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67화 (168/202)

167. 느낌이 좋은 곳

우린 들뜬 마음을 안고 물의 도시 베네치아로 향했다. 로마, 밀라노, 피렌체 등 가 보고 싶은 곳은 천지였지만 가장 가고 싶었던 도시는 나와 한샘이의 마음이 통했다.

“티브이에서만 보던 베네치아를 가게 되다니. 실감이 안 난다. 막 길에서 향기 나고 그런 거 아니야?”

“설마 그럴까 싶다가도 진짜 그럴 것 같기도 해.”

기차 안에서 엉덩이를 제대로 붙이지 못하는 한샘을 보고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짧게라도 시간이 날 때마다 해외여행을 계획해 볼걸, 하는 후회가 남았다.

하지만 후회는 해 봤자 또 다른 후회만 남을 뿐.

지금이라도 최선을 다해 주면 되는 것이다.

“기차도 우리나라 기차랑은 다르다. 호그와트로 가는 기차 같아.”

우리가 탄 기차는 그리 좋은 컨디션의 기차는 아니었지만 마치 유럽의 귀족들이 타고 내리는 기차처럼 고풍스러웠다.

의자는 딱딱하고, 방음도 제대로 되지 않아 시끄러웠지만 그것조차 우리에겐 낭만이었고, 추억이었다.

-이번 내리실 역은 산타루치아역입니다.-

“그 산타루치아가 여기였구나.”

베네치아의 산타루치아역에 도착한 우리는 드디어 로망 속 도시에 발을 내디뎠다.

도시 자체에서 꽃 내음이 날 거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여기저기 버려져 있는 쓰레기와 높은 습도 때문에 약간이 불쾌함이 먼저 느껴졌다.

“음….”

“…….”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겠지.

그러다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시간에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하하하하하.”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나 보다.”

“그런가 보다.”

꽃향기가 날 거라 생각한 것 자체가 촌스러운 일이었지만 우린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런 환상과 현실의 차이를 직접 겪어 보러 온 것이었으니까.

비록 첫인상은 기대 이하였지만 베네치아의 건물 하나하나, 바닥의 벽돌 하나하나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다.

“덕수야 나 이제 좀 배고프다.”

“맞지? 나도 배고파졌어.”

“그 친구분이 말한 레스토랑에 바로 가 볼까?”

“그럴까?”

테오가 알려 준 레스토랑은 같은 베네치아에 있었지만 조금 아껴 두려고 계획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의 첫 레스토랑만큼은 기대 이상이었단 느낌을 얻고 싶었다.

“대신 거기는 배 타고 좀 더 가야 하는데 괜찮지?”

“그래? 얼마나?”

“가까워. 금방이야.”

“그럼 참아 볼게.”

베네치아에서 수상 택시를 타야지만 갈 수 있는 부라노라는 작은 섬.

그곳에 테오가 알려 준 근사한 레스토랑이 위치하고 있었다.

“섬에서 또 섬으로 가는구나.”

“아담하네.”

부라노섬에 내리자 제법 시끌벅적하던 베네치아와는 다르게 잔잔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관광객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별다른 말 없이 미소를 머금은 채로 걷기만 했다.

나와 한샘이도 자연스레 손을 잡고 아무런 말 없이 목적지로 향했다.

가는 도중 몇 번 꼬르륵 하는 소리 때문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지만.

“자 여기야.”

“응? 여기?”

“테오가 알려 준 주소상으론 여기가 맞아.”

한샘이 놀란 이유는 이곳이 유명한 레스토랑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럴싸한 간판도 하나 없고, 들어가는 출입문 역시 낮고 작았다. 조금 덩치가 큰 사람들이라면 한참을 숙이고 들어가야 할 정도였다.

“역시 맛집은 어떻게 해 놔도 찾아온다 이 말인가.”

“그런가 보다. 나도 기대했던 거랑은 다르네.”

테오가 보여 준 사진과는 괴리가 느껴지는 실물이었다.

“일단 들어가 보자!”

“좋지!”

아주 약간의 실망감을 안고 출입문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레스토랑에 들어서자마자 실망감을 가졌다는 사실이 창피해졌다. 마치 나니아 연대기의 옷장으로 들어온 것처럼 다른 세상으로 연결된 것 같았다.

“와아….”

“우와 이거 뭐냐….”

“아니 문을 왜 저렇게 만들어 놓은 거야….”

작고 아담한 문이 애석하게도 레스토랑의 내부를 훨씬 넓고 쾌적했다. 몇백 년 전 그대로의 인테리어를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트렌디하고 세련되었다.

순식간에 나와 한샘이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사진이 거짓말이 아니었네.”

“덕수야 저기 좀 봐 봐.”

한샘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넓게 뚫린 테라스와 그 뒤로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선 익숙한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차르르르르르.

탁탁탁탁.

챙챙챙.

