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64화 (165/202)
  • 164. 대통령실

    전화를 건 상대의 정체를 알게 되자 김용수 대사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몇 년간 부지런하게 활동을 했지만 파나르 대통령과 연결된 건 처음이었다.

    김용수 대사는 헛기침 몇 번을 내뱉은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무슨 일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태연한 척했지만 김용수 대사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바누스 장관님과 얼마 전에 같이 식사를 하셨죠?

    -네? 그렇긴 합니다만….

    그날의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마무리도 깔끔했고 바누스 장관 역시 기분 좋게 돌아갔다. 별일이 아닐 거란 걸 알면서도 괜히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그날 만찬의 메뉴.

    부임할 때 빼곤 여태 아무런 연이 없었던 파나르 대통령실에서 갑자기 연락이 온 것도 조금은 수상했고, 공교롭게도 바누스 장관이 왔다 간 다음이라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저희 대통령님께서 한국 대사관 분들의 얼굴을 한번 뵙고 싶으시다는데 시간이 괜찮으실까요?

    -네? 저희 대사관 직원 전부요?

    -네 특히 요리사도 한 분 계시죠? 외교관들은 물론이고 행정 직원들과 요리사님도 꼭 포함해서 오셨으면 합니다.

    -저희 요리사까지요?

    -네 그렇습니다.

    대통령실에서 외교관도 아니고 요리사까지 찾는 걸 보면 만찬 메뉴에 문제가 있었던 게 확실해 보였다.

    설마설마했는데 이 철 지난 문화 때문에 문제가 생길 줄이야….

    김용수 대사는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본인 선에서 막을 수 있는 문제라면 그러고 싶었다.

    -혹시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저희 직원들이 전부 자리를 비우려면 대사관 운영 일정을 변경해야 해서요.

    -아! 그렇군요. 저희 대통령님께서 김용수 대사님과 협의하실 안건이 있으시답니다.

    -저랑요? 그럼 다른 직원들은 왜 전부 부르시는 거죠?

    -자세한 건 저도 잘 모르지만 다른 직원분들껜 감사함을 전하고 싶으시다고 전해 달라 하십니다.

    -후우.

    김용수 대사는 자기도 모르게 제법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그런 사소한 일로 대통령실에서 직접 시비를 걸어올 리가 없지. 김용수 대사는 괜히 창피해져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바누스 장관님이 저희 대통령님께 한국 대사관 칭찬을 많이 하면서 꼭 한번 만나 보시라고 제안을 하셨거든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모든 직원들이 훌륭하지만 특히 요리사님은 절대 빼지 말고 만나 보라고 강력하게 말씀을 하셔서요. 빠른 시일 내에 일정을 잡아서 방문 가능하실까요?

    -물론입니다. 추후 일정을 조율해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김용수 대사는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며 전화를 내려놓았다.

    주파나르 한국 대사로서 부임할 때를 제외하고 대통령을 만나게 된 건 아주 긍정적인 일이었다.

    * * *

    파나르 대사관 관저.

    김용수 대사는 퇴근하자마자 날 앉혀 놓고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풀어놓고 있었다. 자랑인 듯 하소연인 듯 애매한 말투였다.

    “갑자기 대통령실이라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러니까요. 속으론 좀 찔리셨던 거 아니십니까?”

    “하하 맞아요. 처음엔 그 만찬 메뉴 때문에 우리 직원들을 다 불러서 추궁하려는 거 아닌가 걱정했어요.”

    “그럼 저희는 역모죄로 잡혀가는 건가요?”

    “그 짧은 순간에 이렇게 좋은 말로 회유해서 감옥에 보내려는 건가까지 생각했다니까요.”

    “하하하 대사님 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웃고 있었지만 나 역시 갑자기 대통령실에 전화가 오면 당황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우리가 저질렀던 만행(?)도 있었으니.

    도둑이 제 발 저렸던 거지.

    “그래서 언제 방문을 하실 건가요?”

    “공적인 일이긴 하지만 최근에 민원인들이 많아서 대사관 전체를 쉬는 건 곤란해요. 대통령실에서 주말도 괜찮다 했으니 다 같이 주말에 방문하고, 평일에 번갈아 가며 쉬도록 해요. 괜찮죠?”

