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우울함
한샘은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곧바로 휴직을 신청했다. 아기를 낳는 게 아닌 사람이 휴직계를 낸 건 한샘이 처음이었다.
호텔 측에서는 일 잘하고 성실한 한샘의 이탈이 반갑진 않았지만 딱히 거부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호텔에도 도움이 될 유학이었으니까.
한샘의 확실한 명분이 호텔 측에 먹혀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래도 그 소심한 사장이 웬일로 휴직을 받아 줬나 보네.
-그럴 리가 있냐? 처음엔 무슨 소리냐고 생난리를 쳤지. 임신을 한 것도 아니고, 출산을 앞둔 사람도 아니고, 당장 인력 한 명 한 명이 급한 호텔에서 그냥 유학을 간다고 휴직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막 근무 태만으로 해고해도 정당한 사유라고 협박을 하더라.
-근데 어떻게 받아 낸 거야?
한샘이 감당하는 업무를 공백 없이 해내려면 알바가 두 명 정도 필요했다. 그러면 1년간 지출할 인건비가 소폭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려 주니 금세 표정이 변했다고 한다.
소심한 놈. 사장이 돼 가지고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다니.
그놈의 머릿속은 온통 숫자로만 가득 차 있었다.
H호텔의 미래는 그 사장이 아니라 한샘이 같은 직원에게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입학 신청도 준비했어?
-응 그건 이미 했지. 다시 알아보니깐 이탈리아어도 같이 배우면서 하는 코스가 있길래 그걸로 신청했어.
-그래? 다행이네. 그렇긴 해도 어학 공부랑 병행하려면 쉽진 않겠다.
언어 문제로 인해 수업을 듣는 게 조금은 어려울 수 있겠지만 한샘은 그런 걱정 따위 하지 않았다.
온몸과 피부로 느끼며 배우면 된다는 의지와 다짐.
이미 마음만은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근데 덕수야. 넌 나중에 한국에 와도 우리 호텔로 돌아오진 못하겠다. 어차피 올 생각 없겠지만.
-왜?
-김상현 주방장님도 그렇고, 여기 있는 이한샘도 그렇고, 호텔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을 떠나게 했잖아.
-내가?
-사장이 그런 널 좋다고 받아 주겠냐?
김상현 주방장님은 파나르에 다녀온 후 미국의 H호텔로 발령이 났다. 직급은 Head chef에서 sous chef로 떨어졌지만 급여는 오히려 올라갔다고 좋아했다.
처음 계획과는 달리 주방장님의 사모님과 아이들은 아빠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기로 했다. 함께 미국으로 떠나지 않고 한국에 남아 열심히 김상현 주방장을 응원했다.
종종 통화를 하니 김상현 주방장도 업무에 더 집중할 수 있고, 아주 많은 걸 배울 수 있어 만족스러운 미국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근데 김상현 주방장님이랑 너를 묶는 건 좀 오버 아니야?
-뭐어? 덕수 넌 네 여자 친구를 그 정도밖에 생각 안 해? 내가 주방장님보다 부족한 건 나이와 경력뿐이야. 게다가 난 더 젊을 때 해외 경험도 쌓을 테니 오히려 미래엔 내가 더 나은 인재라고 할 수 있지.
한샘의 능글맞음에 웃음이 터졌다. 저런 자신감은 어디서든 도움이 된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탈리아에 가서 향수병에 걸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또 저렇게 당당해야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다.
-여튼 그런 결심을 한 네가 자랑스럽다. 당연히 잘 해낼 거고, 엄청 많은 걸 배우겠지. 호텔로 꼭 돌아가지 않더라도 넌 멋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덕수 네가 아니었으면 이런 다짐을 하지도 않았을 거야.
-내가 뭘 했다고.
한샘은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덕수야 넌 내가 제일 좋아하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가장 배울 게 많고, 꼭 이기고 싶은 라이벌이기도 해.
-내가?