기름에 신선한 해산물이 볶아지는 소리, 쉴 틈 없이 두드려지고 있는 도마.

그리고 누군가 끊임없이 포크와 나이프를 씻어 내고 있는 소리까지.

익숙하면서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풍경을 보며 일을 할 수 있는 주방이라니.

그거야말로 판타지 그 자체였다.

“어서 오세요. 혹시 예약하셨나요?”

“아… 네. 테오의 소개를 받고 왔는데, 특별히 예약은 필요 없다고 해서요.”

잠시 레스토랑의 풍경에 빠진 사이 직원 한 명이 다가와 친절하게 우리 반겨 주었다.

제법 능숙한 영어로 직원의 말에 대답을 하자 한샘의 눈빛이 더욱 초롱초롱해졌다.

“덕수야 너 언제 영어가 이렇게 늘었어?”

“거기 일하는 분들이 다 외국어 전공자라서 안 배울 수가 없더라.”

“와아 대단하다. 볼 때마다 다른 사람이 되어 오네.”

한샘의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져 다시 한번 테오의 이름을 앞세웠다.

“이곳 셰프님의 친구분 소개를 받고 왔습니다. 셰프님께 좀 전해 주시겠어요?”

“그렇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직원은 주방으로 들어가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셰프로 보이는 사람 한 명이 밖으로 나왔다.

“반갑습니다 장덕수 셰프?”

“안녕하세요. 제 이름을 어떻게 알고 계시나요?”

“테오가 워낙 칭찬을 많이 해서 기억할 수밖에 없었어요. 저는 이곳에서 오너 겸 셰프를 맡고 있는 로베르토예요.”

“반갑습니다. 로베르토 셰프.”

이탈리아 사람들에 대한 소문은 사실이었다. 하나같이 전부 배우처럼 생겼다. 남자인 내가 봐도 로베르토 셰프는 방금 영화를 찍다 온 것 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한샘의 표정을 살폈다.

“바쁘지 않은 시간에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이런 세세한 센스 하나에 일류 요리사가 되느냐 마느냐 정해지는 거죠.”

“하하 과찬입니다.”

로베르토의 말대로 일부러 바쁜 시간을 피한 건 맞지만 나는 원래도 지인이 소개해 주는 곳을 갈 땐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을 한다.

그런 사례 중 하나로 테오는 이곳에서 공짜로 음식을 먹게 해 준다고 했지만 절대 그럴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웃돈을 주면 모를까.

“운이 좋게도 요즘 너무 많은 손님들이 찾아 주셔서 손이 모자라요.”

“네 들었습니다. 운이 좋게도라뇨. 이런 근사한 레스토랑에 손님이 찾아오는 건 당연한 일이죠.”

“요리사가 음식도 먹어 보지 않고 그런 말을 해도 됩니까? 하하.”

“먹어 보지 않아도 뻔하죠. 테오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 레스토랑인데 훌륭할 거라 생각합니다. 테오는 제가 생각하기에도 정말 실력 있는 요리사거든요.”

내 대답에 로베르토 역시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을 너무 오래 세워 뒀네요. 어서 앉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피크 타임은 지났지만 여전히 레스토랑에 손님은 많았다. 우린 로베르토의 배려 덕에 바닷가가 보이는 창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오 덕수야. 이런 자리는 예약을 해도 쉽게 못 잡을 것 같은데, 능력이 대단한데?”

“에이 내 능력이 아니라 테오 덕분이지.”

“그 테오라는 사람과 네가 친분이 있어서 그런 거잖아.”

굳이 반박하지 않고 슬쩍 웃어 주었다.

나 역시 이렇게 대접받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의 직원들은 친절했지만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한국에서 종종 과도한 친절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던 터라.

“드시고 싶었던 메뉴가 있습니까?”

“아니요 그런 건 없습니다. 이 레스토랑에서 가장 자신 있는 음식으로 해 주세요.”

“자신 있는 건 전부인데, 전부 다 드려 볼까요?”

“아… 아닙니다. 그럼 특별히 신선한 식재료가 있으면 그걸로 만든 메뉴 부탁드립니다.”

“탁월한 선택입니다. 오늘은 깔라마리가 좋으니 그걸로 만든 메뉴와 다른 건 제가 알아서 내어 드리겠습니다.”

“네 믿고 맡기겠습니다.”

로베르토의 말투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얼핏 들으면 허세로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기대보다 훨씬 훌륭한 요리가 나올 것 같았다.

테오의 칭찬이 아니어도 아주 훌륭한 레스토랑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한샘아 어때?”

“너무 좋아. 이런 곳에서 일하면 하루하루가 즐겁겠다.”

“에이 설마. 여기도 직장이라고 생각하면 금방 질리고 짜증 날걸?”

“정말 그럴까?”

“그럴 거야.”

