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66화 (167/202)
  • 166. 유럽

    회귀하기 전엔 일터마저 같아 하루 종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일 년에 한 번 보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의 인연은 운명으로 얽혀 있는지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다.

    “이야 파나르 대통령이 직접 덕수 네 이름을 거론한 거야?”

    “응 어쩌다 보니 내 이름만 알고 있어서.”

    “어쩌다 보니라니. 네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는 다들 알 텐데.”

    “모두가 다 고생하는 거지.”

    “겸손은 적당히 떠시지요. 어쨌든 최초로 한국 대통령이 파나르에 방문하는 거면 너도 대단한 일을 한 거지.”

    한샘의 목소리엔 나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 찜찜함을 떨칠 수 없었다.

    “근데 한샘아 요새 별일 없어?”

    “별일? 없지. 아무것도 없어. 너무 아무 일도 없어서 문제지 하하.”

    “별일 없는 게 제일 좋은 거지.”

    인생을 살아 보니 아무 일 없이 사는 게 가장 좋긴 하지만 너무 늙은 사람처럼 대답한 것 같았다. 한샘이가 무탈하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내가 아는 한샘이는 욕심이 많이 사람이었다.

    “그냥. 주방장님도 외국 주방을 경험해 보고 싶으시다고 발령 신청하시고, 덕수 너도 해외에서 점점 더 대단한 일을 해내는데 나는 호텔 카페에 맨날 처박혀서 이러고 있어서….”

    “호텔 카페에 처박혀서라니. 남들은 그 호텔 들어가고 싶어서 난리인데.”

    “그렇긴 하지만….”

    한샘은 자신의 상황이 나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씁쓸함을 숨기지 못했다. 이런 말을 하는 날은 대게 진상 손님을 만났거나 일이 너무 힘들었던 날이 대부분이었다.

    “요즘 많이 바쁘지? 손님들도 짜증 나고.”

    “…….”

    한샘은 내 물음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떤 상황이라도 능숙하게 해결했겠지만 마음의 상처까진 어쩔 수 없었을 거다.

    “뭐 항상 있는 일이야. 항상….”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잘하고 있다는 의미니깐 힘내자!”

    “그래 고마워. 퇴근하고 나서도 일 얘긴 그만하자.”

    “그래 그러자!”

    한샘은 애써 목소리 톤을 높였다.

    “근데 덕수야 우리 안 본 지 너무 오래됐다. 보고 싶어.”

    “맞아 나도 너무 보고 싶어. 그러고 보니 내가 전화한 이유가 그거였는데.”

    “뭔데?”

    한국으로 들어가는 김용수 대사와 김준우 서기관을 따라 나도 한국에 다녀올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 소식을 전해 주려고 한샘에게 연락한 거였다.

    이제 주방장님도 없으니 한국에선 한샘이 말곤 특별히 만날 사람도 없었다.

    “나 이번에 한국 들어가려구.”

    “오 정말? 얼마나?”

    “음 최소 1주일은 휴가 낼 수 있고, 좀 더 길게도 가능해.”

    김용수 대사의 일정을 따른다면 1주일간 휴가를 쓸 수 있지만 좀 더 길게 휴가를 갈 수도 있었다.

    “마침 잘됐다. 우리도 연차 소진해야 해서 여태 밀렸던 거 써야 하거든.”

    “정말?”

    호텔처럼 불규칙한 스케줄 근무를 하는 회사들은 연차가 있어도 제대로 쓰질 못한다. 그래서 모아 뒀다가 휴가철이나 비성수기에 몰아 쓰곤 한다.

    “나도 일주일 넘게 쉴 수 있을 거야. 우리 일정 맞춰 보자!”

    “오예 너무 좋다.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시간 보내는 게 처음이잖아 우리.”

    “그러니까. 뭐 하지?”

    그러게. 뭘 하지?

    갑자기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한샘과 보내려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냥 하루 종일 얼굴이나 보며 쉬어도 좋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조금 아까웠다.

    한샘이나 나나 회귀 전에도 일만 하느라 제대로 쉬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 그냥 쉬는 날엔 늦잠이나 자거나 근처로 드라이브 정도 가는 게 전부였다. 물론 그것도 소중한 시간이었지만.

    “혹시 하고 싶은 거 있어? 여태 미뤄 뒀던 거나 꼭 가 보고 싶었던 곳이라든가.”

    수화기에선 한참 동안 숨소리만 들려왔다.

    나는 한샘이 충분히 고민할 수 있도록 보채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나 사실 꼭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어.”

    “정말? 어딘데?”

    “좀 멀어.”

