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63화 (164/202)

163. 만찬의 비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나와 김용수 대사는 움찔했다.

“물론 두 사람이 커다란 영향을 준 것도 맞지만 예전부터 대통령직엔 관심이 있었어요. 다만 내가 은퇴하기 전에 기회가 올지 안 올지가 걱정이었죠.”

20년 넘게 한 사람이 독차지하고 있던 대통령 자리가 곧 공석이 될 예정이었다. 유례가 없던 큰 기회이긴 했지만 한편으론 진한 독이 담긴 잔이기도 했다.

“파나르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건 현 대통령님의 역할이 굉장히 컸습니다. 그건 국민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동감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오랫동안 그 자리를 독식한 탓에 젊은 사람들의 반발이 심해지고 있어요. 이번이 스스로 물러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예요.”

바누스 장관은 씁쓸하게 말했지만, 말투에서 존경심이 느껴졌다.

“그래서 다음 대통령은 그 누가 되든 지금 대통령님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힘들 거예요. 뭘 하든 반대 세력이 많을 거고, 고통스러울 겁니다.”

“근데… 왜.”

“두 번째 대통령은 비록 노력에 비해 인정받지 못하겠지만 차기, 차차기는 점점 수월해지겠죠. 다른 후보들보다 나이 많은 제가 그 두 번째 역할을 짊어지려 합니다. 그들은 아직 젊고, 능력이 있거든요. 이렇게 소비하기엔 너무 아까워요.”

바누스 장관이 대통령직에 출마한 이유는 언론에서 알려진 것과는 달랐다. 과하게 표현한 언론은 늙은 호랑이가 아직도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라고도 표현을 했고, 대부분 과한 욕심이라는 평이 많았다.

하지만 바누스 장관은 그런 평가 따윈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이라는 허울만 보고 달려드는데 아마 버텨 내지 못할 겁니다.”

“그렇겠죠.”

“김용수 대사님도 이곳에 부임하실 때 아무도 지원한 사람이 없어서 오시게 된 거죠? 위험한 곳이니 퇴직까지 하신 분을 부른 거겠죠.”

“네 그렇습니다.”

“장 셰프님도 마찬가지구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나르의 대통령직도 김용수 대사님 자리와 똑같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위험성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정도겠죠.”

“…….”

바누스 장관은 젊고 능력 있는 정치인들을 위해 자신이 똥물을 뒤집어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는 그저 방패막이만 해 줄 생각은 아닙니다. 예전에 김용수 대사님이 해 주신 말이 기억나네요.”

“제가요?”

“이곳에 부임을 할 때 한국 대통령님이 3년만 버텨 달라고 했다면서요.”

“그렇습니다. 그땐 3년을 버티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으니까요.”

그랬었지. 나에게도 그저 김용수 대사를 잘 도와주라고 했었다.

뭔가 성과를 원한다거나 바라는 것이 있는 말투는 전혀 아니었다. 그저 버텨 달라라는 게 전부였다.

“그렇지만 지금 두 분의 모습을 보세요. 그저 버티기만 한 사람입니까? 대사님의 성과는 말할 것도 없고, 외교관도 아닌 요리사가 파나르에서 스타라고 할 정도로 유명해졌습니다.”

“아… 아니 그 정도까진.”

“그것도 2년 만에.”

작은 한마디라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바누스 장관의 결심은 굉장해 보였다.

“제가 혹시나 대통령이 된다면 두 분들처럼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이제 두 분 다음으로 부임할 파나르 한국 대사와 요리사는 안정된 상황에서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의 왕 중에 이방원이라는 사람이 있죠?”

“어떻게 그것까지 아십니까?”

역시 외교부 장관의 짬을 무시할 순 없었다. 타국의 몇백 년 전 왕 이름까지 알고 있을 정도.

“이방원의 아들이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세종대왕이구요. 기록된 업적은 세종대왕이 압도적일지 몰라도 그런 성과를 낼 수 있게 제대로 판을 깔아 준 왕이 이방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맞나요?”

“네 맞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파나르에도 세종대왕 같은 사람이 태어나길 바랄 뿐입니다.”

바누스 장관의 애국심은 상상 이상이었다.

