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73화 (174/202)
  • 173. 기회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말린 통문어는 아마 사용하는 데 큰 문제가 없는 제품일 것이다. 조근배 요리사의 눈에 100% 만족스럽지 못해 대체품을 찾는 거겠지.

    시장을 뒤지고 뒤져도 결국 찾지 못한다면 원래 가지고 있던 문어를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내가 만찬에 손가락 끝이라도 걸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작은 틈이라도 보이니 또다시 희망을 가지게 되는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요리사였다.

    -여보세요?

    -미스터 장.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바쁘지 않아요?

    -저요? 많이 바쁘지 않습니다.

    -한국의 대통령이 왔는데 미스터 장이 바쁘지 않다구요?

    알렉스는 재계 인사들뿐 아니라 정계 인사들과도 깊은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한국 대통령의 방문에 초대받아 주변이 허전하다고 했다.

    -알렉스는 왜 안 왔어요? 충분히 초대받았을 텐데.

    -하하 당연히 초대받았죠. 근데 저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더 중요한 일이요?

    -알잖아요. 미스터 장이랑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대통령 포함 온갖 유명 인사가 전부 모이는 자리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니. 알렉스는 단순히 돈이 많아서 저런 여유를 가진 게 아니었다.

    태생부터 남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만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인생의 만족도는 아주 높은 편이었고.

    -미스터 장. 내 생일 파티 준비는 잘되어 가죠?

    -저… 저요?

    -잊은 건 아니죠? 저번에 장어 구해 줬을 때 분명 파티에 참석한다고 했어요. 기억하죠?

    -아… 그건 손님으로 참석한다는 말이었는데.

    당황스러운 내 대답에 알렉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손님으로 온다는 건 미스터 장이 내 부탁을 들어줬을 때나 가능한 얘기 아닙니까?

    -그… 그런가요?

    -그러지 말고 내 생일 파티에 와서 실력 발휘 좀 해 줘요. 대신 다른 요리사들이랑 다르게 특별 대우해 줄게요.

    손님이든 요리사로든 알렉스의 생일 파티엔 빼도 박도 못하고 참석하게 되었다.

    어차피 내가 그런 호화스러운 파티에 참석할 유명 인사도 아니고, 내 할 일이나 하면 될 일.

    생일에 요리사로 참석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고 한 번 더 철판을 깔았다.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하… 미스터 장. 이러기예요? 내가 또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거예요? 정말 비싼 요리사네요.

    -하하 죄송해요. 급한 일이라서요. 이건 파나르와도 관련된 일이에요.

    -뭔데요?

    알렉스는 파나르를 위한 일이라면 도둑질이라도 할 기세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파나르 대통령에게 대접할 만찬과 관련된 일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말린 통문어 좀 구할 수 있어요?

    -말린 통문어요?

    -네. 그것도 최상급으로요.

    -말린 통문어는 왜요?

    -이번 대통령 만찬에 쓰려구요.

    전화기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알렉스를 여러 번 만나 봐서 그런지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알 것 같았다.

    -있죠? 그렇죠? 그 커다란 냉장고와 주방에 가득 채워진 식재료 중에 말린 통문어 한 마리 없진 않겠죠?

    -흠….

    알렉스의 생일 파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말인즉 알렉스의 별장엔 온갖 진귀한 식재료가 가득 차 있다는 의미.

    말린 통문어처럼 건어물은 미리 구입해 저장해 놨을 가능성이 컸다.

    -딱 한 마리라도 괜찮으니깐 파시면 안 될까요?

    -이렇게 된 이상 저도 공짜로는 좀 힘든데.

    일단 원하는 물건이 있는 건 확인했고, 알렉스가 어떤 조건을 내걸지 궁금했다. 들어주기 어려운 조건을 내걸기 전에 내가 선수를 쳤다.

    -이번 생일 파티에 참석해서 3일 동안 음식을 만들게요. 그리고 아무런 보수도 안 받을게요. 어때요? 이 정도면 괜찮죠?