    멀어 봤자 한국 안이지.

    거대한 국토를 가진 파나르에 지내다 보니 한국에서 이동하는 건 우스웠다. 파나르는 인근 도시로만 가려 해도 7~8시간은 거뜬했으니까.

    “뭔가 이번이 아니면 못 갈 것 같아서. 몸도 마음도 시간도 될 때가 다시는 안 올 거 같네. 덕수 네가 허락한다면 같이 갈 사람도 있고.”

    “난 거기가 어디든 같이 가 주지. 그래서 거기가 어딘데?”

    “유럽.”

    이번엔 내가 한동안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서울에서 부산이나 고향인 제주 정도 생각을 했었는데.

    뜬금없이 유럽이라니.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한샘의 말대로 이번이 좋은 기회인 건 맞았다.

    “유럽 여행 한번 해 보고 싶어. 요즘 친구들 다 유럽 한 번씩 다녀오는데 부럽더라.”

    “유럽… 좋지.”

    좋다는 말을 익히 들었지만 나 역시 한 번도 가 본 적 없었다.

    “그리고 나도 다른 나라에 가서 보고 배울 게 많을 것 같아. 한국에선 다른 호텔이나 레스토랑 많이 가 봤거든. 덕수 너도 요리 공부할 수 있지 않아? 유럽엔 미슐랭 레스토랑이나 유명한 아시아 레스토랑들도 많을 거 아니야.”

    맞다. 유럽엔 훌륭한 레스토랑이 지천에 깔려 있었다.

    게다가 얼마 전 테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굳이 일을 하지 않더라도 배울 게 많을 거라는 레스토랑.

    이직 제안보다 그 말에 좀 더 흔들렸던 게 사실이었다.

    “솔직히 H호텔에서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웠거든. 맨날 똑같은 일상이고, 이런 식으로 살다간 내 인생에 반전은 없을 것 같아.”

    한샘의 한마디가 가슴속 깊숙이 박히는 느낌이었다.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소위 말하는 ‘각’이 보인다. 내 미래가 대충 어떤 모습일지.

    H호텔은 누구나가 부러워할 만한 특급 호텔이지만 이대로 이곳의 월급쟁이로 산다면 내 인생에 극적인 반전은 없을 것이다.

    물론 깜짝 승진이나 제법 쏠쏠한 성과금 받는 일 정돈 겪을 수 있겠지. 운이 좋으면 재벌이나 유명인들의 개인 요리사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주 특이한 케이스가 아니라면 내가 예상하는 범위 안에서 시간만 흘러갈 것이다.

    한샘은 그렇게 살기엔 아쉬웠을 것이다.

    “아직 서른도 안 됐잖아 우리. 여기서 정년 퇴임하려면 25년이나 더 넘게 일해야 해.”

    “하… 그렇게 생각하니깐 엄청 길다.”

    “그래도 덕수 너는 과감하게 파나르에도 가고 앞으로 청와대 요리사가 될 거란 꿈을 가지고 있잖아.”

    “그거야 그냥 꿈이니까.”

    “난 그런 꿈조차 없어. 고작 정년 퇴직하는 게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하니 너무 창피하다.”

    오늘 밤 한샘의 감성은 최대치로 폭발한 것 같았다.

    “나보다 나이 많고, 가정까지 있는 김상현 주방장님도 도전을 택했는데 나도 뭔가를 해 보고 싶어.”

    “…….”

    “난 결국 여기서 계속 일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경험해 보고 시야라도 넓혀 보고 싶어. 알고 안 하는 거랑 모르고 안 하는 거랑은 천지 차이잖아.”

    “그렇지.”

    한샘은 자기 말대로 결국 호텔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입버릇처럼 호텔만 한 직장이 없다고 말을 하던 한샘이었다. 일이 질리고, 종종 고비도 있지만 한샘은 결국 호텔에서 정년 퇴직을 할 것이다. 그만큼 능럭도 출중하고, 성실했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론 한샘의 말대로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해 볼 필요도 있었다. 오히려 환상 속에 있던 유럽의 호텔이나 레스토랑도 별거 없다는 걸 느끼게 되면 더 수월하게 일을 할 수도 있다.

    “나랑 유럽 가자 덕수야! 혼자는 조금 무섭고, 네가 같이 가 주면 너무 좋을 것 같아.”

    “음….”

    잠시 생각해 봤지만 나에겐 그리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래! 가자. 어차피 한샘이 너 보러 한국 가는 건데 유럽에서 만나면 더 좋지.”

    “정말? 오예 나도 유럽 간다!”