장관의 자리를 오래 유지한 건 분명 좋은 자리기도 했지만 파나르를 위해서인 것도 분명해 보였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한국도 파나르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나는 뭔가에 이끌리듯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준비한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바누스 장관의 결연하던 표정은 달콤한 디저트 앞에서 스르르 풀어졌다.

“마지막으로 준비한 디저트입니다.”

“이건 모양이 참 독특하네요. 이 음식은 이름이 뭔가요?”

“이 음식은 매작과라고 합니다.”

“매작과?”

“밀가루를 반죽해서 튀기고, 계피와 생강 그리고 꿀로 만든 시럽을 끼얹어서 만든 음식입니다.”

“호오.”

“꿀은 마누카꿀을 사용했습니다.”

“마누카꿀이요? 그건 굉장히 구하기 어려운 건데 어떻게 구했어요?”

역시 명성에 맞게 굉장히 어려웠다. 꿀 전문점이란 전문점은 전부 돌아다녀 봤지만 구할 수 없었다.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에겐 이런 문제를 손쉽게 해결해 줄 사람이 있었다.

“알렉스에게 부탁해서 조금 구했습니다.”

“알렉스요? 허허허 그 사람이라면 이 귀한 마누카꿀을 쌓아 놓고 먹을 사람이죠. 근데 이걸 공짜로 내어 주던가요?”

“그럴 리가요. 알렉스의 생일에 한 번 더 와 준다는 약속을 하고 얻어 왔습니다.”

알렉스는 자신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는 요리사 중 한 명으로 와 달라는 의미였겠지만 나는 손님으로 갈 생각이었다. 손님인지 요리사로인지 정확하게 말을 안 한 알렉스의 잘못이지.

“그럼 장 셰프님 차 한 잔도 부탁드려도 됩니까? 이 디저트는 아무래도 차를 곁들여야 어울릴 것 같네요.”

“물론입니다.”

바누스 장관은 반짝반짝 마누카꿀이 코팅된 매작과를 입에 넣었다. 그리곤 역시 예상했던 맛이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작과를 한번 맛본 바누스 장관은 접시의 바닥이 보일 때까지 포크질을 멈추지 않았다.

“휴우 배가 터질 것 같군요.”

“맛있게 드셨습니까? 장관님.”

길었던 만찬이 끝이 났다.

바누스 장관은 의자에 반쯤 드러누워서 포만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김용수 대사 역시 긴장이 풀린 자세였다.

“너무 맛있게 먹었습니다. 역시 장 셰프의 음식은 좀 더 자주 먹으러 왔어야 했어요. 게을렀던 제 잘못이죠.”

“진작에 그러라고 말씀드렸는데 장관님이 워낙 바쁘셔서 그렇죠.”

“그러게 말입니다. 나도 은퇴하고 전 세계에 맛있는 거나 먹으러 다니고 싶은데 놔주지 않네요 하하하.”

“하하하 저 역시 퇴직하고도 불려 왔습니다. 원래 능력 있는 사람들의 인생은 피곤한 법이죠.”

두 사람은 배가 불러 기분이 좋은지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소화를 시키고 있었다.

“근데 김용수 대사님.”

“네 장관님.”

“분명 오늘 만찬은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그냥 맘 편히 밥 먹는 자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맞습니다. 맘 편히 밥만 먹는 자리니깐 이렇게 혼자 오신 거 아닙니까?”

줄곧 미소를 머금고 있던 바누스 장관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근데 오늘 이 음식들은 평범한 음식이 아닌데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김용수 대사는 시치미를 뗐지만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역시 바누스 장관 정도의 사람이 이 만찬 메뉴들이 뭘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이 메뉴들이 우연일 리는 절대 없을 거고, 김용수 대사님은 내가 상대하기엔 버거운 상대이니 장 셰프, 잠시 얘기 좀 할까요?”

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면 다시 한번 바누스 장관의 앞으로 향했다.

“파나르에 대해 애정을 가졌는지는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런 말 없이 바누스 장관의 눈빛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건 이미 많이 사라진 문화인데 이런 것까지 알고 있다니 정말 놀랐습니다.”

“언제부터 눈치채셨습니까?”

“아마도 포솔레가 나올 때가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포솔레를 준비한 건 온전히 날 위한 만찬이란 걸 표현하기 위함이었을 텐데 돼지고기가 아닌 내장으로 만들었단 말에 조금 눈치를 챘습니다.”