    “네 저는 괜찮습니다.”

    김용수 대사는 최근 늘어난 민원인에 부쩍 애정을 쏟고 있었다. 자국민에게 가장 불친절한 해외 공관이라는 이미지를 반드시 탈피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행동이었다.

    실제로 인터넷에 등록된 파나르 대사관의 평점은 느리지만 꾸준히 올라가고 있었다.

    “장 셰프는 나와 일정 맞추면 되니깐 따로 묻지 않고 잡아 볼게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김용수 대사의 저녁 밥상을 차려 준 뒤 퇴근 준비를 했다.

    “내일은 주말인데 뭐 해요?”

    “프랑스 대사관 요리사 테오를 기억하십니까?”

    “그 미슐랭 레스토랑 출신이라는 셰프요?”

    “네 맞습니다. 내일은 테오를 만날 생각입니다. 이번 만찬 아이디어를 테오가 줬거든요. 고맙다는 말도 전하고, 마침 테오도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해서요.”

    “역시 주말까지 바쁜 외교관이군요. 저는 아무 일정도 없는데.”

    김용수 대사는 그런 내가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근데 둘이 만나면 어떻게 대화해요? 파나르어?”

    아… 주말에도 바쁜 일정이 있다는 것이 신기한 게 아니라 서로 어떻게 대화를 하는지가 궁금한 거였구나. 그럴 만도 했다.

    김용수 대사가 보기엔 내 외국어 실력이 모자라 보였을 테니.

    “테오와는 영어로 대화합니다.”

    “이야 영어까지요? 진짜 외교관이네요. 이번에 보니 파나르어도 꽤 많이 늘었던데.”

    “하하 대사님에 비하면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열심히 하는 중입니다.”

    파나르 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외국어로 관심이 생겼다.

    한국에서 근무할 때 느끼지 못했는데 해외 공관에서 일을 하다 보니 다들 영어는 기본이고, 제2 외국어 하나쯤은 유창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윤아는 물론이고, 안지용 참사관, 김준우 서기관, 예민희 서기관 그리고 카리나까지.

    전부 외국어 능력자들이라 나 역시 자연스레 외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외국어까지 장착하면 그 요즘 말로 정말 사기캐가 되겠군요.”

    “사기캐요? 제발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테오를 만나면 내가 고마워했다는 것도 전해 줘요. 다음에는 우리 관저에 꼭 한번 초대하겠다고도요.”

    “네 알겠습니다.”

    호텔에 있을 때도 외국 셰프들과 일할 기회가 제법 있었는데 그땐 영어를 더 깊이 공부해야겠단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짧은 영어였지만 주방에서 소통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아주 조금 능숙해졌을 뿐인데 훨씬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많은 기회가 생긴 느낌이었다.

    * * *

    다음 날 J&J 분식.

    조용하고 더 분위기 좋은 곳도 많은데 테오가 굳이 이곳에서 만나자고 하는 바람에 여기로 왔다.

    “헤이 덕수. 잘 지냈어요?”

    “어서 와요 테오. 덕분에 잘 지냈어요. 테오는요?”

    “저는 정신없이 바빴죠. 덕수도 바빴죠?”

    “그렇죠.”

    테오는 언제부터인가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조금 어색한 발음이었지만 노력해 주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 레스토랑 규모가 엄청 나네요. 이런 곳의 메뉴 개발을 직접 했다니. 대단해요 역시.”

    “미슐랭 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의 셰프가 한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게다가 여긴 분식이라고 해서 간편한 메뉴들뿐이에요.”

    “내가 일하던 레스토랑은 이렇게 크지 않아요. 이렇게 큰 곳에서 문제없이 팔리는 메뉴 구성을 짜는 것도 쉽지 않아요.”

    서로 칭찬을 몇 번 주고받은 후 간단하게 주문을 했다. 물론 계산은 아이디어를 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내가 했고.

    “테오가 알려 준 아이디어 덕에 이번 만찬을 잘 끝낼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그게 무슨 나 때문이에요. 그냥 말 한마디 한 것뿐인데.”

    “여튼 고마워요. 근데 테오는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절 보자고 했어요?”