    통화를 하는 내내 다운되어 있던 한샘의 목소리가 이제야 밝아진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나 역시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 * *

    김용수 대사는 조금이라도 긴 출장이 잡힐 때면 항상 나를 먼저 배려해 주었다.

    어떻게든 많이 쉴 수 있도록 미리미리 일정을 공유해 주었다.

    “그래서 저랑 김준우 서기관은 다음 주 월요일에 한국으로 들어갈 거예요.”

    “생각보다 빨리 출발하시네요.”

    “굳이 미룰 거 없죠. 빨리 가서 일정 잡고 준비하는 게 좋을 테니까요. 장 셰프는 어떻게 할 거예요?”

    김용수 대사는 나도 한국으로 갈 거라 생각한 것 같았다. 내 대답을 듣곤 다소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

    “저는 유럽에 다녀오려구요.”

    “유럽이요? 갑자기?”

    개인적인 재미를 위해 뭔가를 하지 않던 내가 유럽으로 여행을 간다니 흥미가 생긴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깊이 캐묻지 않았을 텐데 오늘은 이것저것 묻는 김용수 대사였다.

    “여자 친구가 꼭 한 번 유럽에 가 보고 싶다 해서요. 둘 다 좋은 호텔이나 레스토랑도 가 보면서 공부할 수 있어서 이참에 가 볼까 합니다.”

    “하하 장 셰프는 정말 대단하네요. 본업도 이렇게 잘하면서 장거리 연애도 척척이네요. 정말 대단해요.”

    쑥스러움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주 좋은 선택이에요. 젊을 때 견문을 넓히는 건 정말 중요해요. 유럽 여행이 처음이라면 한 2주 정도 푹 쉬면서 많이 둘러보고 와요.”

    “그래도 되나요?”

    “당연하죠. 맘 같아서 경비라도 보태 주고 싶은데, 그건 장 셰프가 부담스럽겠죠?”

    “네 괜찮습니다. 경비 정도는 충분합니다.”

    “둘 다 열심히 살았을 테니까요. 끼리끼리 만났을 테니 장 셰프의 여자 친구분도 얼마나 열심히 산 사람일지 짐작이 가네요.”

    김용수 대사의 말에 나는 자랑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샘이도 날 만나 정말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노력하며 살았다.

    나 혼자만의 만족이겠지만 이번 삶에서라도 함께 유럽 여행을 갈 수 있게 되어 맘이 조금은 편해졌다.

    “여자 친구분한테 좋은 곳, 맛있는 곳 많이 구경시켜 주고, 많은 거 배우고 와요.”

    “네 대사님도 한국에서 좋은 성과 있길 바라겠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지고 각자의 목적지로 떠났다.

    한샘은 인천에서, 나는 파나르에서.

    비록 출발은 함께하지 못했지만 각자 캐리어에 설렘을 가득 담고 유럽 여행의 중심지 이탈리아로 향했다.

    * * *

    로마 레오나르도 다 빈치 국제공항.

    이탈리아에 먼저 도착한 나는 이미 4시간째 한샘의 비행기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관용 여권 덕에 기다림 없이 공항을 통과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처음 겪어 보는 유럽의 풍경이었지만 이상하게 어색하지 않았다. 파나르에서 제법 오래 살아서 그런지 낯선 외국 문화는 어떤 것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탈리아의 첫인상도 모든 게 낯설었지만 또 모든 게 새롭고 아름다웠다. 심지어 쓰레기통에 버려진 물통마저도 독특해서 이뻐 보였다.

    -입국장-

    한국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도착했다는 정보가 전광판에 나타났다. 나는 곧바로 입국장 앞에서 눈을 부릅뜨고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면 한샘을 놓칠 것 같아서.

    “덕수야!”

    “한샘아!”

    몇 달 만에 만난 우리는 서로의 이름만 한 번 외친 후 뜨겁게 껴안았다.

    낯선 외국 땅에서 반가운 사람을 만나서 그런지 더욱 감정이 벅차올랐다.

    “잘 지냈어?”

    “너는 잘 지냈어?”

    하루도 빠짐없이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우린 가장 먼저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우린 당연하다는 듯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서로 손을 맞잡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고생은 무슨. 비행기 안에서도 너무 신났었어.”

    “그럼 다행이지. 근데 아직 갈 길이 멀어.”

    “그렇지? 거기까지 가려면 버스 타야 하나?”

    “아니 기차 타면 돼.”

    테오가 알려 준 레스토랑은 마침 한샘이가 가장 가 보고 싶었던 도시 안에 있었다.

    나는 당연히 그곳으로 숙소를 예약했다.

    “가 보자 베네치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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