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72화 (173/202)

172. 필요 없다고

인생이란 두 번 살아도 쉽지 않다는 걸 느낀 하루였다. 처음이든 두 번째든 더 많은 걸 얻으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 했다.

잠시 우울해지기도 했지만 이런 일로 주눅 들어 있을 순 없지. 남들이 보기엔 배부른 사람으로 보일 수 있을 테니까.

한샘이처럼 지금 상황에 맡게 내 자리를 지킨다면 분명 좋은 기회가 올 거라 생각했다.

이번 대통령 만찬은 엄밀히 말해 내 자리가 아닌 게 맞다. 이 파나르에서의 임기가 끝이 난 후 정식으로 청와대로 들어가면 된다.

그다음부턴 제대로 실력 발휘해 줄 테니 좀만 기다려라.

발톱을 숨긴 호랑이처럼 다음을 기약했다.

* * *

한국 대통령의 파나르 방문 날.

새벽, 아니 어젯밤부터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나 역시 손이라도 보탤 요량으로 윤아 옆에 붙어 온갖 일을 도맡아서 했다.

꼭 요리랑 관련된 일이 아니어도 이렇게 할 일이 많았는데, 할 게 없을까 봐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대통령님 도착하셨습니다. 전용기에서 곧바로 내려 이 길로 걸어가실 테니 의장대 한 번 더 확인해 주시고, 표시 테이프도 확인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무대 위의 연극처럼 대통령이 걸어가는 길까지 정해져 있었다. 파나르 대사관 직원들 중 이번 의전을 주도한 김준우 서기관의 표정은 비장했다.

대통령실과 파나르 정부의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김준우 서기관이 없었다면 쉽게 계획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대통령님 내리십니다.”

무전기를 통해 전용기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웅장한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서서히 전용기의 문이 열리고 김채훈 대통령의 모습이 드러났다. 파나르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레드 카펫을 거슬러 올라가 전용기의 바로 앞까지 이동했다.

예정과는 다른 움직임이었지만 경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김채훈 대통령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격렬한 악수를 나눈 뒤 파나르 의장대가 연주하는 음악 속을 걸어갔다.

한참 동안의 사진 촬영이 있고 난 후에야 김용수 대사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왔다.

“대사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대사님을 이곳에 보낸 후로 내내 마음이 불편했는데 이제 좀 털어 낼 수 있겠네요. 이렇게 멋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채훈 대통령의 김용수 대사 칭찬은 이미 몇 번이나 들었지만 이 상황에서 우리의 리더가 인정받는 모습을 보자 덩달아 가슴이 뭉클해졌다.

“차에 타시죠.”

“네 그러시죠.”

한국 대통령의 파나르 첫 방문인 만큼 많은 인사들이 함께했다. 각국 대사들은 물론이고, 바누스 장관 그리고 샤샤와 만찬에 참석했던 낯익은 기자들이 눈에 띄었다.

충분한 시간 동안 기념 촬영과 질의 시간을 가진 후 파나르 대통령의 집무실로 이동했다.

“파나르 대사관 요리사님은 어디 계세요?”

“아 네. 제가 요리사입니다.”

방문단이 떠나고 난 뒤 누군가 날 찾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조근배 요리사를 비롯해 여러 명의 청와대 요리사와 수행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희 팀은 따로 이동을 할 테니 관저로 안내 좀 해 주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조근배 요리사는 그때 보던 모습과 사뭇 달랐다. 말투는 정중하고 공손했지만 다소 딱딱했고, 곧잘 보여 주던 미소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일을 할 땐 프로답게 하겠다는 마인드인가.

나도 호텔에 있을 땐 종종 밖에 있을 때랑은 다르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대사관 측에서는 윤아가 우리를 인솔했고, 각종 요리 기구들과 식재료들을 잔뜩 싣고 관저로 향했다.

“냉장고는 대부분 비워 뒀으니 넉넉하게 사용하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덕수 씨. 잠깐 둘러보기만 했는데 아주 관리가 잘된 주방인 걸 알겠어요. 고생 많았겠어요.”