-‘오늘부터 한식당에서 일하기로 한 장덕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했던가? 처음 출근했을 때? 사실 기억도 잘 안 나. 항상 듣던 평범한 인사라서. 근데 그다음 날부턴 계속 네가 눈에 띄더라. 넌 주방이고 나는 홀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도 계속 뛰어다니는 네가 보였어.
-잘생겨서 일부러 날 쳐다본 건 아니고?
-아니거든!
한샘의 말에 나도 호텔에 첫 출근 한 날을 곱씹어 보았다. 그땐 열정이 충만했고, 긴장감 또한 가득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저 목소리가 크고 빠릿빠릿한 직원이 되자는 게 첫 번째 목표였다. 요리는 그때 제대로 할 줄도 몰랐으니까.
-나는 너보다 몇 년 일찍 이 호텔에 왔고, 대학도 호텔경영학을 전공했는데 지금 봐 봐.
-지금이 네가 뭐 어때서.
-이런 걸로 상처 안 받으니깐 솔직하게 말해도 돼. 2년 만에 너랑 나랑 차이가 얼마나 벌어졌는지 봐 봐.
그건 내가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고 말을 한들 한샘의 귀엔 들리지도 않을 거다. 내가 회귀한 사람이란 사실을 괜히 꺼냈다가 자길 놀린다며 화를 낼 것 같았다.
-길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넌 2년 만에 완전 딴사람이 되어 있더라. 호텔에서만 2년을 보낸 난 제자리인 거 같은데 너는 저만치 앞서가고 있어.
-…….
-근데 나는 이런 일로 주눅 들거나 자존심 상해하지 않아. 오래달리기를 하다 보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게 당연하지. 꼴랑 한번 역전당했다고 주저앉아서 포기할 수 없잖아? 그게 더 창피한 일이지.
-당연하지. 100% 동의해.
한샘이 당돌하고 멋있는 여자인 건 알았지만 지금의 모습은 내가 몰랐던 모습이다. 이렇게 자존감이 높은 여자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긴장되는 마음까진 숨길 수 없었다. 말투는 당당하려 애쓰고 있지만 목소리가 떨리고, 목구멍이 자주 마르는 게 느껴졌다.
낯선 타국에서 뭔가를 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결심을 한 한샘을 떠올리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1년 동안 널 못 본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이번만 버텨 내면 우린 오랫동안 함께 지낼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 꾹 참고 기다릴게. 둘 다 멋있는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
“뭐야 꼭 프러포즈하는 것 같다? 내가 이탈리아에서 잘생긴 남자 만나면 어쩌려고 그래?”
“멋있는 남자들한테 절대 한눈팔지 못하게 더 최선을 다해야지.”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모든 일에 자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네가 매일 생각날 거야. 그 생각으로 버텨 볼게.”
한샘은 한참 동안 전화를 끊지 않고 이것저것 캐물었다. 해외 생활을 하며 느꼈던 꿀팁이라든가 유의 사항 등등 전화를 끊고 싶지 않은지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나 역시 그런 질문 하나하나 상세하고 꼼꼼하게 대답해 주면서 우린 밤을 지새웠다.
* * *
주파나르 한국 대사관.
청와대 측에서 만찬과 관련해 대화를 나누고 싶다며 나를 사무실로 불러냈다. 대통령 방문이 계획되고 나서 다른 만찬이나 행사들은 전부 취소되거나 일정이 밀렸다.
대사관 직원들뿐만 아니라 한인회 사람들도 전부 나서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서기관님 저 왔습니다.”
“아! 요리사님 어서 오세요. 언제 왔어요?”
“한 5분 전에요?”
“아이고 죄송해요.”
김준우 서기관은 거의 정신을 놓은 채로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사무실에 들어오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내 존재를 알아차릴 정도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청와대에 연락해 볼게요.”
“네 알겠습니다.”
김준우 서기관은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걸었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화기를 나에게 넘겼다.
-파나르 대사관 요리사 장덕수입니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어요? 나 조근배입니다.
-안녕하세요 셰프님. 잘 지내셨습니까?
전화기에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번 대회 때 안면을 트게 된 조근배 청와대 요리사였다.
