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68화 (169/202)
  • 168. 자극

    걱정과는 달리 한샘은 오히려 내가 있는 게 방해가 되는 느낌이었다.

    이곳에 왔던 처음부터 한샘의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덕분에 큰 부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여기입니다.”

    “와아….”

    주방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자 감탄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오히려 이 레스토랑에 들어올 때보다 더 진심이 담긴 감탄이었다.

    “이게 주방이라구요?”

    “근사하죠?”

    로베르토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자부심이 넘쳐 났다.

    그도 그럴 것이 들어간 주방은 햇살이 가득 비치고, 다른 주방들과는 달리 습도가 낮았다.

    보통 주방은 창문이 없어 불을 끄면 어두울 정도이고, 식기세척기나 식재료 등으로 인해 습기가 차 있는 느낌이다.

    아무리 깨끗하게 청소를 해도 답답한 느낌을 완전히 지울 순 없었다. 하지만 로베르토의 주방은 달랐다.

    “사진으로 이미 봤었지만 실제로 보니깐 더 대단하네요. 이런 주방은 정말 처음이에요.”

    “그렇죠? 제가 셰프라서 그런 게 아니라 이 레스토랑에서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 주방이에요.”

    그 말이 곧바로 이해가 될 만큼 로베르토의 주방은 아름다웠다. 끝없이 펼쳐지는 수평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주방이라.

    이런 곳에서 일하면 피로감이 조금은 덜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요리사에겐 주방이 가장 편하고 머물고 싶은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진심으로 정성을 쏟으며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까요.”

    “와아….”

    로베르토의 철학에 나는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래서 처음 레스토랑을 준비할 때 주방을 가장 경치 좋은 곳으로 계획했어요.”

    “멋있습니다.”

    로베르토는 주방을 구경시켜 주며 직원들 한 명 한 명을 소개시켜 줬다.

    이곳은 이태리 음식을 주로 파는 곳이긴 했지만 테오의 말대로 여러 나라에서 온 요리사들이 많았다.

    “여기는 필리핀, 일본, 홍콩에서 온 요리사들이 일하고 있어요. 당연히 메뉴 회의는 같이하지만 저희는 요리사들의 의견을 대부분 존중해 주는 편이에요.”

    “그렇군요.”

    “만약 미스터 장이 일하게 된다면 지금처럼 하고 싶은 요리는 맘껏 할 수 있을 겁니다.”

    테오가 얼마나 밑밥을 깔아 놨는지 내가 대사관 요리사를 좋아하는 이유까지 알고 있었다.

    꼭 그게 아니어도 탐이 나는 주방이긴 했다.

    “오늘 음식은 제가 꼭 대접할게요. 그러니 이것저것 다 먹어 보고 솔직한 의견도 부탁해요.”

    “아닙니다. 계산을 하고 먹더라도 그 정돈 해 드릴 수 있어요.”

    “테오가 워낙 신신당부를 해서요.”

    “제 핑계 대세요. 제가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고.”

    “꼭 테오의 부탁이 아니어도 전도유망한 젊은 후배 요리사에게 이 정도는 대접해 줄 수 있어요. 그게 선배들의 책임이기도 하구요.”

    이제 적응이 될 법도 한데 ‘젊다’는 말을 들으면 아직도 쑥스럽고 낯간지러웠다. 그래도 기분은 좋은지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훌륭한 음식을 공짜로 먹는 건 요리사로서 도리가 아닙니다.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허허 곤란하네요.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어떻게요?”

    로베르토는 나를 끌고 주방 한구석에 있는 식재료 창고로 들어갔다.

    “여기는 우리 식재료 창고예요. 내가 동양 요리에 관심이 많다는 얘기는 테오한테 들어서 알고 있죠?”

    “네 알고 있습니다.”

    “그중 한국 음식은 당연히 포함이에요. 그래서 유통 기한이 긴 조미료들은 미리 사 둬서 이것저것 테스트를 해 보거든요.”

    로베르토의 말대로 식재료 창고에는 익숙한 것들이 많았다. 된장, 고추장, 간장은 물론이고, 고춧가루나 당면 등 한국 식재료들이 제법 구비되어 있었다.

    “미스터 장이 만족할 수준은 아니겠지만 여기 있는 재료들로 우리 직원들 스텝밀 한번 해 주면 어때요?”

    “스텝밀이요?”

    “그걸로 오늘 밥값을 대신하는 걸로 해요. 저도 미스터 장의 음식을 먹어 보고 싶기도 하고.”

    “아….”

    갑작스러운 제안에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끌리는 말이었다.

    이곳에서 일을 하진 않더라도 이 근사한 주방을 사용해 볼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멀리까지 온 사람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게 조금 웃기지만 미스터 장이 워낙 확고하니까요.”

