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사관의 천재 요리사 되다-162화 (163/202)
  • 162. 결심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오늘 메뉴들은 눈을 즐겁게 해 주는 음식들이었다.

    두 번째 메뉴 역시 화려한 색감이 먼저 바누스 장관의 눈을 사로잡았다.

    “두 번째 음식은 오색 대하찜입니다.”

    “대하? 대하라면 큰 새우를 말하는 거죠?”

    “네 맞습니다. 파나르에도 비슷한 음식이 있나요?”

    시치미를 떼고 바누스 장관에게 물었다.

    “물론이죠. 우리 파나르에서도 새우를 즐겨 먹습니다. 다만 이렇게 큰 새우는 조금 비싸기 때문에 맘껏 먹을 순 없지만요.”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대하찜은 조선 시대에 왕이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 주로 제공하던 음식입니다.”

    왕이 먹던 음식이라는 말에 바누스 장관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삶은 계란을 분리해서 채에 거르고, 잘게 다진 청, 홍고추 그리고 석이버섯까지 다섯 가지 재료를 고명으로 사용했습니다.”

    “이 음식 역시 색깔이 아름답군요.”

    커다란 찐 새우 위에 올려진 고명은 일반 고명과는 조금 달랐다. 오색의 빵가루를 뿌린 것처럼 포슬포슬한 고명을 새우가 등에 업고 있었다.

    고명의 용도는 물론 음식을 이쁘게 만들어 주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맛의 조화를 위해서기도 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대하를 질기지 않게 쪄 냈기 때문에 그 탱탱한 식감을 고명이 방해하지 않길 바랐다.

    토독토독.

    한껏 부푼 새우살이 입 안에서 터지며 맛깔스러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잠시였지만 식탁 위에선 새우를 씹는 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아… 역시 달라. 확실히 다릅니다.”

    “뭐가 다릅니까? 장관님.”

    “장 셰프의 요리는 확실히 다릅니다.”

    김용수 대사는 흐뭇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 갔다.

    “아직 두 번밖에 먹어 보지 못하긴 했지만 장 셰프의 요리엔 꼭 포인트 하나씩이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포인트요?”

    “예를 들면 저번에 먹었던 감자전에 치즈를 이용하고, 김치볶음밥에 말고기 기름을 쓴 것처럼요. 그리고 오늘은 이 새우에서 뭔가 익숙하면서도 은은한 향이 나는 것 같은데. 내 혀가 제대로 느낀 건가요?”

    바누스 장관의 입맛은 나이가 들었음에도 여전히 건재했다. 그 맛을 느낄 수 있는 일반인들은 그리 많지 않을 텐데 바누스 장관은 놓치지 않았다.

    “역시 미각이 대단하십니다. 새우의 잡내를 잡기 위해 쿠므스를 사용했습니다.”

    “쿠므스요? 우리 파나르 술 말인가요?”

    “네 맞습니다. 쿠므스는 향이 너무 세지 않고, 낙타젖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비린내 제거에도 탁월합니다. 우유 같은 유제품으로 생선이나 고기의 비린내를 잡는다는 얘기 들어 보셨습니까?”

    “하하 장 셰프가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군요. 저는 먹을 줄만 알지 만드는 데는 영 소질이 없습니다. 우유가 그런 역할을 하는지 몰랐군요.”

    머쓱해하는 바누스 장관에게 자기도 그렇다고 공감해 주는 김용수 대사였다.

    “잘 숙성된 쿠므스에 새우를 담가 뒀다가 쪄 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알렉스의 회사에서 만든 쿠므스가 장 셰프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졌다죠?”

    “장관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물론이죠. 알렉스의 그 사업은 우리 파나르 정부도 함께 참여한 거니까요.”

    파나르 최고의 부자인 알렉스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우리 김용수 대사님의 능력도 탁월하지만 장 셰프의 외교 능력도 만만치 않았네요. 최근에 티브이에 나온 것도 아주 재밌게 봤어요.”

    “그것까지 보셨습니까? 부끄럽네요.”