    -오호.

    알렉스는 내 제안에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이번 생일 파티에 참석해서 음식을 만든다는 건 이미 장어를 구해 줬을 때 끝난 일이었고, 3일 동안 일한 돈을 하나도 안 받겠다는 의미인가요?

    -네 맞아요. 한 푼도 안 받고, 제 밥도 안 주셔도 돼요.

    끼니까지 포기한다는 말에 알렉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미스터 장. 내가 그 돈 몇 푼 아쉬운 사람으로 보여요?

    -네? 아… 아니요.

    -나는 훌륭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돈은 전혀 아깝지 않아요. 어차피 내가 죽기 전까지 다 쓰지도 못할 돈인데요.

    와아. 여태까지 들었던 알렉스의 모습 중에 가장 멋있는 모습이었다. 내 평생 저런 말을 진심으로 내뱉어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두 번의 인생을 살아도 알렉스의 풍족함을 따라갈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럼 원하는 게 뭔데요?

    -나를 한국 대사관 관저에 초대해 주세요.

    -관저에요?

    -네 저번에 대사님도 꼭 한번 초대해 준다 하셨잖아요. 나를 초대해 주세요.

    -그거야 어렵지 않은데 굳이 왜요? 생일 파티에서도 충분히 맛있는 음식 많이 해 드릴게요.

    알렉스는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홈그라운드에서 제대로 실력 발휘한 미스터 장의 음식은 어떤지 궁금해서요.

    -홈그라운드요?

    -제가 여기저기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녀 보니깐 같은 요리사라고 해도 주방의 환경이 달라지면 완전히 다른 결과물이 나오기도 하더라구요. 물론 완전히라는 말은 조금 과도하지만 한입에 느껴질 정도로 다른 맛이 나오기도 하더라구요.

    운동 선수들이 자기만의 도구를 사용하고, 홈구장에서 성적이 더 좋은 것처럼 요리사들도 마찬가지다.

    더욱 익숙하고, 편안한 주방에서 더 맛있는 요리가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알렉스는 그것까지 알고 있었다.

    -미스터 장이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걸로 아는데 이대로 그냥 보내긴 아쉬워서요.

    -아직 1년이나 남았어요.

    -우리가 1년에 몇 번이나 보는 사이라고 그래요.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초대해 주세요.

    -그럴게요.

    -문어는 내가 별장 관리인에게 최고로 좋은 걸로 2마리 내어 달라고 할 테니 직접 가져가 주세요. 내가 자존심상 배달까지 해 주진 못하겠네요.

    -당연하죠. 제가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택시를 불러 알렉스의 별장으로 향했다. 두 번째로 봐도 역시나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규모였다.

    마당은 잘 관리되어 깔끔했고, 별장 외부도 페인트칠과 보수가 완료되어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렉스의 식재료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말린 통문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최상급이었다.

    모양도 상처 하나 없이 반듯했다.

    이걸 가지고 나는 다시 한번 협상을 걸어 볼 예정이었다.

    * * *

    파나르 한국 대사관 관저 주방.

    오롯이 나만의 주방이었던 이곳에서 낯선 이들이 요리를 하고 있었다. 이 주방의 주인이었던 난 발도 들이지 못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고.

    한 손에 쥔 말린 문어를 가지고 주방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셰프님.”

    “어? 어쩐 일이에요. 쉬어도 된다 했잖아요.”

    조근배 요리사의 눈엔 내가 초대받지 않는 손님이었다. 표정에는 미묘하게 불편함이 느껴졌다.

    나 또한 한창 예민해져 있을 조근배 요리사의 심기를 더 건드리지 않고, 말없이 준비해 온 문어를 건넸다.

    “이건 뭔가요?”

    “필요하다고 하셔서요.”

    문어를 받아 든 조근배 요리사는 이걸 열어 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다.

    “열어 보세요.”

    “음….”

    깨끗한 종이에 감싸진 물건을 풀자 한눈에 봐도 최상급인 말린 통문어가 그 자태를 드러냈다.