    나는 로베르토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한 뒤 자리로 돌아왔다. 한샘에겐 차근히 설명하면 충분히 이해해 줄 것이다.

    “많이 기다렸지? 미안해 주방이 너무 근사해서.”

    “벌써 왔어? 좀 더 구경하다 오지.”

    “아? 어… 충분히 구경했어.”

    한샘은 오히려 나보다 더 레스토랑을 구석구석 돌아보고 있었다. 주방 안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주고 양해를 구하려는데 한샘은 오히려 좋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서 음식들 공짜로 먹는 대신 스텝밀을 만들어 주기로 했어.”

    “오 그래?”

    “좀 기다려 줄 수 있지?”

    “당연하지. 그럼 나도 주방 구경시켜 줄 수 있어?”

    “주방? 그거야 뭐 부탁해 보면 되지 않을까?”

    이탈리아 구석구석을 구경해도 모자랄 시간인데 남의 레스토랑의 직원식까지 해 주겠다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까 봐 조마조마했었다.

    하지만 한샘은 자신도 계획이 있는 사람처럼 이곳에 더 머물고 싶어 했다.

    그보다 허기진 우리의 배를 채우는 게 우선이었다.

    “그럼 첫 번째 요리입니다. 깔라마리 튀김과 전복이 가미된 해산물 샐러드입니다.”

    깔라마리는 손가락 크기의 작은 오징어 종류를 말하는데 쫄깃하고 달큼한 맛이 일품인 식재료다.

    이 깔라마리 튀김을 파는 곳은 베네치아의 길거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요리는 차원이 달랐다.

    “복숭아 드레싱을 곁들인 이 샐러드는 피로 회복에 아주 좋은 음식입니다.”

    “오 복숭아?”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장시간 비행과 기차로 어깨가 뭉칠 대로 뭉쳐 있던 우리였다.

    깔라마리의 타우린 성분과 복숭아의 비타민 A, 그리고 전복의 훌륭한 궁합으로 피로 회복에 아주 좋은 음식을 만들어 냈다.

    “복숭아 과육이 중간중간에 씹히니깐 그것도 매력이네.”

    “나는 그 와중에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은 올리브오일도 대단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올리브오일에 자부심을 가지는 이유를 알겠다.”

    향긋한 올리브오일까지 느껴지니 이탈리아에 온 게 실감이 나는 맛이었다.

    첫 번째 음식도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는데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두 번째 음식은 피자입니다.”

    “오 나폴리 피자!”

    400도가 넘는 화덕에서 구워 내는 이태리식 피자는 간단한 재료로도 훌륭한 맛을 내기로 유명했다.

    토핑이 듬뿍 올라간 미국식 피자도 물론 맛있지만 한두 가지 신선한 재료로 극한의 맛을 이끌어내는 이태리 피자의 매력은 굉장했다.

    특히 마리나라 피자는 대표적인 이태리 피자로 토마토소스와 마늘 몇 쪽, 올리브오일이 전부인데도 엄청난 사랑을 받는 피자였다.

    “이 피자는 저희 레스토랑에서 따로 팔고 있진 않지만 셰프님이 직접 개발하신 피자입니다.”

    “그래요?”

    로베르토가 직접 가지고 온 피자의 생김새는 독특했다.

    “한국에서도 생선회를 많이 먹죠?”

    “네 이탈리아처럼 반도인 나라니깐 생선회를 많이 먹습니다.”

    한국인들의 회 사랑은 단연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보통은 생선회를 먹을 때 간장과 고추냉이 섞은 소스와 함께 먹잖아요. 아니면 소금 약간과 먹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것 말고도 독특한 소스와 생선회를 많이 즐기더라구요.”

    “독특한 소스요?”

    “빨갛고 새콤하고, 매콤한 소스요.”

    “아 초고추장?”

    로베르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새콤달콤이 피자 도우와 제법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접목시켜 봤어요.”

    “그럼 이 피자가?”

    “맞아요. 피자 위에 올린 소스는 토마토 소스와 초고추장을 섞여서 만든 소스예요. 고추장이란 소스에 열을 가하니깐 맛이 더욱 좋아지더라구요.”

    “그건 고추장에도 마이야르 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이에요.”

    고기를 구울 때 표면이 갈색으로 변하는 걸 흔히 마이야르라고 하는데, 마이야르 반응은 단백질의 변화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고추장 역시 열을 가하면 마이야르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 맛이 깊어지고, 진해진다.

    고추장을 그렇게까지 제대로 활용하고 있었다니.

    “역시 미스터 장도 잘 알고 있군요. 원래 이탈리아 사람들은 토마토소스에 많은 걸 섞지 않지만 난 요리사니까요. 이것저것 해 보는 걸 좋아하거든요. 한번 먹어 봐요.”