    “부끄럽다뇨. 우리 파나르 문화를 진정으로 존중해 주는 모습을 보고 감명받았습니다. 사실 나도 가끔은 파나르 사람들이 너무 각박하다고 생각한 적도 많거든요.”

    “그렇군요.”

    “외국인으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또 그걸 제대로 써먹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요리도 훌륭했지만 솔직히 난 그 태도가 더욱 좋았어요.”

    바누스 장관의 말투에선 파나르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 나왔다. 일을 할 땐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대통령으로서도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응원해 주고 싶단 마음이 조금 더 커진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럼 빠르게 다음 음식으로 넘어가 볼까요?”

    “원하던 바입니다.”

    바누스 장관의 호쾌한 대답과 함께 다음 음식으로 넘어갔다.

    킁킁.

    준비한 음식을 따뜻하게 한 번 더 끓이자 냄새가 관저 안을 가득 채웠다.

    바누스 장관은 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이 섞인 음식 냄새에 곧바로 반응했다.

    “이 냄새 어디서 많이 맡아 본 냄새 같군요. 어릴 적에 제가 좋아하던 멕시코 음식 냄새랑 비슷하네요. 냄새를 맡으니 먹고 싶군요.”

    “그 음식이 뭔진 몰라도 장 셰프가 준비한 음식이 그거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그건 그리 흔한 음식이 아니거든요. 장 셰프가 아무리 멕시코 음식에 능숙하다 해도 이건 잘 모르는 음식입니다. 그리고 묘하게 다른 향이 섞여 있어요.”

    “그게 무슨 음식인데요?”

    나는 뜨겁게 달궈진 뚝배기를 가지고 주방을 나섰다. 저번엔 여기에 김치볶음밥이 담겨져 있었지만 오늘은 조금 특별한 음식이 담겨 있었다.

    “다음 음식은 김치 포솔레입니다.”

    “네? 장 셰프 방금 뭐라고 했어요? 혹시 포솔레라고 했어요?”

    “네 맞습니다. 소고기 내장과 김치로 맛을 낸 김치 포솔레입니다.”

    바누스 장관이 놀란 표정으로 자기 앞에 음식이 놓여지는 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수많은 만찬에 초대받아 봤지만 포솔레가 메뉴로 나온 적은 처음이라고 했다.

    “장관님은 잘 아시겠지만 포솔레는 옥수수와 토마토로 끓인 스튜입니다. 보통은 돼지고기를 많이 쓰지만 오늘은 특별하게 소고기 내장을 이용해서 끓여 봤습니다.”

    “잠시만요 장 셰프. 내가 이 음식에 대해서 잘 알 거란 걸 어떻게 확신했죠?”

    바누스 장관의 고개는 자연스레 김용수 대사를 향했고 김용수 대사는 별일 아니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장관님께 들인 시간이 얼마인데 그 정도도 모를까 봐서요? 어릴 적부터 멕시코 음식을 즐겨 드셨단 것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허허허. 그렇긴 해도 파나르에서 이 포솔레는 참 반갑군요.”

    아직 음식 맛을 보지 못했지만 바누스 장관은 이미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내가 만든 이 포솔레가 설령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두 사람의 관계에는 큰 영향을 끼치진 않을 것 같았다.

    “뉴멕시코주의 산타페라는 도시를 직접 가 보진 못했지만 포솔레라는 음식을 기반으로 해서 다른 음식을 만들어 봤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음식이 김치 포솔레입니까?”

    “네 맞습니다. 이렇게 내장이 들어간 음식은 조금 맵고 얼큰하게 만들어 먹는 방법이 좀 더 좋은 요리법이지만 한국 음식은 장관님께 너무 자극적일 수가 있습니다.”

    “음.”

    내 말에 동의하면서도 그 자극적인 맛도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근데 이 김치라는 게 한국 음식이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많은 음식들과 은근히 잘 어울립니다. 그냥 먹을 때보다 이런 식으로 끓여 먹는 음식에는 더더욱이요.”

    “김치가 훌륭한 음식이란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 포솔레와 얼마나 잘 어울릴지 궁금하네요.”

    바누스 장관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후르릅.

    “…….”

    “……?”