“감사합니다.”

조근배 요리사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미소를 보였다. 비록 아주 옅은 미소였지만 그래도 긴장감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생선들은 얼음 그대로 냉장 보관하고, 채소들은 지하 창고에 보관해 줘요.”

“네 알겠습니다.”

조근배 요리사의 지휘하에 청와대 요리사 팀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제법 긴 비행시간 동안 신선하게 유지했던 식재료를 만찬 때까지 잘 보관하는 게 관건이었다.

“덕수 씨 고생 많았어요. 이제 들어가서 쉬어도 돼요.”

“셰프님들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아니에요. 덕수 씨는 이제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됩니다. 주방 구조도 다 파악했고, 기구들도 설치를 했으니 우리끼리 할 수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분명 나를 배려하려고 꺼낸 말이겠지만 섭섭했다. 자기들끼리의 팀워크가 중요하겠지만 내가 있다고 한들 방해될 정도는 아닐 텐데.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혹시나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해 주세요.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노골적으로 아쉬운 마음을 표현해 봤지만 조근배 요리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 의지가 조금은 전해졌는지 조근배 요리사는 다른 임무를 제안했다.

“그럼 대통령님 경호원들 도시락 만드는 거에 손을 좀 보태 주면 어떨까요?”

“경호원들이요?”

“네 대통령이 움직일 때마다 한 팀에 스무 명가량으로 구성된 경호원 팀이 붙습니다. 그들도 돌아가며 식사를 해야 하니깐 보통은 도시락을 준비합니다.”

“그 도시락도 요리사님들이 만드십니까?”

“아니요. 우린 그날 만찬을 신경 쓰기도 바쁩니다. 현지 한식당을 한 곳 섭외해 둔 걸로 압니다.”

“아….”

윤아에게 물어보니 상섭의 한식당에다가 도시락 주문을 맡겼다고 했다.

그래. 전공도 아닌 다른 일에 손을 보태는 것보단 대통령 경호원들의 도시락 준비를 도와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럼 전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쉬운 인사를 건네고 관저를 빠져나왔다. 윤아는 요리사 팀을 숙소로 안내해 준 후에도 스케줄이 가득 차 있었다. 다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혼자 여유를 즐기려니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 * *

다음 날 상섭의 한식당.

나는 조근배 요리사의 말대로 다음 날부터 상섭의 한식당을 찾았다. 김용수 대사도 사무실에서 전혀 다른 일을 하는 것보단 한식당에 가서 돕는 편이 나을 것 같다며 허락했다.

하루에 스무 명 분량의 도시락을 두 끼씩 준비하려니 손이 부족하긴 했었다. 그때 마침 내가 나타나 주니 두 사람이 신이 났다.

“아이고 이렇게 고급 인재가 도와주러 와 주니 너무 고맙네요.”

“고급은 무슨요. 정작 필요할 땐 아무 쓸모도 없는데요.”

“대통령 만찬 때 우리 요리사님은 아무것도 안 해요?”

“저요? 아직은 낄 자리가 없나 봐요.”

“에이 우리 요리사님의 실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분명 끼워 줬을 텐테, 그 사람이 아직 뭘 모르네.”

“하하 그런가 봐요….”

내 실력을 아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다. 심지어 하나하나 따져 가며 심사까지 한 사람인데 모를 리가 없지.

“근데 대통령 경호원들이라 그런지 반찬도 아주 푸짐하네요.”

“아주 최고급으로 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신경 좀 썼지.”

그래도 대량 생산해 내는 도시락처럼 구성이 단순하지는 않아 아쉬움을 달래는 중이었다.

따르르르르릉.

주방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상섭은 하던 일을 멈추고 전화기로 향했다.

“요리사님.”

“…….”

“아 요리사님.”

“저요?”

“여기 요리사가 요리사님 말고 누가 있어요. 전화 받으세요.”

“전화요? 저한테요?”

갑자기 웬 전화? 그것도 상섭의 식당으로 걸려 온 전화였는데 날 찾는다니.

