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한샘의 다짐
아프냐는 물음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한샘이었다. 꿈에 그리던 유럽 여행도 왔고, 미식의 나라 이탈리아에서도 손꼽히는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까지 먹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다운이 된 걸까.
“뭔가 짜증 나는 일이 있었어?”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내가 눈치채지 못한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나 좋자고 괜히 테오가 소개해 준 곳에 온 건 아닌지 잠시 후회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은 온전히 여행만 즐기자. 아는 사람도, 해야 할 일도 없어.”
“아냐. 그런 게 아니고, 나 빼곤 다 행복해 보여서.”
“응?”
“재밌어 보인다고 해야 하나?”
한샘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재밌어 보인다는 게 무슨 뜻이야?”
“그 로베르토 셰프의 레스토랑에선 모두가 행복해 보이더라. 심지어 나는 여행을 하며 쉬고 있는 중인데 일을 하는 직원들의 표정이 더 좋아 보였어.”
한샘은 조금은 억울하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요리사들은 이 세상에 없었던 자신들만의 요리를 하면서 즐거워했고, 웨이터들은 그 음식을 가지고 나가면서 손님들이 얼마나 기뻐할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더라.”
“…….”
“그리고 덕수 네가 스텝밀을 해 줬을 때 거기 셰프들의 표정이 얼마나 초롱초롱했는지 알아? 경계가 아니라 새로운 걸 또 하나 배울 수 있단 사실에 신이 난 사람들 같았어.”
한샘의 말을 들으며 잠시 생각해 봤는데 그곳 직원들의 표정은 일을 하는 보통 직원들과는 달랐다.
“아까 와인을 추천해 주던 직원도 그렇고, 자기가 일하는 레스토랑에 엄청 자부심을 느끼고 즐겁게 일하는 것 같아. 아마 출근도 엄청 신나서 할걸?”
“한샘이 넌 H호텔이 자랑스럽지 않아?”
“우리 호텔? 물론 자랑스럽지. 그곳에서 오랫동안 일할 수 있는 건 엄청난 행운이긴 해. 그렇지만 출근이 즐거울 정도는 아니야.”
출근하는 게 즐겁다라.
사실 자신이 사장이 아닌 이상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니 사장이라 해도 출근이란 건 항상 긴장되고, 피하고 싶은 일일 것이다.
“우리 호텔에서 와인을 저런 식으로 설명해 줬다간 난리가 날걸? 서비스 수준이 왜 이렇게 떨어졌냐, 고객이 친구냐 등등.”
“그렇긴 하지.”
음식도 음식이었지만 로베르토의 레스토랑에선 직원들의 태도가 특히 남달랐다. 한샘은 같은 포지션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들을 유심히 지켜봤는데 뭔가 확실히 다름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몇 년간 일을 하면서 훌륭한 서비스란 정해진 룰과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않고, 정확하면 되는 줄 알았어. 근데 오늘 여기 직원들을 보면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더라.”
“왜?”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 이렇게 해도 손님의 기분을 전혀 상하게 하지 않을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이 수십 번은 들었어.”
호텔 직원들은 출근을 하기 몇 시간 전부터 긴장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주방은 조금 덜하지만 한샘을 비롯해 서버들은 깔끔한 외모를 위해 짧은 머리, 면도, 적당한 화장까지 신경 쓴다.
그렇게 강요하진 않는 부분이지만 한샘은 몸매 관리까지도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겉모습을 꾸미는 일은 이제 적응이 되어서 힘들진 않지만 나도 저 사람들처럼 손님들과 좀 더 스스럼없이 소통하고, 즐겁게 일할 수 있으면 좋겠어.”
“…….”
“나도 그런 걸 배워 보고 싶어. 남들이 보기에 일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즐거워 보였으면 좋겠어.”
한샘은 한국의 대학에서 호텔 경영학을 전공했다. 그곳에서 배운 스킬들 덕분에 입사 초기부터 아주 인정을 받는 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몇 년이 지나고 업무가 많이 능숙해졌지만 일하는 방식엔 큰 변함이 없었다. 책에서 배우고, 수업 때 배운 내용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니까.
“그럼 유럽에 있는 동안 최대한 많이 가 보고 많이 배워 보자.”
“응 여기까지 와서 일 생각하는 것도 웃기지만 나도 이대로 그냥 살다간 전혀 발전 없이 늙어 버릴 것 같아.”