    “캬아….”

    만국 공통 감탄사였다.

    얼큰하고 뜨끈한 국물 요리를 삼키면 누구라도 비슷한 소리를 낸다. 뜨끈한 포솔레를 한입 삼킨 바누스 장관은 눈을 감고 한동안 뜨질 못했다.

    추억에 잠겨 있는 거겠지.

    “하… 좋네요. 이 뜨끈함과 걸쭉함.”

    “입맛에 맞으세요?”

    “솔직히 제가 좋아하던 포솔레와는 많이 다른 맛이네요.”

    “아… 그런가요?”

    역시 퓨전 요리는 모 아니면 도였을까.

    맛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는 음식이긴 했지만 당사자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근데 이 김치 포솔레도 훌륭하네요.”

    “……!”

    “장 셰프가 말했던 것처럼 이 내장들과도 잘 어울리고, 김치 특유의 맛이 은근히 잘 어울리네요.”

    바누스 장관의 숟가락은 멈추질 않았다.

    김치가 들어간 내장탕의 종류인 한국식 포솔레는 바누스 장관의 맘에 쏙 들었다.

    건더기 하나도 남기지 않고 그릇을 통째로 비워 버린 바누스 장관이었다.

    “김용수 대사님 그리고 장 셰프님.”

    “네 장관님.”

    “뭐가 더 필요하신가요?”

    세 번째 음식까지 제공된 시점에 바누스 장관이 나와 김용수 대사에게 질문을 했다.

    “두 분이 파나르에 오신 지 얼마나 되셨나요?”

    “저희요?”

    “거의 같이 왔으니깐 이제 2년 정도 다 되어 가네요. 왜 그러시죠?”

    “2년이라….”

    먼저 질문을 해 놓고 혼자 중얼거리는 바누스 장관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김치 포솔레는 개인적으로 레시피를 알고 싶을 정도네요. 돼지고기 대신 내장을 사용한 것도 인상적이었구요. 아주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레시피는 얼마든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래 주면 나야 감사하죠.”

    바누스 장관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조금씩 의심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 요리는 비빔밥입니다.”

    “호오 그 유명한 비빔밥!”

    “대한민국 대통령 만찬 땐 빠지지 않고 늘 식탁에 올라오는 메뉴입니다. 장관님과 저도 이 비빔밥의 고명들처럼 잘 화합하고, 더욱 어우러질 수 있으면 합니다.”

    바누스 장관은 능숙하게 고추장을 넣고 밥을 비비며 대답했다.

    “우린 이미 이렇게 잘 비벼진 비빔밥 아닙니까?”

    “하하 맞습니다. 장관님의 배려 덕에 관계를 잘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바누스 장관은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은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네?”

    “우리가 이렇게 가까이 지내게 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대사님 덕분입니다.”

    “그게 무슨….”

    김용수 대사를 바라보는 바누스 장관의 시선은 심상치 않았다.

    “파나르 장관의 자리가 정년이 없단 거는 알고 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덕분에 제가 오랫동안 외교부 장관으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김용수 대사와 나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안정적으로 오랫동안 일할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기회입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잘릴 걱정 없이 고위직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인생일 것이다.

    하지만 바누스 장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근데 대사님을 뵙고 마음을 좀 고쳐먹었습니다. 그리고 장 셰프를 보면서도 많이 깨달은 게 있습니다.”

    “저를 보고요?”

    “네 맞습니다. 저보다도 나이가 많은 대사님이 뭔가를 해 보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시는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김용수 대사는 묵묵히 자신에 대한 칭찬을 듣고 있었다.

    “사실 대사님 나이 정도면 이제 나라에 희생을 멈추고 보상을 받으며 인생을 정리해도 되는 시기지만 대사님은 그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나라를 위해서요.”

    김용수 대사에 대한 말을 잠시 멈추고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장덕수 셰프처럼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청춘을 보니 가슴속에서 뭔가가 불타오르더군요.”

    바누스 장관은 나와 김용수 대사를 한 번씩 번갈아 가며 쳐다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을 보며 대통령 선거에 꼭 나가겠단 마음을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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