-소식을 들어서 알겠지만 이번 방문에 요리사들도 같이 가기로 했어요. 나뿐만 아니라 몇 분 더 가실 테니깐 장덕수 씨가 당일에 신경 써야 할 일은 없을 거예요.
-아 네. 알겠습니다.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일 테지만 오히려 나는 이 상황이 서운했다.
나도 잘할 수 있는데. 내가 파나르에서는 저들보다 실력 발휘를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선을 넘었다간 여태 쌓아 둔 공든 탑이 단번에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거기에 가기 전까진 해 줘야 할 일이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조근배 요리사는 파나르 대사관 관저의 주방 규모, 도구, 기물들의 상태를 전부 상세히 파악했다. 챙겨 가야 하는 물품들을 체크하고, 부족하다면 따로 주방을 섭외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주방 상태는 양호한 거 같네요. 뭐 소문을 듣자 하니 그곳에서 많은 일을 해냈다고요?
-그냥 보통 요리사들이 하는 만큼 했을 뿐입니다.
-그럼 우리도 따로 주방을 섭외할 필요는 없겠네요.
조근배 요리사는 이번 만찬에 날 조금이라도 참여하게 해 주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그것까지 아는지 모르겠지만 국가 원수의 음식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아무나 만들지 못해요.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니까. 예전의 왕처럼 말이에요.
-그렇군요.
-내가 총괄 책임자로 만찬을 지휘하겠지만 같이 일했던 동료가 아닌 이상 100% 믿고 맡길 순 없거든요. 그날은 나도 정신없이 바쁠 테니까요.
이미 이번 만찬은 체념한 상태였다. 옆에서 설거지나 잡일들을 좀 도와주고 청와대 요리사들은 어떻게 일을 하고, 대사관 요리사완 뭐가 다른지 정도만 파악해도 충분했다.
-하지만 장덕수 씨와는 구면이니 내가 좀 더 의지할게요. 파나르에 대한 정보도 많지 않구요.
-그럼 식재료 같은 건 어떻게 하시나요? 파나르엔 없는 게 많을 텐데.
-그건 걱정 마요. 대통령 전용기엔 신선한 식재료를 온전히 운반할 수 있는 시설쯤은 마련되어 있으니까요.
현지 사정을 빠삭하게 알고 있는 장점을 써먹어 보려 했는데 그것마저 무산되어 버렸다.
신경 안 쓰려 해도 자꾸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더 필요한 일이 생기면 다시 연락할게요. 조만간 파나르에서 또 봐요.
-예 셰프님.
나는 입맛을 다시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지만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용수 대사는 물론이고, 막내 직원인 카리나까지 모두가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었다.
“전 이만 관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
“가 볼게요.”
“…….”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나갈 때도 나에게 신경을 써 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에 와서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나 혼자만 소외된 느낌.
지금까진 예외적으로 요리사인 내가 주도를 하며 일을 했었다. 외교관들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재외 공관에서 요리사인 내가 가장 많은 성과를 냈고, 다양한 일을 진행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일들 중 가장 큰 이벤트라 할 수 있는 대통령 방문에 내가 쏙 빠져 버리니 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만 같았다.
어차피 지금 시간에 관저로 돌아가 봤자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주방 청소는 미리미리 해 놨기 때문에 이미 최상의 상태였고, 따로 신선한 식재료를 구입할 경로를 알아 둘 필요도 없었다.
날씨도 좋은데 아무런 생각 없이 파나르 거리를 거닐었다. 큰 마트로 들어가 알렉스의 쿠므스를 만지작거리기도 했고, 손님이 가득 차 있는 J&J 분식을 지나가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상섭의 한식당으로 가 시식회를 하며 파나르 사람들의 입맛을 파악하던 때를 떠올렸다.
내가 진짜 청와대 요리사가 될 수 있을까?
두 번째 인생이라고 해서 무조건 성공할 거란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오히려 회귀라는 커다란 행운 때문에 전체적인 운은 줄어든 게 아닐까?
쓸데없는 잡생각이 많이 나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