바누스 장관은 기분이 좋아 보였지만 한편으론 조심스러웠다. 비록 철 지난 문화지만 대통령만을 위한 만찬 메뉴가 올라왔으니 맘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엔 파나르와 비슷한 문화는 없지만 비빔밥이야말로 청와대 만찬에 꼭 빠지지 않는 메뉴입니다.”

“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다른 음식들도 전부 한국식으로 만든 것이니 너무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파나르 대통령이 먹는 음식과는 완전히 다른 음식들입니다.”

“그렇긴 해도 나 역시 대통령님 없이는 처음 대접받아 보는 거라 느낌이 묘하네요. 옛날이었으면 우리 다 잡혀갔습니다 하하하.”

김용수 대사는 쑥스러워하는 바누스 장관에게 쐐기를 박았다.

“그럼 이 메뉴를 대접받는 게 정당한 자리로 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에이 잘 알겠지만 나는 그렇게 유력한 후보가 아니에요 김용수 대사님. 물론 아까 했던 말처럼 최선을 다하겠지만 내가 당선될 확률은 희박해요.”

바누스 장관의 말이 사실이지만 나와 김용수 대사는 끝까지 그를 응원하고 싶었다.

처음 시작은 한국에 호의적인 태도를 가진 바누스 장관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바누스 장관의 진심을 알게 된 후 그를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격렬하게.

“파나르 국민들이 바누스 장관님의 진심을 알아주면 좋을 텐데요. 그럼 차기 대통령은 보나마나 장관님이 당선될 텐데….”

“그러면 좋겠지만 쉽지 않겠죠. 혹여 당선이 안 되더라도 저는 지금처럼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겁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오늘 만찬은 정말 고마웠습니다. 맛도 너무 좋았지만 메뉴 구성이 참 맘에 들었습니다.”

바누스 장관의 말은 대통령만을 위한 메뉴를 준비해 줘서 맘에 들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날 대통령만큼 중요한 손님이라 생각해 준 것도 고마웠고, 좋지 않은 문화지만 파나르의 그런 문화까지 공부해 만찬을 준비해 줘서 고마웠습니다.”

“천만입니다.”

“두 사람이 파나르를 사랑하는 만큼 나도 한국에 더욱 애정을 쏟도록 하겠습니다.”

바누스 장관과 김용수 대사는 두 손을 맞잡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 고생 많았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두 중년을 바라보며 아직 할일이 많이 남았으니 지치지 말라며 눈빛을 보내 주었다.

“이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젠 정말 자주 놀러 오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죠, 장 셰프?”

“당연히 괜찮습니다.”

“나 대통령 떨어지면 시간이 많아질 텐데 그땐 장 셰프가 나보다 더 바빠지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되더라도 여기에 꼭 있을 테니 언제든지 놀러 오세요.”

“말이라도 고마워요.”

바누스 장관은 어둑해진 관저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늦은 밤이었지만 자신의 나라를 무서워할 순 없다며 혼자 귀갓길을 선택했다.

“참 괜찮은 분이시죠?”

“그런 것 같습니다. 처음엔 참 무섭고, 예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때 역정을 낸 이유도 다 애국심 때문이었을 겁니다. 자신의 나라를 버리고 떠난 사람들에 서운했던 거죠.”

“저런 분이 대통령이 된다면 국민들은 참 좋겠어요.”

“글쎄요. 바누스 장관은 분명 좋은 사람이지만 혼자서 다 이끌 순 없어요. 주위에서 아주 힘들게 할 거예요. 걱정하는 것처럼요.”

나와 김용수 대사는 바누스 장관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대문 앞에서 서 있었다.

* * *

며칠 후 파나르 한국 대사관.

고요한 오후 사무실에서 벨 소리가 크게 울렸다. 벨이 울리는 곳은 김용수 대사의 사무실 안이었다.

김용수 대사의 직통 번호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보세요. 주 파나르 한국 대사관 김용수 대사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용수 대사님 맞으신가요?”

-네 맞습니다. 실례지만 전화를 거신 분은 누구십니까?”

파나르어가 아닌 영어로 통화를 하는 김용수 대사였다. 대사관 직원들은 본능적으로 김용수 대사의 통화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파나르 대통령실의 비서입니다.”

-네? 어디시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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