한샘은 다운되었던 기분을 다시 한껏 끌어올렸다. 유럽에서의 시간은 이제 겨우 하루만 지났을 뿐이다. 아직 보고 배울 시간은 넉넉했다. 쉬고 즐기는 것도 좋지만 뭔가를 배운다는 건 항상 흥분되는 일이었다.
나 역시 한샘 덕분에 남은 기간이 더욱 기대가 되었다.
* * *
대한민국 대통령실.
김채훈 대통령과 이영호 외교부 장관까지 참석하는 회의가 시작되었다. 김용수 대사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김준우 서기관은 옆에서 얼어붙은 표정으로 수첩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역사상 첫 한국-파나르 정상 회담을 이끌어 낸 김용수 대사님 이하 파나르 대사관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습니다.”
김채훈 대통령의 짧은 칭찬에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어려운 상황에서 잘 버텨 주기만 해도 충분했는데 이렇게 정상 회담까지 이끌어 주시다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시작인데요. 어렵게 성사시킨 만큼 최대한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렇습니다. 계획할 일이 천지이니 회의를 시작해보시죠.”
이영호 장관 역시 한마디 칭찬을 건넨 뒤 회의를 시작했다.
한국 대통령이 파나르에 처음 방문하는 만큼 의전에 관한 아무런 정보가 남아 있지 않았다.
파나르 정부의 도움을 받겠지만 한국 측에서도 준비할 일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김준우 서기관의 역할이 중요했다.
“예전에 의전 서열 2위인 국회 의장의 방문은 있었으니 그때 정보를 토대로 계획을 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좋습니다. 그리고 이번 방문엔 조금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음식입니다.”
이번엔 제법 큰 규모의 방문단이 꾸려질 예정이었다. 그중에는 청와대 요리사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대사관 관저에 파나르 대통령을 초대하는 일정을 포함시키려고 합니다.”
“파나르 대통령을요?”
“네 이번 회담 때 석유 수입에 대한 부분도 상의를 하고 싶은데, 우리 측이 좀 더 주도적으로 협상을 진행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홈그라운드가 유리하겠죠.”
단순히 양국 간의 친목을 다지기 위한 정상 회담이 아니었다. 파나르와 한국은 지금까지는 교류가 적었지만 서로에게 필요한 걸 많이 가진 나라였다.
“지금까진 러시아나 중국의 영향력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이젠 상황이 조금 달라졌어요. 파나르에서도 한국을 다르게 생각하고 있구요.”
“김준우 서기관님. 파나르 요리사와 청와대 요리사가 원활하게 소통하고 협조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며칠 동안 이어진 회의를 통해 방문단의 규모, 일정, 이동 경로 등이 세세하게 정해졌다. 이제 파나르로 돌아가 현지 사정에 맞게 수정을 거치고 다시 한국 정부와 공유를 하면 된다. 그리곤 수십 번의 반복 연습.
그렇게 힘들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지만 안전하고 원활한 정상 회담이 이뤄질 수 있었다.
“대사님, 며칠 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나보다 김 서기관이 더 고생했죠. 절대 쉬운 일이 아닌데.”
“그렇긴 해도 뭔가 역사를 남기는 일에 일조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역사요?”
“이것도 일종의 역사나 다름없죠. 한국 대통령의 첫 파나르 방문. 몇 년 후엔 교과서에도 나올 만한 내용 아닌가요?”
“하하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네요.”
김준우 서기관은 첫날과 달리 긴장이 많이 풀린 표정이었다. 물론 계획대로 모든 게 진행되어야 끝이 나겠지만 길고 긴 회의를 끝낸 것만으로도 속이 후련했다.
“근데 조금 아쉽네요 대사님.”
“뭐가요?”
김준우 서기관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약간의 투정을 부렸다.
“파나르 대통령이 저희 관저에 오는 거요. 그거 우리 요리사님이 담당해도 충분히 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청와대 요리사들까지 동행할 필욘 없지 않을까요?”
장덕수 요리사를 향한 파나르 대사관 직원들의 신뢰는 굉장했다. 김준우 서기관은 이번 대통령 방문과 만찬이 장덕수 요리사에게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잘 해낼 거란 전제는 깔려 있었고.
“하하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장 셰프는 당연히 능력이 충분하고, 실제로도 잘 해낼 거예요. 그렇지만 외교란 게 그렇지 않아요. 일종의 급을 맞춰 줘야 하는 게 예의고 룰이거든요.”