의아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야 장덕수! 왜 전화를 안 받아?

전화를 건 사람은 윤아였다.

-전화했어? 몰랐어… 도시락 만드느라.

-몇 번이나 전화했는데.

어차피 날 찾을 사람은 없고, 거들어야 할 일은 제법 많아 휴대폰을 가방에 두고 일에 집중했었다.

하지만 식당으로 전화를 걸어온 윤아의 목소리는 제법 다급해 보였다.

-근데 무슨 일이야?

-다름이 아니라 나 지금 시장인데.

-시장? 네가 거길 왜?

-나 혼자가 아니지. 요리사님 한 분하고 같이 왔어.

요리사 한 명이 동행해서 시장에 갔다는 건 식재료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청와대 요리사들이 보관 실수를 했을 리는 없고.

뭔진 몰라도 납품 단계에서부터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가지고 온 식재료 하나에 작은 문제가 생겨서 새로 구하고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뭘 찾는데?

-말린 통문어를 찾으신대.

-말린 통문어?

윤아와 주고받는 대화가 조금 답답했는데 옆에서 요리가 전화를 빼앗아 받았다.

-장덕수 요리사님. 육수용으로 사용할 말린 통문어가 필요합니다. 구할 곳이 있습니까?

-음….

말린 통문어라.

일단 오징어와 문어는 파나르에서 그리 선호하는 식재료가 아니다. 게다가 말린 거라면 더더욱.

또 청와대에서 찾는 말린 문어라면 모양도 반듯하고, 상처도 없는 걸 찾고 있을 것이다.

-일단 시장에선 구하기 힘들 겁니다. 생문어는 어떻게든 구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마른 건 좀….

-아… 정 안되면 자른 거라도 어떻게 안 됩니까? 비행기에 실을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곰팡이가 조금 생기는 바람에요.

-곰팡이 맞나요? 타우린 아니구요?

-사실 확실치 않아요. 제가 보기에도 타우린인 거 같긴 한데 조근배 셰프님이 허용을 안 해 주셔서요….

마른 건어물 표면엔 종종 곰팡이처럼 보이는 하얀 가루가 생기곤 한다. 대부분은 곰팡이가 아니라 피로 회복에 좋은 타우린이 붙어 있는 건데 조근배 요리사의 식재료 보는 눈은 아주 까다로운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오늘 안에 마른 통문어를 구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을까요?

-통문어를 사서 건조기에 말리는 건 어떠세요?

-그렇다 한들 쓸 만한 품질이 안 나오겠죠.

-아무래도 그렇겠죠.

조근배 요리사의 보조의 다급함이 전화기 너머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장덕수 요리사님이 파나르 상황에 제일 빠삭하시니깐 방법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큰일이네요. 문어가 빠지면 준비했던 육수 레시피가 완전히 달라져야 할 텐데.

-메뉴 전체를 바꿔야 할 수도 있겠군요.

-하….

보조 요리사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윤아가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윤아야 그 시장 말고 공원 밑으로 쭉 내려가다 보면 카페 하나 나오는데, 그 뒷골목에 있는 가게 알지? 거기에 해산물이나 건어물 많이 팔거든.

-난 모르지….

-파나르에 7년이나 산 사람이 그것도 몰라?

-내가 그걸 왜 알고 있겠어.

이곳에 7년이나 산 윤아보다 내가 시장이나 식재료 마트에 대해 더 빠삭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풀어 말린 문어를 찾는 게 최우선 과제였다.

-여튼 내가 알려 준 가게들 전부 가 봐 알았지? 나는 여기 식당 사장님한테도 물어보고, 따로 또 알아볼 테니까.

-응 알았어! 혹시 구하게 되면 연락 줘.

-당연하지.

나는 전화를 끊고 곧바로 상섭에게 물었지만 역시 구하기 힘들 거란 답변이 돌아왔다.

그럼 희망이 있는 곳은 딱 한 군데뿐이었다.

마침 그 시기도 다가오고 있으니 충분히 기대를 걸어 볼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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