    “네 알겠습니다.”

    도우는 탔다 싶을 정도로 색깔이 진하게 났고, 초고추장 소스를 바른 도우 위에 약간의 치즈가 녹아 있었다.

    그리고 아주 독특한 이 피자 위에는 광어회 몇 점과 루꼴라라는 향이 좋은 채소가 토핑으로 올라가 있었다.

    역시나 올리브오일은 빠지지 않고.

    바사삭.

    평소완 다르게 피자 도우 부분을 먼저 입에 넣었다. 고온에 구워진 이 밀가루 덩어리는 한번 맛보면 손을 뗄 수 없는 마력을 지닌 음식이었다.

    “우리 이태리 피자는 접어서 먹어야 해요. 포크랑 나이프를 사용하지 말고.”

    “……!”

    로베르토의 말에 한샘이 서둘러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맛이 어때요 미스터 장?”

    크지만 얇고 가벼운 토핑 덕에 접은 피자 한 조각을 한 번에 입으로 넣을 수 있었다.

    “음….”

    담백한 도우에 향이 강하지 않은 치즈.

    그리고 감칠맛이 더해진 초고추장에 광어회가 씹히기 시작하자 익숙하면서도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맛이 탄생했다.

    고소한 참기름의 빈자리는 최고급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오일이 그 자리를 대신했고, 완벽하게 대체했다.

    “와아… 어떻게 이런 조합을 찾아내신 거예요?”

    “초고추장 맛을 제대로 재현해 냈나요?”

    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나로선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조합이었다.

    피자 위에 광어회라니, 아니 그것보다 초고추장을 이용한 피자라니.

    세상은 너무 넓은 곳이란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럼 다음 코스로 넘어가 볼까요?”

    “네!”

    이쯤 되자 다음에 나올 요리가 얼마나 훌륭할지 기대가 되었다. 테오가 입이 마르도록 자랑한 이유가 있었다.

    “한샘아, 음식이 입에 맞아?”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맛있지.”

    “다행이다.”

    “근데 저 로베르토 셰프가 요리사면서 여기 사장이라고 했지?”

    “응 오너 셰프라고 했으니깐 그런 셈이지 왜?”

    한샘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보통 직원들은 사장이 오면 긴장을 하잖아.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괜히 눈치 보이고.”

    “하하 그렇긴 하지. 근데 그게 왜?”

    “근데 여기 직원들은 그런 게 없어. 선배는 물론이고, 사장을 봐도 전혀 불편해하지 않더라. 심지어 사장한테 어깨동무까지 하더라니까.”

    “그래?”

    예의를 중시하고, 위아래 구분이 확실한 한국과는 다른 문화라서 그런 거겠지. 특히 호텔은 그런 구분이 좀 더 심할 테고.

    나는 음식이 신기했고, 한샘은 그런 직원들의 태도가 신기해 보였나 보다.

    “다음은 리조또입니다.”

    “오 리조또.”

    물론 피자도 맛있었지만 이탈리아까지 왔는데 정통 이태리 음식을 맛보고 싶었다. 로베르토의 리조또 실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훌륭할 거라 기대해 볼 수 있었다.

    “한국 사람들도 쌀 많이 먹죠? 우리 이탈리아 사람들도 은근히 쌀을 좋아하고 즐겨 먹어요. 이 리조또는 내가 제대로 된 정통 이탈리아식으로 만든 거니까 먹어 봐요.”

    “잘 먹겠습니다.”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로베르토는 다소 심심할 수 있을 정도로 무난한 요리를 가지고 나왔다.

    “쌀과 피쉬스탁, 그리고 치즈로만 맛을 낸 리조또예요.”

    역시 이탈리아 요리답게 많은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쉽게 끝나 버린 음식 설명조차 아쉽게 느껴졌지만 맛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

    “와아”

    리조또를 한입 맛보자 나와 한샘은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제대로 된 리조또는 숟가락이 필요 없다며 포크를 쥐여준 로베르토를 향해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진짜 들어간 재료가 그게 전부예요.”

    “진짜예요. 하지만 그 피쉬스탁과 치즈를 만드는 일에 정성을 쏟아부었지만요.”

    피쉬스탁은 생선 육수를 의미하고, 치즈는 숙성하는 데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비록 이 리조또는 금방 만들었을지 몰라도 그 준비 과정만큼은 절대 간단하고 쉬운 것이 아니었다.

    “쌀 요리하면 한국도 빠질 수 없는데 이 리조또는 정말 군더더기 하나 없이 완벽합니다.”

    “고마워요.”

    완벽에 가까운 리조또까지 맛을 보자 나는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한샘에게 잠시 기다려 달란 말을 남기고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나 갔다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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