가요? 설야멱은 본래 눈 오는 날 찾는 고기 요리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그 시기도 맞지 않구요.”
설야멱이란 음식은 소고기 등심에 참기름만 발라 꼬치에 끼운 뒤 숯불에 굽고, 찬물에 담그거나 눈에 식혀 다시 굽는 걸 반복해 고기의 식감을 부드럽게 만들어 먹는 요리이다.
최근엔 꼬치가 빠지고, 눈에 식히는 과정도 생략되어 흔히 아는 너비아니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요리였다.
“파나르에 이슬람 교도가 많죠?”
“네 맞습니다. 거의 국교나 다름없습니다.”
“혹시 과거 한국에도 이슬람 교도들이 많았던 걸 알고 있나요?”
“한국에도요?”
“네 고려 시대 중기부터 시작해 말기에는 중앙아시아나 아랍 쪽에 넘어온 제법 많은 이슬람 교도들이 개성에 잠시 머무르거나 아예 눌러살곤 했어요.”
이건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알다시피 고려는 불교 문화라 육식을 금기시했어요. 당연히 육류 요리가 발전하지 못했죠. 근데 개성 인근에 사는 몽골인들과 이슬람 교도인들의 교류가 잦아지며 고기 문화도 발전하게 되었대요.”
“그게 고려 음식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 거구요?”
“맞습니다. 설야멱은 그런 음식들 중 하나예요.”
오랜 전통을 가진 한국 음식과 이슬람교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한국과 파나르가 아주 오래전부터 교류해 왔다는 스토리가 이번 만찬에 딱 맞죠?”
“그렇네요. 사실 파나르에도 비슷한 음식이 있긴 합니다.”
“그래요? 그게 뭔가요?”
나처럼 조근배 요리사도 새로운 음식 얘기에 관심을 가졌다. 우린 손을 바삐 움직이면서도 끊임없이 정보를 교환했다.
“샤슬릭이라고 하는데 각종 육류를 쇠꼬챙이에 꽂아서 숯불에 구워 먹는 음식입니다.”
“오호. 어쩌면 설야멱은 그 음식에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모르겠네요.”
“진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한번 먹어봐야겠군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산더미 같던 작업들이 어느새 반으로 줄어 있었다.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았지만 진행 속도가 꽤 빨랐다.
“덕수 씨는 우리랑 처음 손을 맞춰 보는데도 아주 잘하네요. 역시 요리 대회 우승자라 그런가?”
“하하 셰프님이 할 일을 잘 분배해 주셔서 그렇죠.”
“여튼 덕수 씨 아니었으면 오늘 많이 바쁠 뻔했어요. 오늘 계획한 일을 대부분 차질 없이 끝낼 수 있겠네요.”
“다행입니다!”
밑 작업이 마무리가 되어 갈수록 조근배 요리사의 표정 또한 온화해져 갔다. 역시 부담은 사람을 예민하게 만든다.
이제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끝이 났고, 일종의 리허설 몇 가지만 해 보면 된다.
“소고기 몇 덩이랑 참숯 챙겨서 마당으로 나가자.”
“네 셰프님.”
모든 메뉴가 중요했지만 메인인 설야멱에 좀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파나르 사람들이 고기를 많이 먹는다는 사실 정도는 미리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한국에서 가져올 땐 최상급이었는데 파나르에 오면서 변질되진 않았는지 한번 테스트를 해 봐야 해요.”
“맞습니다. 파나르는 한국보다 고도도 높은 나라라서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것까진 몰랐네요.”
맛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미비하겠지만 조근배 요리사는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쓸 것 같아 고도 얘기까지 꺼냈다. 예상대로 제법 흥미를 가지는 듯했고.
“자 고기 올려 봐 봐.”
치이이익.
빨갛게 달아오른 참숯 위로 석쇠 또한 비슷한 색깔로 달아올랐다. 마블링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한우 꽃등심이 달궈진 석쇠 위로 올라갔다.