한샘은 이곳에 들어온 뒤 한시도 고개를 가만히 두지 못하고 있었다.

천장부터 바닥, 선반에 올려진 소품은 물론이고, 직원들의 표정까지 하나하나 쳐다보고 있었다.

“근데 여기 직원들 표정이 너무 좋아.”

“응?”

“아니. 직장이라 생각하면서 오래 일하고 있는 이 레스토랑 직원들이 표정이 너무 좋아.”

한샘의 말을 듣고 다시 둘러보니 정말 그랬다.

점심시간 동안 엄청난 손님들을 받고 기진맥진해져 있을 시간이지만 직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웃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억지로 웃는 것이 아니라 아주 밝게.

“레스토랑이 생각보다 덜 바쁜가….”

“그럴 리가. 지금 손님이 있는 테이블만 해도 제법 되는데?”

한샘의 의문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주 훈련이 잘되어 있는 직원이거나 유럽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크게 가지고 있다는데 그런 걸 수도.

“우리 호텔 사람들은 억지로 웃으면서 일하는데… 유명한 관광지에서 일을 해서 그런가?”

“그럴 수도 있지.”

우린 해답을 찾는 걸 포기하고 본래 목적에 집중하기로 했다.

여행의 본질에 좀 더 집중하기.

“그냥 맛있는 음식이나 먹고 즐기자. 머리는 나중에 쓰고.”

“그래 첫날부터 이게 무슨 직업병이냐. 이렇게 멀리까지 왔는데.”

우리 둘은 자세를 좀 더 편하게 고쳐 앉았다.

마침 그때 직원 한 명이 와인 하나를 가지고 왔다.

“저희 와인 안 시켰는데요?”

“셰프님이 한 병 서빙하라고 했습니다. 이태리 음식을 먹으면서 와인을 마시지 않는 건 범죄라고 전해 달랍니다.”

“하하 그렇군요. 굳이 범죄를 저지를 필욘 없죠. 안 그래도 한 병 시킬까 생각 중이었어요.”

음식이 나오기 전에 로베르토 셰프가 추천한 와인을 먼저 맛볼 수 있었다.

직원은 우리를 앞에 두고 와인의 라벨과 빈티지 그리고 코르크를 확인시켜 주고, 냄새까지 맡게 해 주었다.

“어때요? 냄새 좋죠. 이 와인 정말 최고예요. 너무 달지도 쓰지도 않은 이 카카오 냄새.”

“네? 아 네.”

“저도 이 와인 제일 좋아하는데 식전에 두 잔 정도 충분히 마시는 걸 추천해요. 한 잔은 아쉽고, 세 잔부터는 배부르거든요.”

와인을 서빙해 주는 직원은 마치 자신의 친구에게 소개를 하듯 설명을 해 주었다.

정숙하고, 매너 있게 와인을 설명해 주는 호텔의 서비스와 달리 조금은 친근하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근데 저 직원 우리랑 이미 친한 사이 같더라.”

“그러니까. 난 덕수 네가 저 사람이랑도 친분이 있는 줄.”

“나도 유럽이 처음인데 무슨 친분이 있겠어?”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전혀 불쾌하진 않았다.

직원의 말대로 이 와인의 도수는 그리 높지 않고, 달지 않아 식전에 가볍게 마시기에 좋았다.

“맛이 가벼워서 진짜 두 잔 정도는 마셔도 좋겠다.”

“적당히 산미도 있고, 식전에 먹기에 좋은 와인 맞는 거 같네.”

와인을 마시자 설명해 준 직원의 말이 100% 이해가 되었다. 너무 정확한 설명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덕분에 위장은 적당히 운동을 시작했고, 알코올이 들어간 덕에 온몸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더 배가 고파졌다는 의미였다.

그때였다.

한참 음식을 만들던 로베르토 셰프가 다시 홀에 나와 우리에게 다가왔다.

“미스터 장.”

“네?”

“미안해요. 앞에 밀린 주문이 좀 남아서 음식 나오는 시간이 걸리네요.”

“괜찮습니다. 와인도 있고, 식전 빵도 있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훌륭한 요리를 위해서라면 허기짐은 얼마든지 참아 줄 수 있었다. 한샘 역시 음식 외에도 구경거리가 많은 듯했고.

괜히 신경을 쓰는 로베르토 셰프를 안심시켰다.

“미스터 장. 그러지 말고 우리 주방 구경 한번 해 볼래요?”

“네 주방이요? 제가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신의 주방을 선뜻 보여 주겠다는 로베르토 셰프.

놀랐지만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런 과한 호의도 테오 덕분이란 걸 잘 알고 있었고.

하지만 맘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덩그러니 혼자 남겨질 한샘.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한샘이 먼저 말을 꺼냈다.

“갔다 와. 나도 여기서 볼 게 많으니까. 그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는 걸 덕수 네가 더 잘 알잖아.”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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