    어색한 젓가락질로 떡볶이와 김밥을 먹던 테오가 말했다.

    “좋은 제안 하나를 할까 해서요. 덕수한테.”

    “제안이요? 무슨 제안이요?”

    테오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 하나를 나에게 보여 줬다.

    사진 속에는 유럽으로 보이는 레스토랑 하나가 담겨져 있었다.

    “여기 어때요?”

    “어떻다뇨?”

    “가게 이쁘죠?”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나 역시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곧바로 다음 사진을 보여 주는 테오였다.

    “이 레스토랑 주방이에요. 일하기 진짜 좋아 보이죠?”

    테오가 보여 준 주방은 내가 일했던 호텔보다 널찍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그리고 가장 맘에 드는 건 커다란 창문이 있다는 것.

    이런 창문은 주방에서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다. 더군다나 호텔의 주방에선 더욱 불가능했다.

    경치가 좋은 곳을 굳이 직원에게 양보할 리 없으니까.

    “주방에 큰 창문이 있는 게 진짜 마음에 드네요. 여긴 어디예요? 테오가 예전에 일하던 곳이에요?”

    “아니요. 근데 저도 이런 주방에서 한번 일해 보고 싶긴 해요.”

    “응? 테오 정도면 유럽에서 가고 싶은 레스토랑은 다 갈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실력은 물론이고, 경력도 모자랄 게 없는 테오였다. 프렌치 요리를 하는 곳이라면 전 세계 어느 레스토랑에서도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긴 한데 저는 여기가 좋아요. 이제 적응을 좀 하고 나니깐 너무 재밌어요.”

    “다행이네요. 처음엔 많이 힘들어하더니.”

    “덕수랑 다른 친구들이 많이 도와준 덕이죠. 선배님들 덕입니다.”

    “선배라뇨.”

    “여기 온 지 2년이나 지났으니 한참 선배죠.”

    “하하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지만 저도 아직 멀었죠.”

    “그래서 말인데 2년 정도 한 곳에서 일했으면 다른 곳으로 옮겨 볼 생각 없어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테오가 근사한 레스토랑의 사진을 먼저 보여 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탈리아에 위치한 그 레스토랑에선 젊고 실력 있는 요리사들을 구하고 있었다.

    “여기 오너 셰프가 나랑 같이 공부했던 친구인데 동양 요리에 관심이 아주 많아요.”

    “아시아 요리에요? 특이하네요. 유럽 요리사들은 자기 나라 음식에만 관심 있는 줄 알았는데.”

    테오는 겸손했지만 대부분 서양의 요리사들은 동양 음식을 조금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솔직히 아시아의 음식들이 훨씬 기술적이고, 다양한 조리법을 이용하는데 그건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미슐랭 스타가 권위를 많이 잃어버린 것도 아시아 요리를 대놓고 무시하는 평가 기준 때문이었다.

    “이 친구는 절대 그러지 않아요. 아시아 요리가 유럽 요리보다 훨씬 기술적이란걸 진작부터 알고 있던 친구예요.”

    “제대로 공부했네요.”

    “그래서 말인데 덕수. 여기서 일해 볼 생각 없어요? 아주 좋은 기회인데.”

    “제가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잠시 멍해졌다.

    “이미 미슐랭 스타도 3개나 받았던 적 있는 곳이고, 꾸준히 다양한 아시아 음식들을 선보이고 있어요. 지금까진 주로 일본 음식이었지만 내 친구는 메뉴의 종류를 좀 더 다양하게 구성하고 싶어 해요.”

    “…….”

    “덕수만큼 어리고 실력을 갖춘 요리사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어요. 가끔 제이미 올리버같이 실력 있는 천재가 나오긴 하지만 그 나이에 덕수처럼 주방을 지휘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은 없어요.”

    희대의 천재 제이미 올리버까지 들먹이며 나를 치켜세워 주는 테오였다.

    “근데 저는 아직 여기를….”

    “쉿! 아무 대답도 하지 마요.”

    “네?”

    “아직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마요. 일단 직접 이곳에 가서 음식을 먹어 본 후에 뭐든 결정해 봐요.”

    “이탈리아에 있는 레스토랑을요?”

    테오는 자신 있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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