“우리 요리사님 요리는 급이 맞을 텐데.”
“음식의 맛보단 장 셰프의 신분이 아직은 모자라죠. 그렇지만 장 셰프의 목표대로 몇 년 후엔 청와대 요리사가 되어서 다시 파나르에 방문하면 되죠.”
“그렇게 되겠죠?”
김용수 대사와 김준우 서기관은 가벼운 맘으로 호텔로 돌아가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 * *
프랑스 샤를드골 공항.
우린 거의 2주 가까운 시간 동안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3개국을 여행했다.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아주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어쩌다 보니깐 완전 식도락 여행이었네.”
“그러니깐 말이야. 그냥 적당히 구경하고 적당히 쉬다가 오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되네.”
첫날의 기억이 강렬해서인지 우린 유럽을 돌아다니는 동안 유명한 레스토랑이나 호텔을 최대한 많이 방문했다.
특히 다른 나라에 있는 H호텔을 방문해 본 경험은 색달랐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서비스.
같은 체인 호텔이지만 추구하는 철학이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도 이번 여행에서 얻은 게 훨씬 많은 것 같아.”
“나도 그래. 진짜 음식은 배울수록 끝이 없는 것 같다.”
“내 말이요. 음식뿐만 아니라 모든 배움에는 끝이 없는 것 같아.”
한샘의 말에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인생을 살아도 여전히 배울 게 많은 세상이었다. 몇 년간 호텔에만 박혀 있던 한샘은 얼마나 더 많은 걸 느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비행기 타려니깐 아쉽다.”
“나도. 다음에 또 오자. 그땐 스페인이나 런던 이런 곳도 가 보고.”
“그거 말고 덕수 너랑 또 헤어져야 하잖아.”
“아 그렇지.”
이제 파나르에서 시간은 반 넘게 지났지만 아직도 1년 가까이 남아 있었다. 맘을 먹으면 한두 번 얼굴은 볼 수 있겠지만 이렇게 긴 시간 함께 보내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바쁘게 지내다 보면 1년은 금방 지나갈 거야.”
“덕수 넌 일이 재밌으니깐 그렇겠지. 난 일하다 보면 맨날 네 생각만 나는데.”
“하하….”
미안함에 표정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를 몰랐다. 당황해하는 날 보며 한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덕수 네가 한국에 돌아올 시간이 1년 정도 남은 거지?”
“응 우리 대사님 임기가 그 정도 남았으니깐 나도 그때 한국으로 돌아가려구.”
“1년이라… 시간 참 빠르네. 3년은 엄청 길게 느껴졌는데 또 1년 남았다고 하니깐 얼마 안 남은 것 같다.”
“그렇지?”
“근데 또 1년간 일만 하자니 너무 지루할 것 같아.”
“응?”
한샘은 알쏭달쏭한 말을 계속했다.
“나도 가만히 덕수 너만 기다리고 있으면 안 되겠어.”
“응? 무… 무슨 의미야?”
장거리 연애에 한계를 느낀 건지 한샘의 입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의 말이 튀어나왔다.
“나도 남은 1년이 더 빨리 갈 수 있도록 살아야겠어.”
그렇게 말하면서 휴대폰을 보여 주는 한샘이었다.
“나 여기 갈래.”
“응? 이게 뭔데?”
한샘의 휴대폰을 유심히 읽어봤다.
[이탈리아 카스 호텔전문학교]
“호텔전문학교?”
“응 난 이번 여행에서 많은 걸 느꼈어.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면 여행의 기억으로 몇 달간은 큰 문제 없이 잘 버티겠지. 근데 또 이번처럼 비슷한 시기가 올 것 같아. 매번 똑같은 일상의 연속, 기계처럼 응대하는 서비스….”
한샘의 말마따나 잠깐의 일탈로 인해 답답함을 조금 해소했을 뿐 여전히 반복되고 지루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새로운 계획을 설명해 주는 말투엔 그 어느 때보다 흥분에 가득 차 있었다.
“여기에 1년짜리 전문가 코스가 있더라구. 6개월간은 이론 수업, 또 6개월간은 현장 실습까지 할 수 있대. 그렇게 바쁜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어떻게 즐거울 수 있는지 비밀을 알아야겠어.”
“그래서 여기에 가려구?”
“응 딱 1년 후에 성장한 내 모습을 보여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