지방과 단백질이 고온의 참숯과 가까워지자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맛있는 소리를 냈다.
치익.
치익.
육즙이 참숯 위로 떨어질 때마다 향긋한 숯 향이 코로 스며들었다.
“숯 상태는 아직 괜찮은 것 같네요.”
조근배 요리사도 이번엔 큰 불만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품질의 고기를 이런 숯에 구우면 그 누군들 안 좋아할 수 있을까.
테스트로 구운 작은 고기 한 점에도 군침이 흘렀다.
“근데 셰프님.”
“네 덕수 씨.”
“국가 원수끼리 만나는 대부분의 만찬에서 주제는 화합이나 교류 뭐 이런 거 아닌가요?”
“음… 뭐 딱 그렇게 정의할 순 없지만 그런 것 같네요. 코스의 개연성을 조금 포기하더라도 손님들과 관련된 음식을 집어넣기도 하거든요.”
“청와대에서 주최하는 만찬에 비빔밥이 거의 빠지지 않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구요?”
“하하 맞아요. 나도 그놈의 비빔밥 좀 빼고 싶은데 다들 어찌나 고집을 부리는지… 나도 어쩔 수가 없어요. 딱히 외국인들이 싫어하는 음식도 아니고, 먹으면서 확실히 의미가 보이기도 하니까요.”
잘 섞이고, 녹아든다. 우리는 하나가 된다. 여러 개의 재료들이 만나 하나의 훌륭한 음식이 된다.
그런 의미로 한 가지 제안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한국에서 가져오신 참숯도 훌륭하지만 혹시 파나르에서 주로 쓰는 숯을 이용해 설야멱을 굽는다면 만찬의 의미가 좀 더 부각되지 않을까요?”
“파나르에도 좋은 숯이 있나요?”
“네 있습니다. 참숯 못지않게 좋은 숯입니다.”
“그래요? 그 숯의 향이 설야멱과 어울리기만 한다면 오히려 좋죠. 낯선 한국 음식에서 익숙한 파나르의 숯 향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바로 그겁니다!”
조근배 요리사는 내가 의도한 바를 단번에 알아들었다. 나는 창고에 고이 모셔 둔 최상급의 삭사울을 가지고 나와 불을 피웠다.
“음… 이건 향이 좀 더 강한 것 같네요.”
“맞습니다. 참숮보단 향이 좀 더 강하지만 육류 요리와 잘 어울립니다. 아까 말씀드린 샤슬릭도 전부 이 삭사울로 요리를 합니다.”
“흥미롭네요. 어울리기만 한다면 이 삭사울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죠. ‘한국 음식을 파나르 숯으로 요리한다. 게다가 이 음식의 기원이 중앙아시아의 파나르에서 전해진 요리일 수도 있다. 한국과 파나르는 수백 년 전부터 이미 교류해 왔던 나라이다.’ 이보다 더 좋은 의미를 가진 만찬 메뉴가 있을까요?”
조근배 요리사의 말대로 잘 설명만 할 수 있다면 다른 나라들이 오랫동안 교류해 온 시간을 단번에 따라잡을 수 있는 스토리였다.
“한번 드셔 보세요.”
참숯 못지않게 빨간 열기를 내뿜는 삭사울에 등심을 올려 구워 냈다. 조근배 요리사를 비롯한 보조 요리사들까지 전부 고기 한 점씩을 입에 넣었다.
“호오!”
“오오”
“이게 뭐야.”
삭사울에 구운 고기를 맛본 요리사들의 동공은 하나같이 커졌다. 조금 향이 세긴 했지만 그 향이 고기의 풍미를 더욱 늘려 준단 사실엔 반박할 수 없었다.
아예 생으로 먹을 고기가 아니라면 이 삭사울의 향이 분명 맛에 도움이 되었다.
“어떠세요 셰프님?”
고기를 한 점 더 입에 넣은 조근배 요리사는 아무런 대답 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