    “어? 통문어네?”

    “이거 어디서 구했어요?”

    “우리가 가지고 온 것보다 상태가 좋은데?”

    조근배 요리사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주변의 보조 요리사들은 통문어 상태를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특히 윤아와 함께 시장을 돌아다니던 요리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한국에서 가져오신 말린 통문어 상태가 조금 맘에 안 드신다고 들어서요. 혹시나 도움이 될까 봐 구해 왔습니다.”

    조근배 요리사의 시선은 시장을 돌아다니던 보조 요리사에게로 향했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구할 수 없었다는 보고를 받아서겠지.

    사실 파나르에선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말린 통문어는커녕 상태 좋은 생문어도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도 알렉스가 없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식재료였다.

    “좋은 걸 구해 오셨네요. 감사히 쓰겠습니다.”

    통문어를 받아 든 조근배 요리사의 대답은 짤막했다.

    그리곤 다시 바삐 움직이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저… 셰프님.”

    “네?”

    조근배 요리사가 다시 칼을 잡기 전에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저… 괜찮으시면 제가 옆에서 설거지라도 하면 안 될까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이었다.

    노골적으로 주방에 넣어 달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설거지라도 하다 보면 점점 업무의 범위를 늘려 갈 수 있을 테니까.

    그거라도 먼저 할 수 있길 바랐다.

    “오늘은 크게 바쁘지 않으니 내일 오세요.”

    “네?”

    “내일은 만찬 전날이라 손이 조금 모자랄 수 있으니 설거지라도 거들어 주면 고맙겠어요.”

    “아 네! 알겠습니다.”

    조근배 요리사는 이 말을 끝으로 하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오늘 당장 합류하지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처음처럼 냉정하게 외면하진 않았다. 설거지를 거들어 달라는 말이 진짜 설거지만을 해 달라는 의미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내일도 경호원들의 도시락을 만들 상섭에겐 조금 미안했지만 충분히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

    * * *

    다음 날.

    들뜬 마음으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매일 지나던 출근길이 오늘은 왜 이리도 색다르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꿈에 그리던 청와대 요리사에 아주 조금이지만 한 발자국 다가갔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대사관 요리사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이게 청와대 요리사로 이어질지 확신은 없었다.

    대통령의 면전에 대고, 패기 넘치게 청와대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도 했는데, 보기 좋게 거절당했었다.

    이 대사관 요리사가 분명 도움이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청와대 요리사로 이어지는 전 단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했던가. 오늘 드디어 청와대 요리사들과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비록 그게 설거지나 잡일이지만.

    속은 늙었지만 겉은 아직 20대 초짜 요리사인 걸 어쩌겠나. 청와대는 실력만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아직은 보수적인 곳이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아주 오래전 기억을 되짚어 막내답게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주방으로 들어섰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대부분 조리복까지 갈아입은 상태였다. 조근배 요리사 역시 이미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다.

    “다들 아침 식사는 하셨습니까?”

    나도 빠르게 환복을 한 뒤 한 번 더 말을 걸어 봤지만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화이트보드에 적힌 내용을 보니 해야 할 작업이 산더미인데 누구 하나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괜히 눈치가 보여 빈 싱크대 앞으로 가서 멀뚱히 서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상태가 어떻대?”

    “크게 달라진 건 없답니다.”

    “하….”

    전화를 끊으며 들어온 보조 요리사 한 명이 조근배 요리사에게 뭔가를 전달했다. 조근배 요리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오늘 안에는 힘들겠지?”

    “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겠다. 일단 우리끼리 시작하자. 한 명은 육수 준비하고, 너랑 나는 열무 다듬자.”

    “네 알겠습니다.”

    조근배 요리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요리사들에게 업무 지시를 내렸다. 나도 옆에서 고무장갑을 만지작거리며 빈 그릇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장덕수 씨.”

    “네?”

    갑자기 뒤에서 내 이름이 들렸다. 조근배 요리사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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